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못에서 본 익산 미륵사지. 백제 무왕이 용화산 밑에 미륵사를 창건하려 하지 신라 진평왕은 여러 공인을 보내 절 짓는 일을 도왔다. 사진 이창윤.
서연못에서 본 익산 미륵사지. 백제 무왕이 용화산 밑에 미륵사를 창건하려 하지 신라 진평왕은 여러 공인을 보내 절 짓는 일을 도왔다. 사진 이창윤.

백제 사원건축 기술자의 도움

삼국시대 불교건축 기술은 백제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기술력은 신라의 불교건축 건립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신라 황룡사 구층탑 건립이 백제 기술자에 의해 세워진 것을 들 수 있다.

황룡사 구층탑이 건립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즉위 5년(636) 당나라에 유학한 자장 법사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났다. 이때 문수보살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 국왕은 천축의 찰리종(刹利種) 왕으로 미리 불기(佛記)를 받았기 때문에 특별히 인연이 있다. 따라서 동이(東夷)의 여러 종족과는 신분이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하여 사람들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 사견(邪見)을 많이 믿는다. 그런 까닭에 때때로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문비구(多聞比丘)가 나라 안에 있어서 군신이 평안하고 백성이 화평하다.”

말이 끝나자 사라졌다. 자장은 대성이 변화하여 나타난 것을 알고 불교의 정수를 감응 받지 못한 것을 슬퍼하며 물러났다.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근처를 지나칠 때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물었다. “어찌 이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자장이 답하여 말하기를 “보리(菩提)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였다. 신인이 예를 갖춰 절하고 또 묻기를 “그대의 나라는 어떤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까?” 하니 자장이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靺鞨)을 연하고 남쪽으로 왜국을 접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여 이웃 나라의 침략이 종횡하니 이것이 백성의 걱정입니다.” 하였다. 신인이 말하기를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덕은 있으나 위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웃 나라가 침범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십시오.” 하였다. 자장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장차 무엇이 이익이 되겠습니까?” 물었다. 신인이 말하기를 “황룡사 호법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본국으로 귀국하여 절 안에 구층탑을 조성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영원히 평안할 것입니다. 탑을 건립한 후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들이 해를 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남쪽 해안에 정려(精廬) 하나를 세워 복을 빌어주면 나 역시 덕을 갚을 것입니다.” 하였다. 말이 끝나자 옥을 받들어 바치고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신인이 말한 이웃 나라는 다음과 같다.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 제7층은 거란,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穢貊)이다.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라 황제가 하사한 경전, 불상, 가사, 폐백을 가지고 귀국한 자장은 탑을 건립하는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서 기술자 파견을 청하였다. 건축 기술자 아비지(阿非知)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용춘은 후에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의 아버지이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는 날에 기술자 아비지는 본국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자 의심이 나서 일손을 멈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어두컴컴한 속에서 한 노승과 한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곧 그 기둥을 세운 다음 모두 사라졌다. 황룡사 구층탑 건립이 자신만이 아니라 천신이 돕고 있음을 인식한 아비지는 마음을 고쳐먹고 탑을 완성하였다.

찰주기에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이고 이하는 183척이라고 하였다. 탑의 높이 225척과 그 탑이 놓인 기단부를 생각할 때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본다면 80m 이상인 초대형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신라 사원건축 기술자의 도움

백제만큼은 아니지만 신라의 건축 기술 역시 꾸준히 발전하였다. 진흥왕 이후 경주에 황룡사를 비롯하여 많은 대찰이 세워진 것을 볼 때 사원건축 기술의 발전이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황룡사 구층탑과 같은 높은 건축물을 세울 때 백제의 아비지를 초청한 것을 보면 그와 같은 기술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백제 무왕 때 큰 사찰을 세울 때 진평왕(眞平王)이 많은 공인(工人)을 파견하여 도운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백제의 제30대 왕은 무왕(武王)으로 이름이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수도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어느 날 연못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어릴 때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서동(薯童)이라고 이름하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경주로 갔다. 먼저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주면서 친해졌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노래를 가르쳐 주면서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공주의 행실을 문제 삼은 백관들이 임금에게 강력하게 간하여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궁을 떠나려 하는데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도록 하였다.

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하면서 자신이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믿고 좋아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서동을 따라가면서 몰래 정을 통하였다.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의 영험을 믿었다.

서동을 따라 백제로 온 선화공주는 왕후가 준 금을 내어 장차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였다. 그러자 서동이 크게 웃고 말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오?” 공주가 말하기를, “이것은 황금입니다. 우리가 백 년의 부를 누릴 수 있는 보물입니다.” 하였다. 서동이 말하기를,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 두었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공주가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그대가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부모님이 계신 궁전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좋다고 말하였다.

금을 모아 언덕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 법사(知命 法師)에게 가서 금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통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오시오.” 하였다. 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냈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서동을 존경하게 되었고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이로부터 인심을 얻은 서동은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하였다. 왕은 그것을 허락하였다.

지명 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회(彌勒三會)의 모습을 본떠 전(殿)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라고 하였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이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 있다.

진평왕은 선덕여왕의 아버지이다. 진흥왕 이후 진지왕이 3년 만에 죽어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 관계로 볼 때 6세기에서 7세기 신라불교의 건축술 역시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미륵사 탑을 보수하기 위해 2009년 1월 탑을 해체하였을 때 심주(心柱) 상면(上面)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금제 사리호(金製舍利壺)’, ‘금제 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등이 발견되었다. ‘금제 사리봉안기’에는 백제 8대 귀족의 성씨 중 하나인 사씨(沙氏 또는 사택씨)의 딸이 황후가 되어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차이가 있어 선화공주가 미륵사지를 조성했다는 기록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대찰의 경우 10여 년이 넘게 걸린 것으로 볼 때 미륵사 창건 시작은 진평왕 때이므로 양국의 우호 증진을 위해 공인(工人)의 파견은 가능한 일이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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