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노서동 여래입상. 남항사 터로 추정되는 터에 있다. 남항사는 신라의 학승 경흥 스님이 앓아누웠을 때 비구니로 화현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춰 낫게 했다는 십일면관음보살탱이 모셔져 있던 절이다. 보호각 안에 모셔진 석불 외에 절터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사진 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경주 노서동 여래입상. 남항사 터로 추정되는 터에 있다. 남항사는 신라의 학승 경흥 스님이 앓아누웠을 때 비구니로 화현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춰 낫게 했다는 십일면관음보살탱이 모셔져 있던 절이다. 보호각 안에 모셔진 석불 외에 절터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사진 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경흥을 깨우쳐 준 문수보살

신문왕 대의 대덕 경흥(憬興)은 성이 수 씨(水氏)이고 웅천주(熊川州) 사람이다. 나이 18세에 출가하여 경, 율, 논 삼장에 통달하여 명망이 높았다. 681년 문무왕이 승하하면서 신문왕에게 유언으로 “경흥 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짐의 명을 잊지 말아라.” 할 정도로 도력이 높았다. 그 말을 들은 신문왕은 즉위하자 경흥을 국사로 책봉하고 삼랑사(三郎寺)에 주석하게 하였다.

국사로 있던 경흥이 갑자기 병이 나서 한 달 넘게 고생하였다. 한 비구니가 와서 그를 문안하고 《화엄경》 가운데 착한 친구가 병을 고친 이야기를 전하면서, “지금 법사의 병은 근심이 이른 바이니 즐겁게 웃으면 나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열한 가지의 모습을 만들고 각각 광대와 같은 춤을 추니 뾰족하기도 하고 깎은 듯하기도 하여 변하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행동이 너무 우스워 턱이 빠질 것 같았다. 한바탕 웃고 나니 법사의 병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완쾌되었다. 행동을 마친 비구니는 문을 나가서 삼랑사 남쪽에 있는 남항사(南巷寺)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비구니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는 십일면원통상(十一面圓通像) 탱화 앞에 있었다. 십일면관음이 현현하여 국사의 병을 낫게 한 것이다.

경흥이 왕궁에 들어가려 하여 시종이 먼저 동문 밖에서 채비하였다. 안장과 말이 매우 화려하여 행인들이 그것을 피하였다. 그런데 행색이 남루하고 손에 지팡이를 짚고 등에 광주리를 이고 있는 한 스님이 하마대(下馬臺) 위에서 쉬고 있었다. 광주리 안을 보니 마른 생선이 있었다. 시종이 그를 꾸짖어 “당신은 스님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 어찌 더러운 물건을 지고 있는 것이냐?” 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살아 있는 고기를 양 넓적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과 거리에서 마른 생선을 등에 지는 것 가운데 무엇이 나쁘냐?”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일어나 가버렸다. 경흥이 문으로 나오다가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를 쫓아가게 하였다. 남산 문수사(文殊寺) 문밖에 이르자 광주리를 버리고 사라졌다. 지팡이는 문수보살상 앞에 놓여 있었고 광주리 안에 마른 생선은 없고 소나무 껍질만 있었다. 사자가 와서 고하니, 경흥은 그것을 듣고 한탄하여 “대성(大聖)이 와서 내가 짐승을 타는 것을 경계하였구나.” 하면서 그 이후 죽을 때까지 다시 말을 타지 않았다.

경주 노서동 석불입상. 남항사 터로 추정되는 터에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사진 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경주 노서동 석불입상. 남항사 터로 추정되는 터에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사진 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문수의 가르침을 받은 연회(緣會) 대사

고승 연회는 일찍이 영축산(靈鷲山)에 살면서 언제나 《법화경》을 읽고 보현행(普賢行)을 닦았다. 뜰의 연못에는 항상 연꽃 몇 떨기가 있어 사철 시들지 않았다. 원성왕(元聖王)이 상서로운 이적을 듣고 그를 불러 국사로 삼고자 하였다. 스님이 이 소식을 듣고는 암자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서쪽 고개 바위 사이를 넘어갈 때 한 노인이 밭을 갈다가 묻기를, “스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듣자니 나라에서 잘못 듣고 나를 관직으로 얽어매려고 하므로 피해서 갑니다.” 하였다. 노인이 듣고서 말하기를, “여기서도 팔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해서 수고로이 멀리서 팔려고 합니까? 스님이야말로 이름 파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하였다. 연회는 그가 자기를 업신여긴다고 생각하고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몇 리를 더 가다가 시냇가에서 만난 노파가 묻기를, “스님은 어디 가십니까?” 하였다. 연회는 처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노파가 말하기를, “앞에서 사람을 만났습니까?” 하였다. 연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노인이 나를 업신여기는 것 같아 불쾌한 기분으로 오는 중입니다.” 하였다. 노파가 말하기를, “그분은 문수대성(文殊大聖)인데, 그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연회는 놀랍고 송구스러워 급히 노인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기를, “성자(聖者)의 말씀을 감히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다시 돌아왔습니다. 시냇가의 그 노파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였다. 노인이 말하기를 “그녀는 변재천녀(辯才天女)입니다.” 하고 숨어버렸다.

암자로 돌아가니 조금 뒤에 왕의 사자가 조서를 받들고 와서 그를 불렀다. 연회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임을 알고 이에 응하여 대궐로 가 국사가 되었다. 스님이 노인에게 감응 받은 곳을 문수 고개〔文殊岾〕라고 하고, 여인을 만난 곳을 아니 고개〔阿尼岾〕라고 하였다.

보현의 정계를 받은 지통(智通)과 낭지(朗智)의 도력

삽량주(歃良州) 아곡현(阿曲縣) 영축산(靈鷲山)에 있는 암자에 신이한 스님이 살았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스님도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법화경》을 읽어 신통력이 있었다.

문무왕 초 사미 지통은 이량공(伊亮公)의 노비였는데 17세에 출가하였다. 이때 까마귀가 와서 울며 이르기를 “영축산에 가서 낭지에게 의탁하여 제자가 되어라.” 하였다. 지통이 그것을 듣고 그 산을 찾아가는 도중 골짜기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문득 이상한 사람이 와서 말하길 “나는 보현보살이다.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이곳에 왔다.” 하였다. 보살이 계를 베푼 후 사라지자 지통은 지혜가 원만해지고 깨우침을 얻는 것 같았다.

다시 길을 가던 지통이 한 스님에게 낭지 스님이 어디에 사는지를 물었다. 스님이 “어찌 낭지를 묻느냐?” 하였다. 지통이 까마귀의 일을 자세히 전하였다.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길 “내가 그 낭지이다. 앞서 까마귀가 나한테 와서 성스러운 아이가 있어 스님에게 의탁하려고 올 것이니, 마땅히 마중 나가 그를 맞이하라 하였다.” 이에 손을 잡고 감탄하여 말하길 “신령스런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나에게 의탁하게 하였고, 나에게 알려 너를 맞이하게 하였다. 이것은 어떤 상서로움인가? 마땅히 산신령이 몰래 도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산의 주인은 변재천녀(辨才天女)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지통은 울며 낭지에게 예배하였다. 이윽고 계를 주려고 하자 지통이 말하길 “저는 마을 입구의 나무 아래에서, 이미 보현보살에게 정계(正戒)를 받았습니다.” 하였다. 낭지가 감탄하여 말하길 “좋구나! 너는 이미 친히 보현보살의 만분지계(滿分之戒)를 받았구나. 나는 지금까지 성인을 만나길 염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너는 이미 받았으나 나는 너에게 미치지 못하는구나.” 하면서 지통에게 예를 올렸다. 이로 인해 그 나무를 보현수(普賢樹)라 하였다. 후에 지통은 의상(義湘)의 처소에 가서 공부하였고, 《추동기(錐洞記)》를 썼다.

낭지가 지통에게 예를 올렸지만 그것은 보현보살의 감응에 대한 예이다. 그는 당대의 고승이었다. 원효가 반고사(磻高寺)에 머무를 때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항상 낭지에게 물었다. 원효가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한 후 은사(隱士) 문선(文善)을 시켜 글을 낭지에게 보내면서 책 뒤에 게송을 지었다. “서쪽 골짜기의 사미(沙彌)는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하고, 동악(東岳)의 은덕(上德)은 높은 바위 앞에 작은 티끌 불어 영축산에 보태고, 작은 물방울 날려서 용이 사는 연못에 던집니다.” 하였다.

지통과 원효 모두 큰 성인이다. 그런 두 성인이 공손하게 스승으로 섬겼던 낭지였으므로 그의 도가 어느 정도 높은지를 알 수 있다.

낭지는 신통력도 뛰어났다. 그가 머물던 영축산 동쪽에 태화강(太和江)이 있는데, 중국의 태화지(太和池)의 용을 위해 창건한 까닭에 용연(龍淵)이라 하였다. 그런 연유로 낭지는 구름을 타고 중국의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그곳 대중과 함께 강의를 들으며 머물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그곳에 있는 스님들은 낭지를 이웃에 사는 사람으로 여겼으나 거주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그곳의 고승이 대중에게 말하길 “항상 여기 있는 이를 제외하고 별원(別院)에서 온 스님은 각기 사는 곳의 이름 있는 꽃과 특이한 식물을 가져와서 도량에 바쳐라.” 하였다. 다음 날 낭지는 산속에 있는 이상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서 바쳤다. 청량산 고승이 그것을 보고 말하길 “이 나무는 범어로 달제가(怛提伽)라 부르는데 오직 서쪽의 천축(天竺)과 해동(海東)의 두 영축산에만 있다. 이 두 산은 모두 제10 법운지(法雲地) 보살이 사는 곳이므로 그는 반드시 성스러운 사람일 것이다.” 말을 마치고 그의 행색을 살펴 해동 영축산에 사는 것을 알았다. 이로 인해 그의 이름이 안팎으로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그가 지내던 암자를 ‘혁목(赫木)이라 불렀다. 지금 혁목사(赫木寺) 북쪽 언덕에 있는 터가 암자의 유적이다. <영축사기(靈鷲寺記)>에 전해지는 내용을 보면 낭지는 자신이 지내던 암자의 터는 가섭불(迦葉佛) 때의 절터라고 하였다. 그리고 땅을 파서 등잔 2개를 얻었다. 원성왕(元聖王) 대에 대덕 연회(緣會)가 와서 살면서 스님의 전(傳)을 지어 세상에 내보냈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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