‘양산 통도사 삼화상 진영’ 중 무학 대사 진영.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불교저널 자료사진.
‘양산 통도사 삼화상 진영’ 중 무학 대사 진영.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불교저널 자료사진.

태조 이성계와 무학 대사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부터 긴밀한 사이였다. 1392년 7월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그해 10월 9일 수행과 지혜가 높았던 무학을 왕사로 삼았다. 3년 9월에는 천태종에 소속된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은 것으로 볼 때 태조 주위에 많은 고승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자신의 정치적 횡보에 필요한 자문은 물론 인간적 교류를 통해 무학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무학에게 많이 의존했다는 것은 그만큼 둘의 사이가 각별했음을 시사한다. 무학은 왕사로서 국가적인 불교 행사에서 강설(講說)하고, 새로운 도읍을 정할 때 자문 역할을 하였으며,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인간적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자였다.

왕사로서 국가적 행사에서 강설

태조는 국가의 주요 행사에 무학 대사를 불러 강설을 맡겼다. 태조 1년 10월 태조의 탄신일이므로 사형과 유형 이하의 죄인을 사면하고 4가지 사항을 도당에 하교한 후 시좌궁(時坐宮)으로 돌아와 승려 200명을 궁중에서 공양하고, 왕사 자초(自超, 무학)를 청하여 선을 설법하게 하였다. 현비(顯妃)가 뒤에서 발을 드리우고 이를 들었다.

태조 2년 3월 연복사(演福寺) 5층 탑이 이루어졌으므로 문수법회(文殊法會)를 베풀게 하고 임금이 친히 거둥하였다. 이때 자초의 선법(禪法) 강설을 들었다. 이어 10월 17일에는 완성된 연복사 5층 탑에 대장경을 복장하도록 하였다. 이때 태조는 직접 거둥하여 승려들을 공양하고 대장경을 펼쳐서 읽게 하였다. 그리고 왕사 자초에게 강설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런 역할을 수행한 자초에게 태조는 때때로 선물을 하사하여 그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태조 2년 4월 자초를 대궐 안에서 접대하고 채색 비단〔綵帛〕을 내려 주었다. 그해 7월에는 내시별감(內侍別監) 한계보(韓季輔)를 회암사(檜巖寺)에 보내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이미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깊은 산림 속에 있어서는 안 되니 속히 서울에 오시오.” 하였다. 그러나 자초는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냥 회암사에 주석하였다. 며칠이 지난 19일 회암사에 역질이 돌자 태조는 무학을 광명사에 머물게 하였다. 그런 과정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처음에 자초가 회암사에 있었는데, 금년 봄에 이르러 역질이 발생했으므로 자초가 연복사의 문수법회에 왔다가 법회가 파하고 난 뒤에 회암사로 돌아가지 않고 곡주(谷州)의 불국장(佛國莊)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여름에 회암사에서 역질이 크게 성하여 많은 승려가 죽었다. 이때 자초를 광명사에 있게 한 것이다. 자초가 광명사에 머물자 성중(城中)의 남녀들이 법을 강설하기를 청하는 사람이 날마다 백 명이나 되었다. 그해 8월 11일 태조는 광명사에 거둥하여 왕사 자초를 보고 소격전(昭格殿)으로 거둥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10월 27일에는 왕사 자초를 청하여 재를 베풀게 하고 비단을 하사하였다.

다음 해 태조 3년 2월 17일 임금이 연복사에 거둥하여 문수법회를 구경하였다. 이때 왕사 자초가 죄수를 사면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조 4년 4월 17일 왕사 자초가 회암사에서 능엄회(楞嚴會)를 베풀자 이를 후원하기 위해 쌀·콩 170석과 오승포(五升布) 200필을 내려 주었다. 4년 7월 왕사 자초가 병이 났다. 태조는 전의감 양홍원(楊弘遠)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으며 병이 낮자 홍원에게 내구마 1필을 하사하였다.

태조가 자초를 왕사로서 예우한 일 가운데 특별한 것은 왕사 자초의 부도를 미리 만들게 한 일이다. 태조 6년 7월 22일 경기(京畿) 백성을 징발하여 미리 왕사 자초의 부도(浮屠)를 회암사 북쪽에 만들게 하였다.

태조는 왕사 자초를 개경에 두고자 하였다. 가까운 곳에 머물며 자신을 도와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자초는 이를 거절하였다. 오히려 권력과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한 그는 회암사를 떠나 용문사에 머물고자 하였다. 왕사의 거처를 사사로이 할 수 없어 태조 7년 3월 29일 이를 아뢰었다. 태조가 이를 윤허하지 않아 주석 사찰을 옮기려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 탑. 양주시 제공.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 탑. 양주시 제공.

새로운 왕조의 천도(遷都)에 대한 자문

왕사인 무학 자초는 풍수에도 밝았다. 그런 그의 지혜를 천도에 활용하려는 태조는 자신의 행차에 왕사를 참여시켰다. 태조 2년 2월 11일 태조를 태운 어가(御駕)가 새 도읍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랐다. 지세를 두루 관람한 태조가 왕사 자초에게 어떤지를 물었다. 이때 자초는 “능히 알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조 3년 8월 12일 다시 도읍 터를 둘러 본 태조는 왕사 자초를 자신의 장막으로 불러 같이 식사하였다. 13일 의견을 물었다. 임금이 남경의 옛 궁궐터에 집터를 살피었는데, 산세를 관망(觀望)하다가 윤신달 등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떠냐?” 윤신달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 경내에서는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아쉬운 것은 건방(乾方)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뿐입니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송경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임금이 또 왕사 자초(自超)에게 물었다. “어떠합니까?” 자초가 대답하였다.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

임금이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였다.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

태조와 무학 대사의 인간적 교류

태조와 왕사 자초는 신분 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 깊은 교류가 많았다. 왕사의 역할과 국정의 자문이 아니어도 자초를 만날 수 있으면 그를 불렀고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자신의 내전에서 그와 만났다.

태조 2년 1월 21일 회암사를 지나던 태조는 왕사 자초를 불러 함께 개경으로 갈 정도로 친숙하게 지냈다. 그런 사이였던 관계로 태조 3년 2월 20일 태조는 자초를 내전으로 불러 공양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태조 3년 3월 14일에는 자초의 고향 삼기현(三岐縣)을 승격시켜 감무(監務)로 삼았다.

왕자의 난 이후 상심에 젖어 있던 태조를 위로한 자도 왕사 자초였다. 태조 역시 자초를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태종 2년 8월 2일 임금이 회암사로 가서 태상왕을 조알(朝謁)하였다. 처음에 태상왕이 왕사 자초에게 불교의 계를 받아 육선(肉膳)을 들지 아니하여 날로 파리하고 야위어졌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환관(宦官)을 시켜 자초에게 말하기를, “내가 태상전(太上殿)에 나가서 헌수(獻壽)하고자 하는데, 만일 태상왕께서 육선(肉膳)을 자시지 않는다면, 내가 장차 왕사에게 허물을 돌리겠다.” 하였다.

자초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회암사를 사양하고 작은 암자에 나가 있었다. 임금이 이른다는 말을 듣고 회암사 주지 조선(祖禪)과 더불어 태상왕께 고하기를, “상(上)께서 육선(肉膳)을 드시지 아니하여, 안색이 파리하고 야위어지십니다. 우리들이 오로지 상위(上位)께서 부처를 좋아하시는 은혜를 입어서 미천한 생을 편안히 지내는데, 지금 상의 안색이 파리하고 야위신 것을 보니, 우리들의 생이 오래지 않은 것을 알겠습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말하기를, “국왕이 만일 나처럼 부처를 숭상한다면, 내가 마땅히 고기를 먹겠다.” 하였다. 임금이 들어가 술잔을 올리니, 태상왕이 허락하고 얼굴빛이 안화(安和)해졌다. 임금이 기뻐하여 삼현(三絃)을 들여와 연주하도록 명하고, 소선(素膳)을 올리었으니, 태상왕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함이었다. 태상왕이 조용히 임금에게 말씀하기를, “왕사의 말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 후생에 반드시 머리 없는 벌레가 된다고 하기에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였다. 태종은 자신의 뜻대로 태상왕이 음식을 먹자 말 네 필을 태상전에 바치었다.

회암사에 머물던 태조가 함경도 함주로 옮겼다. 이를 걱정한 태종은 2년 11월 9일 왕사 자초를 태상왕의 행재소에 보냈다. 자초는 태상왕께서 공경하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속히 환가(還駕)하기를 청하는 자신의 뜻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인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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