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보물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생의(生義) 스님이 경주 남산 삼화령에 모신 미륵삼존상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제공 문화재청.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보물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생의(生義) 스님이 경주 남산 삼화령에 모신 미륵삼존상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제공 문화재청.

진흥왕 대 국선(國仙)으로의 미륵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은 민가의 낭자 가운데 아름답고 예쁜 사람으로 3, 4백 명을 뽑았다. 그들 가운데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峧貞娘)을 뽑아 원화(原花)로 삼고 효도와 우애, 그리고 충성과 신의를 가르쳐 나라의 인재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남모를 질투한 교정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취하게 한 뒤 북천(北川)으로 메고 가서 돌로 묻어서 죽였다.

그 무리들은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프게 울다가 헤어졌다. 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노래를 지어 동네 아이들을 꾀어 거리에서 부르게 하였다. 남모의 무리들이 그 노래를 듣고 그 시체를 북천 중에서 찾아내고 곧 교정을 죽였다. 이에 대왕은 영을 내려 원화 제도를 폐지하였다.

여러 해 뒤에 왕은 또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때는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로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화랑(花郞)이라 하였다. 처음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았다.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이며, 국선은 미륵을 상징하였다.

진지왕대 진자(眞慈)와 국선 미륵

진지왕대 흥륜사(興輪寺)에 진자(眞慈)가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아가 서원을 발하여 말하기를, “원하건대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으로 화하시어 세상에 출현하셔서 제가 항상 거룩하신 모습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들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하였다.

그의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독실해졌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승려가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의 수원사(水源寺)로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진자가 놀라 기뻐하며 그 사찰을 찾아 길을 떠났다. 열흘 동안의 모든 일정을 한 걸음마다 한 번씩을 절하며 갔다. 사찰에 이르자 문밖에 복스럽고 섬세하게 생긴 한 도령이 있었다. 그의 안내로 객실로 올라가는 도중에도 진자가 절을 하였다. 그리고 도령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잘 모르는 나에게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하는가?” 하였다. 도령이 말하기를, “저도 또한 서울(경주) 사람입니다. 스님께서 먼 곳에서 오심을 보고 위로를 드릴 뿐입니다.” 하였다.

잠시 후 그가 문밖으로 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진자는 우연한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절의 승려들에게 지난밤의 꿈과 자신이 이곳에 온 뜻만을 이야기하였다. 그런 후 “잠시 말석에서라도 몸을 붙여 미륵선화를 기다리고 싶은데,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사찰의 승려들은 그의 행동을 보고 허황된 것으로 여기면서도 정성스러운 태도를 보고 말하기를,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예부터 현인과 철인이 살고 있어 명감(冥感)이 많다고 합니다. 그곳으로 가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진자가 그 말을 쫓아 산 아래에 이르니, 노인으로 변한 산신령이 나와 맞으면서 말하기를,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소?” 하였다. 진자가 대답하기를, “미륵선화를 뵙고자 합니다.” 하였다.

노인이 말하기를, “지난번 수원사 문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뵈었는데, 다시 와서 무엇을 구한다는 말인가?” 하였다. 진자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곧장 본사로 돌아왔다.

한 달 정도 지난 후 진지왕이 그 소식을 듣고 진자를 불러 그 연유를 물은 후, “도령이 스스로 서울(경주) 사람이라고 했다면, 성안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소?” 하였다. 왕의 말을 듣고 진자는 무리를 모아 두루 마을을 다니면서 찾았다. 한 소년이 있었는데, 화장을 곱게 하고 용모가 수려하였으며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진자는 그를 보자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분이 미륵선화이다.” 하였다. 이에 다가가서 묻기를, “도령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은 무엇인가?” 하였다. 도령은 “내 이름은 미시(未尸)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성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그를 가마에 태우고 궁에 들어가서 왕에게 뵈었다. 진지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미륵)으로 삼았다.

국선은 7년 정도 세상을 밝게 하더니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국선의 자비로운 은택에 흠뻑 젖었던 진자는 매우 슬퍼하였다. 시간이 지나 미륵의 교화를 친히 접했던 진자는 정성껏 도를 닦았다. 세상 사람들이 그가 그의 입적한 곳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밀행이 높았다.

신라시대 미륵보살 친견과 수계

진표는 전주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나이 12살에 금산사(金山寺)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출가하였다. 후에 순제는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 《점찰선악업보경》 2권을 진표에게 주면서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지장 두 보살 앞에서 정성을 다해 참회를 구하여 친히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 수행하고자 하는 정성이 지극하면 곧 1년 안에 현신의 감응을 받을 수 있다.” 하였다.

스승의 말을 듣고 진표는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선계산(仙溪山) 부사의암(不思議菴)에 이르자 수행할 만한 자리로 여겼다. 20두의 쌀을 쪄서 말려 양식을 삼았다. 처음은 삼업을 갖추어 기도하면서 수련하였다. 이후 점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亡身懺)을 하였다. 처음에 일곱 밤을 기약하고 오체를 돌에 부딪혀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지고 피를 바위에 흩뿌렸으나 성응(聖應)이 없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도록 계법을 구하였으나 수기(授記)를 얻지 못하였다.

분심(憤心)이 일어나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니 갑자기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에 두었다. 법사는 다시 생각을 돌려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열심히 닦고 돌을 두드리며 참회하였다. 3일이 되자 손과 팔이 꺾여 떨어졌고 7일 밤이 되자 지장보살이 나타나 손에 있던 금석(金錫)을 그곳에 대자 손과 팔이 예전과 같이 되었다. 지장보살이 가사와 바리를 주자 진표는 그 영응에 감동하여 더욱 정진하였다. 21일을 채우자 즉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이 오는 형상이 보였다. 이에 미륵보살이 지장보살과 함께 나타나 진표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였다.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기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고 참회를 간절히 구하는구나.” 지장이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은 간자(簡子) 189개를 주었다. 그 가운데 2개는 8자와 9자가 쓰여 있었다. 미륵이 진표에게 말하였다. “이 두 간자는 나의 손가락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단목(沈檀木)으로 만든 것으로 모든 번뇌를 이르는 것이다. 2개는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이른다. 또한 9자는 법 자체이고 8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다. 이제 마땅히 과(果)·보(報)를 알게 되니 너는 이 몸을 버려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후생에는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다. 아울러 너는 이것으로써 세상에 법을 전하여 사람을 구하는 뗏목으로 삼아라.” 말을 마치고 두 보살은 사라졌다.

신라시대 미륵불 조성

선덕왕(善德王) 때 생의(生義)라는 승려가 도중사(道中寺)에 거주하였다. 하루는 꿈에 한 스님이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 풀을 묶어서 표를 하게 하고 산의 남쪽 마을에 이르러서 말하길,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꺼내어 고개 위에 안치해 주시오.” 하였다.

꿈을 깬 후 친구와 더불어 표시해 둔 곳을 찾아 그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보니 석미륵(石彌勒)이 나오므로 삼화령(三花嶺) 위에 안치하였다. 선덕왕 13년(644) 이곳에 절을 짓고 생의사(生義寺)라 이름하였다. 충담(忠談)이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 공양한 것이 바로 이 부처님이다.

감산사(甘山寺)는 서울(경주)에서 동남쪽으로 2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금당(金堂)의 주불 미륵존상화광후기(彌勒尊像火光後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개원(開元) 7년(719) 2월 15일에 중아찬(重阿喰)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하여 감산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돌로 미륵불을 정성껏 조성하였다. 이 일에 아우 양성(良誠),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 후처 아호리(阿好里) 집안 여러 사람이 선한 일에 동참하였다. 돌아가신 초리(肖里) 부인은 동해 흔지(欣支; 현재 영일) 가에 뼈를 뿌렸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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