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대리’ 두 철과 문도 사찰의 ‘주말 주지’를 일년 산 정도인 한 스님이 ‘주지학 개론’을 썼다. 제대로 주지 한 번 살아 본적이 없는 스님이 말이다. 불교계 손꼽히는 글쟁이 원철 스님이 본격적인 주지학 개론서‘의 등장에 앞서 주지 입문서 격인 《왜 부처님은 주지를 하셨을까?》를 냈다.

부처님 재세시 주지가 있었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참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오늘날 ‘주지’는 ‘승려의 꽃’이라고 말하는 대덕 스님도 계시니 ‘주지’가 참 매력적이고 메리트(merit) 있는 자리인 모양이다. 선사도 주지하고, 율사도 주지하고, 강사도 주지하고 싶어하니 ‘주지 전성시대’인 모양이다.

하지만 요즘 조계종 교육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주지직’에 가는 과정이 참 어려워졌다. 사실 현 조계종 교육원이 추진하는 교육과정 개편 작업이나 총무부의 주지인사고과 제도를 들여다보면 앞으로 주지하기도 힘들고 주지가 돼서도 살기 힘들어 지겠다. 이때 원철 스님이, 그것도 조계종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원의 소임자 스님이 ‘주지학 개론’을 썼으니, 주지가 ‘큰 관심사’인 모양이다.

하지만 원철 스님의 《왜 부처님은 주지를 하셨을까?》는 주지가 되는 방법을 적은 맞춤형 실용서는 아니다. ‘왜’ 주지를 하려하는 지, 주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먼저 생각하게 하는, ‘제대로 주지가 되려면’ 이 정도 지혜와 사고는 갖춰야 겠다는, 기본적인 정신이 담겨 있다. 하지만, 《왜 부처님은 주지를 하셨을까?》를 읽고 나면 ‘이렇게 해야 제대로 된 주지구나’라는 생각을 불러일으켜 ‘주지 입문서’로 손색이 없을지도 모른다.

원철 스님이 ‘주지할 개론’을 쓴 이유를 좀 들어보자. 스님 얘기는 이렇다.
“사찰은 아무리 ‘대중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이상적으로 말하지만 현실은 책임자인 주지를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즈음 더욱 그런 경향이 짙어졌다. 심지어 거지조차도 동냥을 얻으러 와 주지만 찾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나두 갑자기 무문관으로 결사 들어간 사형을 대신해서 ‘주지 대리’ 두 철과 문도 사찰의 ‘주말 주지’를 일 년 정도 살았다. 그때 주지 교과서가 있다면 시행착오도 줄이고 또 주지로서의 일관성과 원칙을 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책은 그 고민의 편린이다.”

책 쓴 동기가 솔직하다. ‘주지 교과서’의 필요성을 이유로 꼽으니 말이다. ‘선농일치’ 시대의 주지는 수행과 끼니만 걱정하면 됐을 터이지만, 현재의 주지는 참 보통일이 아니다. 많은 사찰이 공원구역 내 있거나 그린벨트, 문화재보존구역 등등에 있어 이곳 사찰의 주지 스님들은 각종 법률을 꾀고 있어야 한다. 자칫하면 ‘전과자’되기 쉬우니 주지하기 참 곤란하다. ‘대리 주지’를 산 원철 스님의 고민이 이러니 다른 스님들의 고민은 어떨까?

원철 스님의 ‘주지학 개론’은 ‘고전적 주지학’을 통해 ‘현대적 주지학’의 가능성을 여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스님은 선종의 ‘고전적 주지’모습을 선어록에서 발췌하고 이를 해설한다.

송·당 시대에는 방장과 주지의 역할이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를 거치면서 이판과 사판이 나눠졌고, 현대에 와서는 복잡다난한 세상에 행정전문승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주지의 역할이 법(法)의 영역이 낮아지고, 행정 영역이 높아졌다고 원철 스님은 보았다. 이판과 사판의 소임이 나누어지면서 수행보다는 ‘살림살이’에 비중을 두는 사판적 의미로 주지의 역할이 기운다는 것이다.

원철 스님은 ‘주지는 복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부처님도 복과 지혜를 겸비해 ‘양족존(兩足尊)’으로 불리 듯, 주지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복’이란다. 주지를 하면서 살이 찐 스님에게 ‘주지살’이라고 놀리니 ‘살이 좀 붙어야 복이 생겨 대중을 먹여 살릴 수 있지’라고 하더란다. 스님은 송나라 대혜종고 선사의 《서장》에서 ‘주지의 다섯 가지 인연’을 찾았다. 이 다섯 가지 인연이 주지의 복이라고 원철 스님은 보았다. 현대적으로 보면 이렇다.

“관공서에서 사찰을 잘 도와주고(외호인연), 신도들이 모여들고(단월인연), 그 산에 머무는 데 장애가 없고(토지인연), 알맞은 수의 대중이 늘 머물고(납자인연), 그리하겨 공부하고 수행할수 있는 도량이 되어야 한다(공부인연).”

원철 스님은 주지복은 이 다섯 가지 인연이 잘 합하여 어우러진 것이라고 강조한다. 스님은 특히 이중에서 앞의 네 가지 인연은 마지막 ‘공부인연’을 위한 것이니, 도연(道緣)이 전제되지 않으면 앞의 네 가지 복은 결국 세속적인 물질적 탁복(濁福)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면 주지가 되어서는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 그 답은 오조 법연 선사가 그 답을 주었다고 원철 스님은 설명한다. 불감 혜근 스님이 서주 태평사 주지를 맡으러 가면서 오조 스님께 하직인사를 할 때의 당부이다.

“절의 주지는 자기를 위해 네 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세력을 다 부려서는 안 된다. 둘째, 복을 다 누려서는 안 된다. 셋째, 규율을 다 시행해서는 안 된다. 넷째, 좋은 말을 다 해서는 안 된다.”

천동 함걸 스님의 ‘주지론’도 인상적이다.
“주지는 세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일이 번거로워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일이 없다고 해서 굳이 찾지도 말아야 한다. 시시분별을 말아야 한다. 주지하는 사람이 이 세 가지 일에 통달한다면 바깥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리라.”
오조 법연 선사와 천동 함걸 스님의 주지학을 보노라면 이 두 스님이 ‘원조 주지학의 대가’라 여겨진다.

‘주지는 갖혀 있는 새와 같다’, ‘주지는 솔선수범해야 한다’, ‘삼십 년 동안 탁발로 대중을 시봉하다’, ‘주지의 자질론’, ‘공찰과 사찰’, ‘주변 사람을 잘 관리해야 한다’, ‘전임자를 예우하라’ 등등 《왜 부처님은 주지를 하셨을까?》의 소제목만 보아도 왜 이 책이 ‘주지학 개론’인지 설명이 된다.
원철 스님은 주지가 추구하는 복의 성질에 따라 ‘가풍’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스님은 묻는다. “법으로 살 것인가? 밥으로 살 것인가?”

원철 스님이 책에 적은 결론은 딱 한가지이다. “주지가 바로 서야 불교가 바로 선다.” 공감하는 말이지만, ‘주지학 개론’이 나와야 하는 불교계 속사정이 있어 보여 서글프다. 나만의 생각일까?
원철 스님/조계종출판사/9,000원

서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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