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회록》(1935년).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회록》(1935년).

선학원의 중흥조 적음(寂音) 스님은 1935년 3월 7일과 8일 이틀 동안 개최된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朝鮮佛敎禪宗首座大會)에서 양로선원(養老禪院)과 부인선원(婦人禪院) 설치를 건의하고 대중들은 가결하였다. 그것은 한국 근대 불교사에서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 의미는 적지 않았다.

한국 근대와 현대 불교사에서 선학원은 일제 강점기에는 근대 불교와 개혁의 물결 속에서 한국 불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고, 해방 이후에는 일본 불교의 잔재 청산과 현대 한국 선불교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때문에 선학원의 역사는 시세의 물결을 거슬렀고, 저항과 질곡의 연속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따라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 존립이 위협받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 강점기 불교사에서 일정한 가치를 지닌 선학원에 대한 역사적 의미는 그동안 소홀히 다루어져 대중의 관심이 적고, 학계의 관련 전문가의 부족으로 활발하지도 체계화되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1972년 정광호가 <대한불교>에 ‘한국전통 선맥의 계승 운동- 선학원을 중심으로’을 10회 연재한 이후1) 그 역사적 전개와2) 설립이념3), 그리고 한용운의 독립운동4) 등을 살펴본 것이 그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한국불교선리연구원장 법진(최종진) 스님이 2019년 발표한 <만해의 독립운동과 선학원 - 재산 환수 승소판결문>은 선학원의 설립 이념과 목적이 독립지사인 만해 한용운을 구심점으로 하고 있음을 선명히 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법진은 1920년대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 만해의 독립운동과 저항을 규명하고 있어 이제까지의 선학원에 대한 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장해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5) 그렇지만 선학원 연구는 수적 질적 측면에서 아직도 많은 연구 과제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그 연구가 1920년대 일제 강점기 선학원의 설립과 운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뿐, 1930년대 이후 선학원 사정에 대해서는 활발하게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근대 불교사에서 선학원 연구는 1931년 적음 스님의 중흥부터 1934년 재단법인(財團法人) 인가, 1935년의 조선불교선종(朝鮮佛敎禪宗) 창종과 1941년 유교법회(遺敎法會) 등의 1930년대와 40년대의 기간의 동향에 대해서는 규명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선학원의 수좌 보호와 수행 여건 마련을 비롯한 체제 정비와 설립 이념의 실천 등 세부적인 검토를 남겨두고 있다. 이것은 학문적 측면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 불교의 본질과 그 실제적 성격을 규명하는 중요한 의미 역시 지니고 있다. 결론적으로 선학원의 역사 정립은 한국 현대 불교사의 객관적인 이해와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1.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 개최의 배경

선학원은 재단법인 인가와 ‘조선불교선종’을 표방하면서 1921년 설립 당시부터 수립했던 목적을 달성하였다.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었던 청정 비구의 수행과 그 환경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선학원의 설립 조사와 수좌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1935년 3월 7일과 8일 이틀 동안 개최했던 수좌대회의 사정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회록》6)은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7)의 개최 배경뿐만 아니라 선학원의 실제적인 운영과 목적까지도 살필 수 있다.

당시 선학원의 ‘조선불교선종’ 선포는 그 명분과 현실적 목적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보였다.8) 《수좌대회회록》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선학원의 《선원(禪苑)》지를 비롯한 일제 강점기 불교계 안팎의 언론을 통해 1934년과 35년, 그리고 그 이후 선학원의 사정이 피상적으로 드러났고, 《선종수좌대회회록》이 공개된 뒤에도 불교사학계에서는 그 개요만을 소개하거나 왜곡의 산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선종수좌대회’가 지닌 가치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선학원은 1934년 12월 5일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9)을 인가받고, 1935년 3월 7~8일 수좌대회를 통해 조선불교선종을 창립하였다. 선학원의 재단법인 인가와 선종 창립은 사실 1921년 설립 당시 내세웠던 설립 이념과 운영 목적을 10여 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이룩한 것이다.

불기(佛紀) 2961년(1934) 12월 23일 오전 10시에 제5회 이사회(理事會)를 법인사무소 내에서 개최하고 법인정관 시행 세칙 기초위원과 수좌대회 준비위원을 겸임으로 추천하여 법인 시행 세칙을 기초(起草)케 하는 동시에 선종 부흥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는 것을 본보기로 수좌대회를 개최하고 선종의 근본적 독립 발전과 종규(宗規)와 기타 제반 규제를 기획하고 제정케 하자고 긴급 결의하여 추천하다.10)

인용문은 선종수좌대회를 개최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선학원은 1934년 12월 5일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재단법인 인가를 받고, 동월 23일, 재단법인의 제5회 이사회가 법인정관 시행세칙과 수좌대회를 준비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들은 법인 시행세칙을 기초하는 동시에 “선종 부흥의 기운이 왕성해지는 것을 본받아 수좌대회를 열고, 선종의 근본적 독립 발전을 도모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른바 ‘선종의 근본적 독립 발전’은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이 인가를 받고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했던 목적이었다. 보다 구체적인 사정은 선서문에서 찾을 수 있다.

세존(世尊)이시여 삿된 마구니는 나날이 치성(熾盛)하며 정법(正法)은 날로 무너져 사라져가는 이 말세(末世)를 당하여 제자 등이 어찌 비분(悲憤)의 피눈물을 뿌리지 않으며 어찌 용맹의 근본 뜻을 반성하지 아니하오리까. 오직 원하옵나이다. 대자대비의 삼보(三寶)께옵서는 자비의 거울을 비추시어 제자들의 미미한 정성을 살피시옵소서 세존의 드넓은 원력을 본본기로 삼아 머리를 들고 발원하오니 성스러움의 가피를 내리시어 염화(拈花)와 미소(微笑)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천하 총림(天下叢林)에 다시 떨치게 하시오며 여래(如來)의 지혜로운 광명이 사해선천(四海禪天)에 거듭 빛나게 하시옵소서. 세존이시여 사자는 뭇 짐승의 왕입니다. 그를 당해낼 만한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나 제 털 속에서 생긴 벌레가 비록 적으나 사자의 온몸을 다 먹어도 제 어찌 하지 못하나이다. 천하무적의 큰 힘도 쓸모가 없나이다. 그와 같이 이제 여래의 정법(正法)이 그 목숨이 실끝 같은 지금의 위기를 당한 것도 그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엎드려 비나이다. 정법을 사자라면 제자 등이 벌레가 아니리까. 이제 천하의 정법이 오늘의 위기에 빠진 것이 오로지 제자 등이 여래의 법도를 봉행치 아니한 불초(不肖)의 죄상이 아니고 무엇이오리까. 그 불초의 죄상은 뼈를 부수고 골수를 내어 바쳐 올려도 오히려 다하지 못할 줄 깊이 느껴 이제 참회대회(懺悔大會)를 개최하고 제자들이 이미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오며 뒷날의 과오를 다시 짓지 않고자 깊이 맹세하오며 발원하오니 이로 붙어 서원을 등지며 삼보를 기만하여 위로 네 가지 큰 은혜를 저버리며 아래로 삼도(三途)의 극한 고통을 더하는 자가 있거든 금강철퇴로 이 몸을 부수어 가루가 될지라도 감히 어찌 원망을 품겠습니까. 차라리 신명(身命)을 버리더라도 마침내 정법에서 물러서지 않겠사오니 오직 원하옵나이다.11)

선언문은 선종수좌대회에 참석했던 기석호(奇昔湖)가 수좌들을 대표하여 세존께 선서한 내용이다. 우선 수좌들은 “사악한 마귀가 나날이 치성하고 정법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무너져 소멸하니 이러한 말세를 당해 제자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용맹하지 못함을 반성한다.”고 하였다.

불교는 조선왕조 동안 탄압과 소외를 받은 것도 모자라 일제의 침략과 함께 사찰령과 주지 전횡 제도로 인해 불교 전통을 회복할 기회조차도 없었다. 더욱이 일본 불교 침투와 대처승과 같은 왜색불교의 점령으로 정법이 소멸하고, 청정 비구의 수행이나 노후가 어떠한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소외되고, 급기야 그 명맥조차도 소멸될 위기에 놓여있었다. 선학원의 설립 조사와 수좌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허물로 보고 세존께 참회를 통해 고백한 것이다. 이것이 선종수좌대회가 개최된 궁극적인 명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주] -----

1) 정광호(1994), 《近代韓日佛敎關係史硏究 -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관련하여》, 인하대학교출판부. 재수록.

2) 김광식(1996), 《韓國近代佛敎史硏究》, 民族社. ; 김순석(2003),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 경인문화사, 2003 ; 김경집(2005), <근대 선학원 운동의 불교사적 의의>, 《선학원 설립의 사적 의미 고찰》,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제1회세미나자료집, 선학원.

3) 오경후(2006), <선학원운동의 정신사적 기초>, 《선문화연구》창간호,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오경후(2008), <日帝下 ‘禪苑’誌의 創刊과 그 性格>, 《한국사상과 문화》 44, 한국사상과문화학회. ; 오경후(2020), 《한국근대불교사론》, 문현.

4) 김경집(2015), <신간회 경성지회장 만해의 독립운동>, 《선문화연구》 18, 한국불교선리연구원.

5) 법진(2019), <만해의 독립운동과 선학원-재산환수승소판결문을 중심으로>, 《선문화연구》 26,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이 글은 1950년대 선학원과 범어사 간의 소유권분쟁을 둘러싼 판결문이지만, 이전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선학원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6) 禪宗中央宗務院(1935), 《朝鮮佛敎禪宗首座大會會錄》, 경성: 중앙인쇄소.(이하 <수좌대회회록>으로 약칭함)

7) 이하 <선종수좌대회>로 약칭함.

8) <수좌대회회록>은 수좌대회에서 의결하고 통과시킨 선종종규(禪宗宗規)를 비롯하여 선회법, 선의원법, 승려 법규, 포교와 신도 법규 등 선종의 정체성을 살필 수 있는 각종 법규를 수록하고 있다. 때문에 이 자료는 선학원의 1930년대 역사를 살필 수 있고, 선학원이 근대불교사에서 지닌 위상을 객관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선학원의 설립 배경과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과 결실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9) 이하 선리참구원으로 약칭함.

10) 禪宗中央宗務院(1935), <二. 首座大會準備經過報告>, 13쪽.

11) 禪宗中央宗務院(1935), <宣誓文>, 앞의 자료, 1~2쪽.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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