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수좌대회(1931년).
제1회 수좌대회(1931년).

1)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창립

불기 2949년(1922) 3월에 쇠멸되는 선원을 부흥시키기 위해 송만공(宋滿空), 김남전(金南泉), 백용성(白龍城), 오성월(吳惺月), 강도봉(康道峰), 한용운(韓龍雲) 등 여러 스님의 발기로 선우공제회를 창립하였다. 불기 2950년(1923)에 공제회를 사단법인(社團法人)으로 운동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이후 4~5년간은 미약하고 부진한 상태로 근근이 가람(伽藍)만 보전하고 유지하였다.

2) 수좌대회의 좌절

불기 2955년(1928) 12월 23일에 적음 스님이 선학원을 인계받아 선계 중흥(禪界中興)을 기도하고자 다음 해 1월 10일에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를 개최하려다가 좌절되었다.

3) 중앙교무원(中央敎務院)에 건의

불기 2956년(1929) 2월 중앙교무원에 선학경영(禪學經營)을 확장하려는 의안(議案)을 제출하였지만 인용(認容)되지 못하다.12)

적음 스님이 선종수좌대회에서 선학원 설립부터 재단법인 인가까지의 경과를 보고한 내용이다. 선불교의 독립과 수행 여건의 향상을 위한 자립을 위해 선학원은 설립 이듬해부터 선우공제회(善友共濟會)를 조직하여 구체적인 행보에 들어갔다. 1922년 3월 30일부터 4월 1일에 걸쳐 선우공제회 창립을 위한 총회를 개최한 것이다. 황용음(黃龍吟), 백학명(白鶴鳴), 오성월(吳惺月) 등 35명의 승려들은 선우공제회의 취지서(趣旨書)를 발표하였다.

성인이 가신 지 아득히 오래되어 불법(佛法) 침체되어 교도(敎徒)가 새벽별과 같아 수행자는 실로 기린의 뿔과 같아 여래(如來)의 혜명(慧命)이 실낱과 같아 보존하기 어렵도다. 많고 적은 수행자가 있다 할지라도 진정한 발심납자(發心衲子)가 적을 뿐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서로 번다하여 선려(禪侶)를 가벼이 여기는 까닭으로 청정 비구승들이 도처에서 끊임없이 궁색해져 일의일발(一衣一鉢)의 구름과 물과 같은 생애를 지속하기 어려움은 실로 오늘의 현상이다.13)

취지서의 앞부분이다. 1895년 스님들의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고 난 이후 30여 년이 지난 한국 불교계의 암울한 상황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불교도는 많지만, 여래(如來)의 혜명(慧命)을 온전히 보존하기는 어렵고, 수행자는 많지만 위법망구(爲法亡軀)의 정신을 지닌 진정한 납자는 적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사찰령(寺刹令)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주지들은 수좌들을 천대하여 청정 비구승의 수행은 날로 곤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를 책망하여 열렬히 반성할지어다. 원래 타인에게 삶을 의지함은 자립자활(自立自活)의 도(道)가 아닌즉 수행자의 전 생명을 사람에게 의지하여 다른 사람에게 속박을 당함은 대도활명(大道活命)의 본뜻에 반(反)할지라. 우리 선려(禪侶)는 경계하고 힘써 깨어나 명(命)을 다하여 도를 닦고 따라서 자립(自立)의 활로(活路)를 개척하야 선계(禪界)를 발흥할 대도(大道)를 천명하야 중생을 고해(苦海)에서 구하고 미혹 하에 빠진 인륜을 피안(彼岸)으로 건너게 할지니 만천하의 선려는 자립자애(自立慈愛) 할지어다.14)

당시 청정 비구승들이 먹고 자는 것을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자립자활의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태를 원망하기보다는 자립의 활로를 개척해서 대도(大道)를 천명해야 중생을 이 고통에서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과제였다. 그러니 납자는 더욱 자립자애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창립 당시 발기인은 백용성, 한용운, 오성월, 백학명 등 81명이었다. 당시 <선우공제회창립총회록>에 의하면 조직은 선우공제회본부를 선학원에 두고 행정과 수행을 관리하기 위해 서무부(庶務部), 재무부(財務部), 수도부(修道部)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지방에는 범어사, 건봉사, 신계사 등 19개 지부(支部)를 두었다.

선우공제회 유지 방침의 원칙 역시 정해졌는데, 공제회의 경비는 선우(禪友)의 의연금 및 희사금으로 충당하고, 각 지부의 선량(禪糧) 중 2할과 매년 예산액 중 잉여금을 저축하여 공제회 기본 재산으로 설정하여 각 선원을 진흥하기로 결정하였다. 선량(禪糧)은 해당 선원의 토지 소작료가 주된 수입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1923년 3월 29일 제2회 정기총회에서는 그 조직을 더욱 안정시키기 위해 대대로 전해오는 선원 토지에 대해서는 선원으로 이전하거나, 여의치 못하면 그 토지의 전체 수입을 해당 선원에서 처리하도록 결정하였다. 아울러 최초 유지 방침의 원칙 역시 수정하여 선우공제회 유지는 재래의 선원 토지와 신입 토지의 수입 2/10와 기타 희사금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하였다. 선우들의 지원금을 통한 유지에서 선원의 토지 수입과 각종 희사금으로 변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1924년에는 일부 승려들이 부동산을 헌납하여 점차 재정 기반이 구축되었고, 선우공제회에 가입된 납자의 수가 365명에 달했다15)고 한다. 이들 토지는 법답(法畓)으로 대부분의 선승(禪僧)들이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저축한 돈으로 전답을 사두었다가 제자에게 물려주는 토지로 사찰 소유의 토지와는 구분이 되었다.

급기야 선학원은 1923년 선우공제회를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 법적 보호를 받고자 하였지만, 조선 총독부의 무성의로 좌절되고 말았다. 사실 1925년 11월 15일 개최했던 제3회 정기총회회록을 보면 이때 선학원은 사단법인 선우공제회 정관을 만들어 동년 9월 6일 ‘사단법인 선우공제회 설립허가원’을 제출한 상태였다. 창립 초기의 적극적인 참여와 재정이 안정되면서 법인등기를 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12월 20일 법인 정관의 일부분 수정을 이유로 반려하여 공제회에서는 동월 25일 다시 수정하여 접수시켰다. 이때 신청한 법인인가가 거의 10여 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은 당시 조선 총독부나 그 비호를 받고 있었던 불교계의 행정부에서 선학원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선학원은 이후 약 7년의 세월 동안 사무소를 직지사나 범어사로 옮기면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1934년 12월 5일 재단법인 인가는 선학원의 숙원이면서 선우공제회의 부활이었다.

한편 수좌대회 역시 선불교의 중흥을 목적으로 수좌들을 결집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었다. 1931년 적음 스님은 선학원을 인수한 이후 그 중흥을 위해 당시 교무원(敎務院) 종회(宗會)에 선학원 확장을 정리한 건의안을 작성하고, 중앙선원(中央禪院)의 설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것은 1931년 3월 23일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를 개최하여 수좌들의 의견을 결집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수좌대회에서 지속적으로 건의한 것은 중앙교무원에 청정 비구승의 수행을 위한 도량 마련이었다.16) “현금(現今) 조선의 승려는 처대식육(妻帶食肉)을 감행하여 청정사원을 오염시키고 더럽히는 마굴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니 승체(僧體)를 바로 보면 실로 통탄할 뿐입니다.”라고17) 한 지적만으로도 당시의 대처풍조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주지전횡제도와 대처승 유행의 풍조가 일반화되었던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감안하면 청정 비구승의 이와 같은 요구는 당연한 것이었다.

요컨대 1935년 3월 7일과 8일에 개최된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는 선종의 근본적 독립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고, 수좌들의 수행과 그 환경을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재단법인 인가와 독신 비구승 수행도량 마련은 그 구체적인 행보였다. 그러므로 선종수좌대회의 개최 배경은 1921년 선학원 설립과 선우공제회 결성, 그리고 침체기를 극복한 1931년 적음 스님의 중흥부터 개최된 수좌대회의 연장선이었다. 아울러 청정 비구승의 수행 여건 마련과 향상을 위한 법인 인가의 목적을 넘어 조선불교선종 선포의 배경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선학원의 노력은 해방 이후 친일 불교의 잔재 청산을 위해 전개한 청정 비구승들의 불교정화운동까지도 이어졌다.

[주] -----

12) 禪宗中央宗務院(1935), 앞의 자료, 11쪽.

13) 禪學院(1922), <善友共濟會趣旨書>, 경성: 선학원.

14) 禪學院(1922), <善友共濟會趣旨書>, 경성: 선학원.

15) 禪學院(1922b), <선우공제회회의록>, 경성: 선학원.

16) 청정 비구승 수행을 위한 도량 요청은 불교정화운동에서도 나타난다. 예컨대 1952년 봄 선학원 수좌였던 대의 스님은 당시 조선불교 교정(종정)인 만암 스님에게 건의서를 보내 비구 수행승에게 수행도량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총무원은 1953년 4월 동화사, 직지사, 보문사, 신륵사, 월정사 등 18개 사찰을 비구승 수행도량으로 할애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달 선학원 조실 금오 스님 등 선학원 대표들이 주지 회의가 열린 조계사를 방문해 비구승 수행도량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지만,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비구승들은 선학원에 모여 교단 정비와 사찰 정화, 대처승 축출 등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17) 白龍城(1926), <僧侶肉喰妻帶問題に關する嘆願書>, 《朝鮮佛敎》 第27號, 33쪽.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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