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포교당을 처분해 선학원 설립 자금을 지원하고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오성월 스님. 선학원 설립조사 중 한 분이다.
범어사 포교당을 처분해 선학원 설립 자금을 지원하고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오성월 스님. 선학원 설립조사 중 한 분이다.

2.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과 조선불교선종 선포

1934년 12월 5일 선학원은 설립 이후부터 숙원이었던 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우선 선우공제회를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으로 개칭(改稱)하고 동시에 1935년 선종수좌대회를 통해 종명(宗名)을 ‘조선불교선종(朝鮮佛敎禪宗)’이라고 칭하고 종단 설립을 추진하였다.

우선 주목할 점은 종명이었다. 1929년 당시 불교계의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개최된 불교계의 통일운동은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朝鮮佛敎禪敎兩宗僧侶大會)였다. 사찰령 체제하에서 30본사 주지들의 회합체인 30본산주지회의원이 채택한 종명은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었다. 이 종명은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와타나베 노부(渡邊暢)가 조선시대 불교의 특성이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고 조선시대 조정의 안(案)에 따라 건의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 불교계에서도 그동안 종명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조계(曹溪)’ 혹은 ‘임제(臨濟)’를 따르지 않아 그 논란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선교양종’의 연원은 조선시대 불교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은 건국 이후 불교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불교 종파를 축소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말살시켰다. 태종대 11종에서 7종으로 축소시키고, 세종대에는 예조(禮曹)의 계청을 받아들여 7종을 다시 축소해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시킨 것이다.18) 때문에 선교 양종은 당시 불교계의 여론도 정체성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편의에 따라 붙인 이름이다. 이 비극의 역사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되풀이된 것이다. 결국 선학원이 정한 ‘조선불교선교양종’은 한국불교가 지닌 정통성은 물론이고 전통과 정체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일반적인 불교 종파에 불과했을 뿐이다.

당시 선종수좌대회에서 ‘선종’이라고 종명을 표방한 것은 구체적으로 선종의 어떤 종파를 내세우지 않았지만, 조선불교의 연원(淵源)이 선불교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선학원은 이미 1910년 10월 굴욕적인 조동종맹약(曹洞宗盟約)에 반대해 한국불교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진력했던 임제종운동(臨濟宗運動)을 전개한 역사적 경험이 있었다.

임제종운동은 1908년 3월 각 도 사찰대표 52인이 결성한 원종 종무원(圓宗 宗務院)의 대종정 이회광(李晦光)이 원종을 일본의 조동종과 연합시키고자 했던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이회광은 불교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일제의 정치권력에 이를 인정받기 위해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를 고문으로 추대하고 1910년 10월 6일 조동종과 7개 조항의 연합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이회광이 원종 종무원을 대표하여 전국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서 체결한 연합맹약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는 행위였다. 일본 조동종이 원종의 인가를 얻는 데 도움을 주고, 원종이 조동종의 포교사를 초빙하여 일본불교 포교와 청년 승려 교육을 촉탁한다는 맹약의 내용은19) 한국불교의 전통과 독자성을 무시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원종과 조동종 간의 연합 맹약이 불교계에 알려지자 많은 승려들이 연합에 반발했으며,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① 반대가 격렬히 일어났으니 실상은 다 같은 선종이지만, 조동은 그 계통이 다른 파이고 임제는 자가(自家)라고 하는 데서 생겨난 반감으로 인한 것이고, 종지(宗旨)의 역사가 분명하지 않아 당파(黨派) 사이에 암투가 이어서 일어났던 것이다. 박한영(朴漢永), 진진응(陳震應), 김종래(金鍾來) 등이 문자와 언설로서 제방(諸方)으로 하여금 격렬히 일어나게 하여 경술년 음력 10월 5일 광주 증심사(證心寺)에서 모임을 열기로 하였다. 그러나 개회 날짜가 되었지만 와서 모이는 이가 없어 대회를 시행할 수조차 없었다.20)

② 이 맹약이 실시되면 조선불교의 사원은 완전히 조동종의 손에 들어가고 마는 것인즉 그때의 조선불교는 실로 한 치도 용납하기 어려운 위기에 있었다.21)

임제종운동의 발단은 임제와 조동은 동일한 선종이지만, 그 계파는 엄연히 다르다는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박한영 역시 “조선 현재 불교의 연원이 임제종에서 발하였음은 즉,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할 수 없다는 취지로 반대하였다.”22) 결국 조동종과의 연합은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부속시킨다고 인식하여 조약의 반대를 분명히 하고, 한국불교의 연원을 임제종으로 천명하였다.

1911년 1월 영남과 호남의 승려들이 송광사(松廣寺)에서 회의를 갖고 임제종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설립하기로 결의하고, 선암사(仙巖寺)의 김경운(金擎雲) 스님을 종무원의 관장으로 선출하였지만, 노쇠하여 한용운이 그 권한을 대리하게 하였다. 이후 임제종은 임시 종무원을 범어사에 두기도 하였다. 아울러 1912년 ‘조선 임제종 중앙포교당(朝鮮 臨濟宗 中央布敎堂)’이 범어사 주축으로 추진되어 경성에 개교되는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임제종운동은 일제 총독부의 사찰령(寺刹令) 제정 공포로 지속되지 못하였다. 원종과 임제종은 사찰령에 의해 해산 명령을 받았고, 30본산제의 새로운 교단이 형성되었다.23) 이후 이회광은 조선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병합하고자 하였지만, 오성월(吳惺月)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임제종은 일제 당국에 의해 철폐되었지만, 해산하지 않고 범어사를 중심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결국 임제종운동은 사찰령과 총독부의 탄압 때문에 미완으로 끝났지만, 우리나라 불교의 연원이 임제종지(臨濟宗旨)를 계승하고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것은 민족적 자각이 매우 뚜렷한 형태로 작용하고 있던 호법운동(護法運動)이며, 항일운동이기도 하였다.24) 이와 같은 임제종운동의 정신은 1921년 선학원 설립을 계기로 부활하였다.

그것은 선학원의 설립 목적이 사찰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불조정맥(佛祖正脈)을 계승하고자 했던 만공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25) 예컨대 그의 말은 조선불교의 독자적 발전을 염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임제종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이 선학원 설립에도 역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표>는 임제종운동과 선학원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인물들이다. 당시 한용운도 역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의 호법운동과 항일운동에서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중대 문제를 그대로 둘 수 없어서 지금 47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 감옥에 들어가 있는 한용운과 나와 두 사람이 경상도,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통문(通文)을 내어 반대 운동을 하는데 물론 우리의 주의(主義)는 역사적 생명을 가진 우리 불교를 일본에 부속케 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리하는 것이었지만, 그때 형편으로는 도저히 그러한 사상을 발표할 수 없으므로 조선불교의 연원이 임제종에서 발하였은 즉 일본 조동종과 연합할 수 없다는 취지로 반대하였었오.26)

인용문은 임제종운동의 주역이었던 박한영(朴漢永)의 술회다. 예컨대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부속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부적절했기 때문에 단순히 종파가 다르므로 연합을 반대한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당시 한용운은 반조동종(反曹洞宗) 투쟁을 위해 전라도와 경상도의 각 사찰을 왕래하며 임제종운동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1911년 1월 15일 송광사에서 개최한 임제종 임시 종무원 총회에서 임시 종무원 관장 대리로 선출되었다.27) 이듬해인 1912년 경성에 ‘조선 임제종 중앙포교당’이 건립되었을 때는 백용성과 함께 개교식(開敎式)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용운은 선학원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1924년 선우공제회 정기총회 임시의장 및 수도부 이사(修道部 理事)로 활동하였다. 선학원이 침체기를 극복하고 1931년 재건되면서부터는 백용성, 송만공 등과 함께 선풍진작(禪風振作)과 대중화를 위해 일반 대중에게 다양한 법회를 거행하였다. 한용운은 이후 1922년부터 약 10여 년 동안 선학원을 기반으로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28)

한편 오성월(吳惺月)은 일제하 불교계의 호법운동과 항일운동의 중심인물이며, 근현대 시기 범어사의 사격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임제종 임시 종무원이 범어사로 옮긴 이후부터 적극 참여하여, 1912년 서울 사동(寺洞)에 조선 임제종 중앙포교당이 건립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때에는 사찰령이 이미 반포되어 30본사가 법으로 정해졌고, 30본사 주지가 차례로 승인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법(寺法)을 제정하는 일을 맞이하자 종지(宗旨)와 칭호(稱號)를 하나로 통일하는 일이 주지총회(5월 28일 원흥사에서 개최)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남당(南黨, 즉 임제종)은 범어사 주지 오성월을 중견으로 임제종지의 의견을 제출하였고, 북당(北黨, 즉 원종)은 이회광을 영수로 하여 종지의 기선을 따로 세우기로 내정하고 총독부의 뜻이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29)

오성월은 임제종운동 당시 이회광을 중심으로 한 30본사주지회가 일제의 사찰 정책을 수용하고자 했을 때 임제종의 종지를 한국불교의 종지로 채택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또한 이회광이 원종의 각황사(覺皇寺)와 임제종의 포교당을 합병하고자 하였을 때 오성월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하였다.30) 그는 1921년 선학원 창설 당시에는 송만공, 백용성, 김석두 등과 함께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으며, 이전의 범어사 포교당을 처분하여 선학원 설립 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후 오성월은 선학원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5년 선학원이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개편되면서 김남전(金南泉), 김적음(金寂音)과 함께 상무이사를, 조선불교수좌대회 때는 원장(院長) 소임을 거쳐 1941년에는 2대 이사장이 되었다. 오성월은 3·1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 사재(寺財)를 출연하여 헌납하기도 하였는데, 임시정부는 담해(湛海), 경산(擎山) 등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하기도 하였다.31)

[주] -----

18) 《세종실록》 제24권, 세종 6년 4월 5일조.

19) 이능화(1918), <梵魚一方臨濟宗旨>, 《朝鮮佛敎通史》 下, 민속원, 938쪽.

20) 이능화(1918), 앞의 책 하, 938~939쪽.

21) 한용운(1931), <불교청년총동맹에 대하여>, 《불교》 86호, 2~8쪽.

22) 정광호(2001), <불교계 항일운동의 유형과 투쟁>, 《일본침략기의 한일불교관계사》, 아름다운세상, 217쪽.

23) 강석주·박경훈 공저(2002), 《불교근세백년》, 민족사, 47쪽.

24) 정광호(2001), 앞의 책, 217쪽.

25) 당시 만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판국이라 지금 조선 중들은 자꾸만 일본 중처럼 변질이 돼 가고 있단 말입니다. 진실로 佛祖 正脈을 계승해 보려는 衲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런 말이죠. … 우리는 사찰령과는 관계가 없는, 순전히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을 하는 선방을 하나 따로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늘 회의를 부치게 된 거올시다.”(혜공 편, 만공어록》, 1968, 50쪽.)

26) <佛敎改宗問題(五)>, 《東亞日報》 1920. 6. 28.

27) 이능화(1918), <梵魚一方臨濟宗旨>, 《朝鮮佛敎通史》 下, 민속원, 939쪽. 3장 선학원의 재건 345.

28) 1920년대 한용운이 선학원에서 전개한 주요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법진(최종진)(<만해의 독립운동과 선학원-재산환수승소판결문을 중심으로>, 《선문화연구》 26,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19)의 논고를 참고하기 바란다.

29) 이능화(1918), 앞의 책, 939~940쪽.

30) <合倂이也自好>, 《매일신보》 1912. 6. 19〔김광식(1996), 《韓國近代佛敎史硏究》, 民族社, 82~83쪽에서 재인용.〕

31) 임혜봉(2001), <임제종의 자주화 운동과 법정사의 항일 무장 투쟁>,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민족사, 64쪽.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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