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건원릉. 사진 제공 문화재청.
태조 건원릉. 사진 제공 문화재청.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 태조는 왕자의 난 이후 선위(禪位)할 때까지 7년 동안 권좌에 있었다. 이 기간에 다음과 같은 불교 배척의 상소가 올라왔다.

사헌부의 불교 배척 상소

태조 1년 7월 20일 사헌부에서 기강 확립, 승려의 도태 등 10개 조목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다. 승니를 도태(淘汰)시키는 일은 아홉째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법이란 것은 오랑캐의 한 가지 법입니다. 한나라 영평(永平) 때 처음 중국에 들어왔는데, 동방으로 전해 와서는 숭봉 함이 더욱 심해져서 연방(蓮坊; 사찰)과 감우(紺宇; 사찰)가 높다랗게 서로 바라보게 되고, 방포(方袍; 가사)와 원정(圓頂; 승려)이 중외에 널리 가득히 차 있었습니다.

그 법이 본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으로써 종지로 삼았으니 그 무리들은 바위 구멍 속으로 멀리 도망해 숨어 푸성귀만 먹고 물만 마시면서 정신을 수련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평민들과 섞여 살면서 혹은 고상한 말과 미묘한 이치로써 사대부를 현혹하기도 하고, 혹은 사생죄보(死生罪報)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공갈하기도 하면서 마침내 시속(時俗)의 사람들로 하여금 유탕(流蕩)하여 본업에 돌아갈 것을 잊게 하였습니다.

심한 자는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을 입으며, 재물을 늘리고 여색을 탐하니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그 무리들을 모아 학문과 덕행을 자세히 상고하여 그 학문이 정밀하고 덕행이 닦아진 사람은 그 뜻을 이루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머리를 기르게 하여 각기 생업에 종사하게 하소서.”

이 상소에 대해 태조는 승니를 물리치고 도태시키는 일은 건국 초기에 갑자기 시행할 수 없다고 반대하여 실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조 동안 지속된 불교 배척은 너무나 빠르게 온 셈이다.

대사헌 남재(南在)의 불교 배척 상소

태조 1년 9월 21일 남재가 상소하였다.

“삼대(三代; 중국의 하·은·주) 이래로 유학의 도가 밝지 못하온데, 진(秦)나라의 분서(焚書)를 겪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한나라 명제(明帝) 때에 이르러 불교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왔는데 초왕(楚王) 영(英)이 가장 먼저 이를 좋아했으나 마침내 단양(丹陽)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양나라 무제는 이를 가장 독실히 믿었으나 대성(臺城)에서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불도징(佛圖澄)은 조(趙)나라를 능히 보존하지 못하였고, 구마라즙(鳩摩羅什)은 진(秦)나라를 능히 보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공(指空)은 원나라를 능히 보존하지 못했으니 역대 군주가 불교를 공경하여 능히 그 복을 누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 동방으로 말한다면 신라가 불교에 미혹하여 그 재력을 다 없애서 탑묘(塔廟)가 민가에 절반이나 되더니 마침내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의종(毅宗)은 해마다 3만 명의 승려들을 공양하였고, 달마다 십여 곳의 절에 다녔으나 마침내 임천(臨川)에서 탄식함이 있었습니다. 공민왕은 해마다 문수법회(文殊法會)를 개최하고 보우와 나옹을 국사로 삼았고, 보우와 나옹 모두 사리가 나올 정도로 고승이었지만 나라의 멸망을 구원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일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설은 믿을 것이 못 됨이 명백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불교의 청정과욕(淸淨寡欲)을 흠모하려 한다면, 선왕의 공묵무위(恭默無爲) 사상을 본받을 것이고, 불교의 자비불살(慈悲不殺)을 본받으려 한다면 선왕의 능히 관인(寬仁)하고 능히 호생(好生)하는 덕을 생각할 것이고, 불교의 인과응보의 설을 두려워한다면 선한 자를 상주고 악한 자를 처벌하고, 죄 가운데 의심나는 것은 경하게 처벌하고, 공 가운데 의심나는 것은 중하게 상주는 것으로 규범을 삼을 것입니다. 이같이 한다면 다만 백성들만 그 은택을 입을 뿐만 아니라 천지 귀신도 또한 몰래 돕게 될 것입니다.”

이후에도 대사헌 남재는 태조 2년 1월 16일 임금이 궁전에 앉아 있는데 불교의 폐해를 남김없이 진술하여 배불의 선봉에 섰다.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 태조실록. 국보. 서울대 규장각 소장. 불교저널 자료사진.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 태조실록. 국보. 서울대 규장각 소장. 불교저널 자료사진.

도평의사사의 불교 배척 상소

태조 1년 9월 24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배극렴·조준 등이 22조목을 상언(上言)하였다. 그 가운데 불교를 배척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승려가 되려는 사람이 양반의 자제이면 오승포(五升布) 100필을, 서인이면 150필을, 천인이면 200필을 바치게 하여 그들이 사는 곳의 관사에서 들어온 베의 숫자를 계산한 후 도첩을 주어 출가하게 하여 제 마음대로 출가하는 사람을 엄격히 다스려야 합니다.

승려들이 중앙과 지방의 대소 관리들과 결당하여 혹은 사찰을 건축하기도 하고, 혹은 불서를 인쇄하기도 하며, 심지어 관사에까지 물자를 청구하여 백성들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일절 모두 금단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소에 대해 태조가 그대로 따랐다.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의 불교 배척 상소

태조 1년 공부(貢賦)를 상정(詳定)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한 관청에서 10월 12일 상소를 올렸다. 그 가운데 고려조의 지나친 불교 숭상에 따른 비용 손실이 국가의 폐망으로 이어졌다는 인식이 나타나 있다.

“고려 태조는 태봉의 사치 포학한 뒤에 일어나서, 공검(恭儉)하고 절용(節用)하는 것으로 법을 후세에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겨우 두서너 대가 되어 광종이 이를 계승하자 사치를 극도로 하여 궁실과 의복·음식이 제도에 지나쳐서 그 1년에 소비한 것이 태조의 10년간의 용도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양박(涼薄)한 것에 법을 만들어도 그 폐단은 오히려 탐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기에 와서는 더욱 그 욕심을 극도로 내어 여러 번 그 제도를 변경하여 세입을 증가시켰지만 토목의 역사에 소모하기도 하고, 혹은 불신(佛神)의 숭봉에 다 없어져서 부고(府庫)에 남은 물건이 없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용도가 넉넉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정한 공부(貢賦) 외에 또 부당한 징수를 가하여 마침내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흩어지게 되어서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교화를 혁신하는 시기에 마땅히 고쳐서 바로 잡아야 될 것입니다.”

이지(李至)의 불교 배척 상소

태조 7년 윤5월 이지가 불교 배척의 상소를 올렸다.

“불교는 인륜을 끊고 세상 밖에 몸을 두고는 허무, 괴탄(怪誕)의 설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속여서 혹은 가람이라 일컫기도 하고, 혹은 비보사찰(裨補寺刹)이라 일컫기도 하여 온갖 방법으로 사찰을 건축하여 승려의 무리가 숲처럼 많아서 하는 일 없이 백성의 힘에 먹게 되고, 혹은 불상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불서를 인쇄하기도 하여 의발을 만들어 안거에 제공하고, 발원문을 기술하여 연화(緣化)를 일컫고는 서울과 지방에 마음대로 다니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게 되며, 심한 것은 위협해 따르게 하여 한정이 있는 재산을 소비하여 한이 없는 욕심을 채우게 되니 국가의 큰 근심입니다. 어찌 죄지은 사람이 부처에게 뇌물을 바치고서 면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그 원문을 회수하고 그 연화를 금하게 하며, 혹은 내탕(內帑)으로써 절에 뇌물을 바치고, 혹은 내전(內殿)에서 기도하여 재앙을 물리치게 하는 등의 일도 또한 모두 금단시키고, 조심하고 삼가며 두려워하고 반성한다면 모든 복이 다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불교에 힘입겠습니까? 그 혹시 재상, 사대부, 환관의 무리 가운데 감히 사찰을 건축하는 일로써 말을 올리는 사람은 엄격히 징계하여 내쫓게 할 것입니다.”

간관의 불교 배척 상소

태조 7년 11월 간관이 시무 4조목을 상소하였다. 불교를 배척하라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교의 도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사욕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종지로 삼으니, 그 사사(寺社)를 건축하고 부처를 만들고 탑을 만드는 것은 다만 그 사소한 일인데, 무식한 중들은 아무 절을 건축하고 아무 불경을 피람(披覽)한다고 일컬으면서 임금의 수결(手決)을 함부로 받아, 원문(願文)을 가지고 군현에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수령들을 능욕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오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원문을 가지고 궁금(宮禁)에 출입하여 임금의 수결을 함부로 받지 못하게 하고, 또 사사로이 원문을 가지고 민호(民戶)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백성의 재물을 침탈하지 못하게 하되, 감히 영을 어긴 사람이 있으면 있는 곳의 관사에서 엄격히 죄를 다스리게 하여야 합니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