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전(傳) 염불사지. 항상 아미타불을 염송해 그 소리가 성안까지 들렸다는 염불 스님이 이 곳에 주석했다. 사진 이창윤.
경주 남산 전(傳) 염불사지. 항상 아미타불을 염송해 그 소리가 성안까지 들렸다는 염불 스님이 이 곳에 주석했다. 사진 이창윤.

통일 무렵의 신라 정토 신앙

신라시대 정토 신앙은 위로는 귀족층에서 아래로는 서민과 노비층까지 널리 성행했다. 정토 신앙의 근간이 되는 경전은 《무량수경(無量壽經)》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이다. 이를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 한다.

원효의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와 현일의 《무량수경기(無量壽經記)》 그리고 경흥의 《무량수경연의술문찬(無量壽經連義述文賛)》 등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 무렵 본격적으로 신행된 것을 알 수 있다.

통일 무렵 알 수 있는 정토 신앙 사례는 광덕과 엄장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문무왕 대의 수행자였다. 광덕은 처자와 함께 분황사 서쪽 마을에 은거하며 짚신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불태워 힘써 경작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격려하고 수행하면서 “먼저 극락으로 가는 사람은 모름지기 알려야 한다.” 약속하였다.

하루는 해 그림자가 붉은빛을 띠고 솔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는데 창밖에서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자네는 잘 살다가 빨리 나를 따라오라.”라는 소리가 났다.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와 그것을 살펴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으로 이어져 있었다. 다음날 광덕의 집을 찾아가니 그는 죽어 있었다. 그의 부인과 함께 시신을 거두고 무덤을 만들었다.

일을 마치자 곧 부인에게 말하기를, “남편이 죽었으니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부인이 좋다고 동의하여 함께 지내게 되었다. 밤에 장차 잘 때 통정하고자 하니 부인이 부끄러워하면서 말하였다. “법사가 정토를 구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엄장이 놀라고 이상하여 물어 말하였다. “광덕은 이미 하였는데 나 또한 어찌 꺼리겠는가.” 부인은 말하였다. “남편과 나는 10여 년을 함께 살았어도 하룻밤도 같은 침상에서 자지 않았는데 하물며 부정하게 닿아서 더럽혔겠습니까. 그는 매일 밤 단정한 몸으로 바르게 앉아 한 소리로 아미타불만 염불하였고, 혹은 16관에 들어 밝은 달이 문으로 들어오면 그때 달빛 위에 올라 가부좌를 하였습니다. 정성을 다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비록 서방으로 가지 않고자 하더라도 어디로 가겠습니까. 무릇 천 리를 가는 자는 한 걸음으로 가히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법사의 행동은 서방 왕생이 아니라 동쪽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쪽은 곧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광덕이 수행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서원하였다.

“달이시여, 이제 서방정토까지 가서 무량수불 앞에 알리어 주옵소서. 다짐 깊은 부처님께 우러러 두 손 모아서 왕생을 원합니다, 그렇게 왕생을 바라고 염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옵소서. 아아, 이 몸을 버려두고 48가지 큰 소원을 이루실까 저어합니다.”

부인 말을 듣고 엄장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물러 나왔다. 곧바로 원효 법사(元曉 法師)가 거처하는 곳으로 나아가 도를 이루는 핵심을 간절히 구하였다. 원효는 삽관법(鍤觀法)을 만들어 그를 가르쳤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쳤고 한뜻으로 관을 닦아 서방정토에 오를 수 있었다.

광덕의 부인은 분황사의 종이었으나 본래 십구응신(十九應身)의 하나였다. 관음보살은 세상을 교화하려고 나올 때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33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십구응신은 거사부녀신(居土婦女身)으로 거사나 부녀자의 모습으로 현실 세계에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통일신라 경덕왕 대의 정토 신앙

경덕왕 때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성덕대왕 신종 등이 조성되었다. 한국불교에 있어 가장 뛰어난 불교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무렵 정토신앙 역시 수행자를 넘어 노비가 현재의 몸으로 서방 왕생할 만큼 발전되었다.

경덕왕 때 진주에 사는 선사(善士) 수십 명이 서방을 구하려는 뜻으로 마을 안에 미타사(彌陁寺)를 세우고 만일을 기약하는 계(契)를 조직하였다. 그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욱면(郁面)이라는 여종이 있었다.

욱면이 노비로 태어난 연유를 보면 1000명이 되는 무리가 두 패로 나누어 한패는 일을 하고, 한패는 정성껏 수행하였다. 노력하는 무리 중에 일을 맡아보던 이가 계(戒)를 얻지 못하여 축생도(畜生道)에 떨어져 부석사(浮石寺)의 소로 환생하였다. 그 소가 일찍이 경전을 싣고 간 인연으로 아간 귀진의 집 여종으로 태어났고 이름을 욱면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마당에 서서 스님을 따라 염불하였다. 주인은 그녀가 자신의 직분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이 미워 하루에 곡식 두 섬씩을 주며 모두 찧게 하였다. 여종은 초저녁에 다 찧고는 절에 가서 염불하기를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욱면은 마당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매어 놓고 합장하여 좌우로 움직이면서 스스로 격려하였다. 그때 하늘에서 “욱면 낭자는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라는 외침이 있었다. 절에서 염불하던 대중들은 이 소리를 듣고 욱면에게 법당에 들어가 예에 따라 정진하도록 권하였다. 얼마 안 되어 하늘의 음악이 서쪽으로부터 들려오더니 여종이 솟구쳐 집 대들보를 뚫고 나갔다. 서쪽으로 날아가 교외에 이르러 형체를 버리고 진신(眞身)으로 변하더니 나타난 연화대(蓮臺)에 앉았다. 그리고 큰 광명을 발하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 후에도 하늘에서는 음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소백산(小伯山)에 이르러 신 한 짝을 떨어뜨렸다. 사람들이 그곳에 보리사(菩提寺)를 지었다. 산 아래에 이르러 그 육신을 버렸으므로 곧 그 자리에 제2 보리사(菩提寺)를 지었다. 그리고 불전에 욱면등천지전(勖面登天之殿)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지붕 용마루에 뚫린 구멍은 열 아름가량 되었으나 비록 폭우와 폭설이 와도 젖지 않았다. 나중에 어떤 호사자(好事者)가 금탑(金塔) 한 좌를 본떠 만들어 그 구멍에 맞추어 천장 위에 안치하고 그 이적을 기록하였다. 《삼국유사》가 저술될 무렵까지 그 현판과 탑이 남아 있었다.

욱면이 떠나간 후 귀진 역시 자신의 집을 이인(異人)이 의탁해서 태어난 곳이라고 하여 희사하여 절을 만들어 법왕사(法王寺)라고 하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바쳤다. 절은 오랜 뒤에 폐허가 되었는데, 대사 회경(懷鏡)이 왕명을 출납하는 승선(承宣) 유석(劉碩), 소경(小卿) 이원장(李元長)과 함께 발원하여 중창하였다.

회경이 몸소 토목 일을 했는데, 처음 재목을 운반할 때 꿈에 어떤 노인이 삼신과 칡신을 각 한 켤레씩 주었다. 또 옛 신사(神社)에 가서 불교의 이치로 가르치고, 그 신사 옆에 있는 나무를 베어 내어 무릇 5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또 노비들을 더 두어 융성해져 동남지방의 유명한 절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회경을 귀진의 후신이라고 하였다.

포천산 오비구(布川山 五比丘)

경덕왕 때 삽랑주(歃良州; 지금의 경남 양산) 동북쪽 20여 리 떨어진 곳에 포천산(布川山)이 있다. 이 산은 신라시대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에 있는 원효산(元曉山)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석굴이 있어 기이하고 빼어나 사람이 깎은 듯하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섯 비구가 이곳에 와서 살면서 아미타불을 염송하였다. 서방정토를 구한 지 10년 만에 극락세계 있는 서쪽으로부터 많은 보살이 와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다섯 비구가 각기 연화대좌(蓮臺)에 앉아 허공을 타고 가서 통도사(通度寺) 문밖에 머무르자 하늘에서 음악이 연주되었다. 절의 스님이 나와서 보니 다섯 비구가 무상(無常)하고 고통스럽고 공허한 이치를 설하였다. 그런 뒤에 허물을 벗고 뼈만 남긴 후 큰 광명을 내놓으며 서쪽으로 향하여 가버렸다. 그곳에 절의 스님들이 정자를 세우고 치루(置樓)라 이름하였다.

통일신라 정토신앙의 절정

경주 남산(南山) 동쪽 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었다. 마을에 절이 있는데 지명으로 인하여 이름을 피리사(避里寺)라 하였다. 그 절에는 이름을 말하지 않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특이한 스님이 주석하였다. 항상 아미타불을 염송하였고 그 소리가 성안에까지 들렸다. 360방(坊) 17만 호(戶)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소리의 높고 낮음이 없어 낭랑하게 한결같았다. 항상 염불 수행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고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염불(念佛) 스님이라 이름하였다. 죽은 후에 흙 인형으로 진영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안치하고, 그 본래 살던 피리사는 이름을 고쳐서 염불사(念佛寺)라 하였다. 절 옆에 다른 절이 있었다.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하였는데 이 역시 마을로 인하여 생긴 이름이었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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