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지방 각 선원 역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김적음金寂音 씨가 계속繼續하여 지방 선원수와 상황을 보고하다
지방선원수地方禪院數 45개소
수좌명수首座名數 200여 명
52)

적음 스님이 선종수좌대회에서 보고한 선원과 수좌 규모이다. 선우공제회가 창립될 당시 지방 지부는 직지사, 백양사, 범어사 등 19개 사찰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선학원이 이후 7~8년 동안 침체의 시기를 견디고 재건된 것이 1931년의 일이다. 중흥조 적음 스님을 비롯한 선학원의 대중들은 창설 당시의 선풍진작과 선의 대중화를 위해 쇠락한 중앙선원을 쇄신하여 안거 수행을 지속하여 선원 수는 증가하였다. 《선원》 창간호에 소개된 “김적음이 인계 즉시 참선을 시작하니 납자와 신도가 20여 명이었고, 남녀선우회 총 회원이 70여 명, 부인선우회 등의 조직과 규모”를53) 보면 이때 중흥의 기초를 이미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지방 선원의 증가 현황. ( ) 안은 수행 중인 대중 수.
1930년대 지방 선원의 증가 현황. ( ) 안은 수행 중인 대중 수.

<표>는 1931년부터 재단법인을 인가받은 직후인 1935년까지 지방 선원과 안거(安居) 중인 대중 수를 정리한 것이다. 선학원이 재건된 해인 1931년까지만 해도 4개 사찰에 불과하던 선원 수가 1935년 선종 수좌대회 직후에는 45개 사찰로 늘어났으며, 안거 대중 수 역시 1932년에는 212명, 1935년에는 수좌대회 당시와는 차이가 있지만, 329명이나 되었다. 선원의 안거 대중 수 증가는 선학원이 창설과 재건의 목적과 더불어 수행 환경을 향상시키기 위한 선학원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다. 더욱이 선원의 증가는 자발적인 동참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금락선원琴洛禪院은 경북 달성군 화원면 구라동 경북의 명승지인 상화대賞花臺 아래에 있는데, 4년 전(1928) 화주 김성능金性能 화상과 시주 서병규徐丙奎 씨가 상의하여 은해사 포교당으로 허가를 얻어 작년 겨울부터 선회禪會를 개최하고 남북의 운수객雲水客을 모집하여 선학禪學 연구를 시킨다 했으며, 화주 김성능 화상은 불상佛像, 경전, 기타 서적, 종鐘 등을 헌납하고, 시주 서병규 씨는 5만 원 이상의 건물과 답沓 80여 두락, 전田 300여 두락을 헌납하여 영구완실永久完實한 선회禪會를 개최하였다고…58)

비록 재정 문제로 문을 닫는 선원도 있었지만, 경북 영천의 금락선원은 절의 불상을 비롯한 불구(佛具) 등을 처분하고, 건물과 전답을 내놓아 선원을 개원해 선풍을 진작(振作)하기 위해 운수납자들이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선원을 개원한 것은 이제까지 기복불교(祈福佛敎)만을 강조했던 불교 이해와 그 신앙 양상이 선불교로 전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선리참구원은 법인의 재정과 선원 수의 안정화를 위해 진력하는 한편 선원의 수행지침을 만들고, 수행의 대중화를 위해 만전을 기하기도 하였다. 선종수좌대회 당시에도 “경성은 조선 문화의 중심지인 만큼 중앙선원(中央禪院)의 내용을 완실히 하기 위하야 청규수조(淸規數條)를 특정(特定)”하였다.59)

선리참구원이 중앙선원을 설치한 것은 선학원이 동시대 불교계와는 다른 상징성을 보여주었다. 선학원은 설립 이후부터 대처승과는 다른 비구승만의 수행 공간을 할애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예컨대 1931년 3월 23일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 개최 당시 불교계의 대표기관인 교무원(敎務院) 종회에 선 수행의 중심기관인 중앙선원 설치 건의안을 제출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부결한 바 있다.60)

비록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선학원은 중앙선원과 그 청규를 통해 정체성과 독자성을 천명했다. 때문에 중앙선원이 근대 불교사에서 지닌 의미나 상징성은 큰 것이었다.

첫째, 선원이 선종의 정체성 확립과 선종 부흥을 구현하는 실천의 장이었음을 상징하고 있다. 선종수좌대회에서는 선종의 정체성을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법규와 규칙이 제정되었는데, <선의원회법칙>, <선회법칙>, <선원규칙> 역시 제정되었다. 무엇보다도 선원은 “상보하화(上報下化)의 임무를 달(達)하기 위하야 설치”되었고, 이를 위해 “각 선원은 개종(改宗)함을 부득(不得)”함을 선종 종규(禪宗宗規)를 통해 천명하였다.61) 중앙선원은 이와 같은 선종의 종규를 모범적으로 시행하였고, 선원 규칙은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오득(悟得)하고자 하는 참선납자(參禪衲子)를 교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선원의 조실(祖室), 입승(立繩), 원주(院主), 전좌(典座), 서기(書記)와 같은 임원과 그들의 직무 및 안거 기간 중의 목욕이나 세탁, 삭발일과 같은 구체적인 부분까지도 제정하였다.62)

둘째, 선종수좌대회에서 제정한 중앙선원 청규는 단순히 수좌들의 수행규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1조 본원本院 납자는 무상출입을 엄금하고 매월 3일, 8일에 목욕하며 교외에 산보함을 득得함. 단 개인 산보는 불허不許함

제2조 본 선원은 한인출입閑人出入을 엄금함

제3조 본선원 좌선납자는 7인으로 함

제4조 본선원은 빈객賓客의 숙식宿食은 별처別處로함

제5조 본선원은 음주, 식육, 흡연, 가요등 일체 잡란雜亂을 금지함

제6조 본선원은 불전작법佛殿作法시에 남녀좌석을 구별하야 혼잡함을 부득不得함

제7조 본선원은 좌선과 공양응공供養應供 시에 법복法服을 일제히 피착被着함

제8조 본선원은 주공做工상 필요없는 훤화喧?와 희담戱談함을 부득不得함63)

선종수좌대회에서 제정한 중앙선원 청규다. 청규는 율장(律藏)에 근거하여 만든 선종의 규범이자 승가 생활의 모든 규범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근대 한국 선원의 청규는 1899년과 1902년 경허 선사의 결사청규를 비롯하여 6개의 청규가 대표적이다. 이들 청규는 선원 운영의 요체이자 선원의 성격을 극명하게 대변해 주는 대상이다. 그런데 중앙선원의 청규는 단순히 일개 선원의 청규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5, 6, 7조는 일제하 불교계의 왜색불교화의 경향을 경계한 것이다. ‘식육금지(食肉禁止)’와 ‘남녀좌석(男女座席)’ 구별은 대처식육으로 대표되는 왜색불교를 엄격히 금지하여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재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대처식육의 문제는 한국 불교의 호법(護法)과 항일의 성격을 동시에 포함한 일제하 불교계의 화두였다. 더욱이 대처문제는 교육제도의 개선과 유학승 문제, 총독부의 불교 정책 등 한국 불교의 존립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선학원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어 일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된 정화운동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속에 관해서는 일체 행사行事를 멈추고 출가하여 도를 닦는 이중二衆을 비구·비구니라고 하는데 불율佛律의 250계, 10중대계十重大戒, 48경계四十八輕戒를 받고 처대육식妻帶肉食을 엄히 금하는 것이 상설霜雪과 같다.64)

출가 수행자들이 삼보(三寶)의 하나로서 귀의와 공양 공경을 받게 되는 것은, 청정한 계행에 근거한 수행을 하기 때문이다. 계와 율은 개인의 청정과 해탈, 그리고 승단의 청정과 화합을 실현하기 위한 출가자의 삶의 질서이고 수행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대 한국 불교의 계율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일제하의 대처식육 문제는 불교계의 전통과 개혁의 중심과제 역할을 하였다.

대처식육은 살생과 음행 금지에 대한 파계 행위다. 사미율의(沙彌律儀), 십계율(十戒律)에서는 첫째 불살생과 셋째 불사음(不邪淫)으로 경계하고 있으며, 《사분율(四分律)》에 의한 250조의 비구계 가운데는 4조의 바라이법이 있다. 음행은 이 가운데 첫 번째 항목인데 출가자로서 여성과의 성교를 말한다.65) 한국 불교는 전통적으로 청정지계(淸淨持戒)를 원칙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 사례는 승려의 비문이나 각종 승전(僧傳) 기록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득도得度 후에 연령이 만 20세 이상에 이른 자는 비구계比丘戒를 수지受持하게 함. 다만 대처식육하는 승려에게는 이를 불허함.66)

1912년 10월 15일 조선 총독부가 인가한 각 본말사법은 대처식육하는 승려가 비구계를 수지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조선 총독부는 적어도 1910년대 초까지 대처식육의 건의67)와 풍조가 있었지만, 한국 불교가 지닌 청정지계를 법적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유학승들이 귀국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상황은 심각해져 갔다. 유학승들은 일본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대부분 결혼을 하였고, 귀국 후에는 당시 불교계의 개혁 세력으로 등장하여 보수 세력과 대립하기도 하였다.68) 더욱이 대처 유학승들은 귀국 후 본산(本山)의 사찰의 주지에 취임하고자 그 사법(寺法)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현재 조선에서 종전 30본산의 주지직에 있는 자는 계율을 엄격히 지킨 청정한 승려가 아니면 안 되었다고 한 것이 사법寺法의 명문明文에 규정되어 왔지만, 근래 내지內地 유학 출신 청년 승려의 귀국이 늘어남에 따라 그 본산에 들어가는 자가 많아진 일이 원인이 되어 내밀히 부녀를 거느리고, 승계僧戒를 문란하게 하는 자가 증가함에 따라 오히려 사법寺法을 다시 고쳐 육식대처를 공식적으로 허락하자고 주장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본산 측에서 당국의 양해를 구하는 운동을 하기에 이르렀으며…69)

1926년 불교계의 상황은 한국 불교의 근간이었던 청정지계의 정신이 세속의 유행에 따라 변질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더욱이 “축처(畜妻) 여부는 개인에 관한 문제여서 공인하는 것은 불가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거론할 필요도 없지 아니한가” 하는 논의까지 일어났다.70) 결국 대처승들은 총독부 당국에 대처식육을 인정하는 사법(寺法)의 개정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주]-----

52) 禪宗中央宗務院(1935), <三. 地方禪院狀樣報告>, 《朝鮮佛敎禪宗首座大會會錄》, 경성: 중앙인쇄소, 14쪽.

53) 선학원(1931), 《禪苑》 창간호, 경성: 선학원, 28~29쪽.

54) 선학원(1932), 《禪苑》 2호, 경성: 선학원, 42쪽.

55) 선학원(1932), 《禪苑》 3호, 경성: 선학원, 87~88쪽.

56) 선학원(1932), 위의 책, 72~73쪽.

57) 선학원(1935), 《禪苑》 4호, 경성: 선학원, 42~43쪽.

58) 선학원(1932), 《禪苑》 2호, 경성: 선학원, 87쪽.

59) 禪宗中央宗務院(1935), 앞의 자료, 16쪽.

60) 선학원(1931), 《禪苑》창간호, 경성: 선학원, 29쪽.

61) 禪宗中央宗務院(1935), <朝鮮佛敎禪宗宗規>, 위의 자료, 22~23쪽.

62) 禪宗中央宗務院(1935), <禪院規則>, 앞의 자료, 43~45쪽.

63) 禪宗中央宗務院(1935), <中央禪院淸規>, 앞의 자료, 21쪽.

64) 白龍城(1926), <僧侶肉喰妻帶問題に關する嘆願書>, 《朝鮮佛敎》 第27號, 1926, 33쪽.

65) 凝然大德 著 平川彰 譯(2004), <律宗>, 《수행과 계율》, 제10회 선우논강 발표 요지문, 서울, 109쪽.

66) <各本末寺法> 第8章 僧規, 58條, 《朝鮮佛敎通史》 下, 민속원, 1918, 1149쪽.

67) 한용운은 1910년 3월 <中樞院獻議書>와 同年 9월 <統監府建白書>를 제출하여 승려의 결혼을 허락하여 줄 것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한용운 지음·이원섭 옮김(1992), 《조선불교유신론》, 운주사, 25~130쪽.

68) 유학승들이 졸업하여 귀국하는 날이면 경성역에서 하차하기 전에 취처(娶妻)부터 해서 지나간다고 하여 스승들이 제자들의 유학을 싫어한다고 하였다.〔<佛敎月旦>, 《佛敎》 제4호(불교사 1924, 61쪽.)〕

69) <僧侶肉·妻帶の可否>, 《朝鮮佛敎》 제26호, 1926, 23쪽.

70) 백성욱(1926), <현대적 불교를 건설하려면>, 《불교》 24, 불교사, 8~16쪽.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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