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각긔관의활동상황’, 《선원》 제4호.
‘우리각긔관의활동상황’, 《선원》 제4호.

2) 한국 불교의 정체성 표방

1935년 3월 7∼8일 이틀 동안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에서는 제3차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의 수좌대회는 1921년 선학원이 창설된 이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수좌대회는 1934년 12월 5일 재단법인 인가를 받은 후에 이루어졌고,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의 새로운 면모가 당시 불교계에서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주었고, 그 위상 또한 격상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3차 수좌대회를 통해 선종을 창종(創宗)하고 선종중앙종무원(禪宗中央宗務院) 설치로 이어졌다. 이것은 1924년 4월 3일 총무원과 교무원이 총독부의 개입 하에 타협을 이루어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체제 하에57) 불교계가 전개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원》지는 1932년까지 3호를 끝으로 정간되었지만, 재단법인 인가와 수좌대회 개최를 통해 조직개편과 확대 후 4호가 간행되었다. 예컨대 선 논설을 중심으로 한 선과 관련된 글들이 게재되었고 재단법인 인가 이후 선학원의 변화된 모습을 상세히 수록하고 있다.

멧해 전만하야도 참선하는 수좌들이 결재 시에도 잇을 곳이 업고 양식도 없어 누더기 넙풀거리며 거리와 들노 헤매든 것이 기억됩니다. 이에 탄개한 뜻잇는 스님네들이 여러 해 전에 서울에 중앙선성을 맨들고 그후 일시 쇠퇴지겡에 빠젓든 것을 김적음 화상이 부흥식혀 작년十二月五日부로 재단법인으로 완성식혓습니다. … 중략 … 즉 ‘우리 조선 불교 중앙 선리 참구원’을 두고 말하면 전일 선우공제회 밋 긔타 승려 신도들이 토지와 돈과 수좌들이 먹고 입고 공부하는 참선방을 맨드는 목적하에 토지와 현금을 긔부한 것을 모은 후 총독부의 허가를 맡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이라는 법률상 사람을 맨드는 것입니다.58)

인용문은 선학원이 재단법인 인가를 만들게 된 경위다. 선학원의 창설이 대처식육을 상징하는 일본 불교의 침투에 항거하고 한국 불교가 지닌 정체성을 수호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면, 그 정체성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일 역시 중요한 의무이다. 창설 초기 선우공제회를 조직하여 수좌들의 수행 여건을 향상시키고자 했지만, 당시 불교계의 무관심으로 재정난에 직면한 것이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수좌들이 먹고 입고 앉아 정진할 보호기관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다. 1934년 선학원이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으로 개편된 이후 이사회를 개최하여 이사장 송만공, 부이사장 방한암, 상무이사 오성월, 김남전, 김적음 등의 이사진을 구성하였다.59)

1934년경 선학원의 예산은 1,427원이었지만, 법인 개편 후인 1935년은 수입금이 6,200원인 것으로 보아 선원과 수좌들의 수행 여건 향상을 위한 재정의 확립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기부액이 증가하여 1935년 10월경에는 법인의 기본금이 약 140,000원으로 확충되었다고60) 한다. 또한 재단법인에서 직접 운영하는 선방 역시 5개나 되었으며, 《선원》지에 의하면 학충된 선원에서 전국 수좌 368여 명이 재단법인의 후원하에 수행하는 결실을 보기도 하였다.61) 결국 재단법인 개편 이후 선학원은 지방 각 선원의 연락과 통제를 활발히 하였고, 선방 증설 및 수좌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선원》 제4호 표지.
《선원》 제4호 표지.

한편 1935년에 개최된 제3차 수좌대회는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천명하고 실제적인 활동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한 상징적 표현이었다.

지난 삼월의 전선수좌대회에서 선종의 자립과 전선선원의 통일긔관으로 중앙에 종무원을 설치키로 결의되여 동사무소를 경성부 안국동 중앙선원에 두고 원장 오성월 화상이 취임하야 우으로 세 분의 종정을 모시고 아래로 삼리사를 거느리여 선종의 확립과 선원 수 증가와 선원의 내용 충실을 도모한 바 불과 반 년에 선원 수가 십여 개소이고 전문으로 공부하는 수좌 수효가 삼백 명을 초과하게 되엿습니다.62)

인용문은 《선원》지 4호에 게재된 <중앙종무원>에 대한 활동 상황이다. 3차 수좌대회는 전국 37개 사찰에서 만공, 성월, 도봉 스님을 비롯한 비구승이 69명, 비구니가 6명, 전체 75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63) 당시 수좌들은 이 대회를 통해 선종의 종단을 표방하고, 종정을 추대하였으며, 전국 선원의 중앙기관인 조선불교선종종무원을 출범시켰다. 아울러 조선불교선종종규(朝鮮佛敎禪宗宗規), 종무원원칙(宗務院院則), 선회법칙(禪會法則), 선원규칙(禪院規則) 등 크고 작은 6종의 규약을 제정하여 통과시키기도 하였다.64)

적자嫡子가 얼자孼子로 역위易位되여 정법正法이 질식窒息되고 오훤誤喧되는 차제 선종수좌대회此際禪宗首座大會를 개최케 됨은 의의심원차대意義深遠且大니다. 회고回顧컨대 석일 나려시대昔日羅麗時代와 갓치 동양문화東洋文化의 중심中心이든 조선 불교朝鮮佛敎가 현황現況과 갓치 위미부진萎靡不振의 상태狀態에 방황彷徨케 된 근본 원인根本原因이 불법佛法의 진수眞髓를 직시直視한 선법禪法이 극측심체極側沈滯됨에 잇으니 진실眞實한 의미意味에서 불교佛敎의 부흥復興을 도圖하고 구운瞿雲의 대도大道를 선양宣揚할나면 형해形骸만 존재存在한 선종禪宗을 성흥盛興케 함에 잇다고 간파看破하고… 65)

인용문은 3차 수좌대회 당시 만공 스님이 발표한 개회사의 일부다. 한국 불교사에서 불교가 어느 때보다 쇠퇴한 것은 선법(禪法)의 침체가 주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선종의 부활이 조선 불교의 사활을 결정짓는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므로 선종의 부활은 곧 조선 불교가 지닌 정체성을 회복하는 지름길로 인식한 것이다. 아울러 종단의 창종(創宗)은 당시 교무원과 대등한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져 있었다.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설립 목적이 “조선 불교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종교 및 교육 사업을 시행하고, 조선사찰 각 본말사의 연합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했고66) 당시 한국 불교를 선교양종이라고 부른 것에 비하면 선종을 표방하고 ‘선종중앙종무원’이라고 한 점은 선종이 지닌 성격을 분명히 했음을 의미한다.

선종 선언 이후 지방 각 선원의 연락과 통제, 선종 종무원의 기관지인 《선원》지를 통해 선리를 참구하는 건전한 신앙의 확립, 법의 포양(褒揚), 그리고 각 본산을 권면하여 선방 증설 및 수좌들의 대우를 개선하고, 포교사를 각 지방에 보내 설법포교를 하였다. 이른바 선종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진력한 것이다.67) 선종 창종 이후 선종중앙종무원이 한국 불교의 정체성 표방을 위해 대외적으로 진행한 사업은 당시 불교계 통일 기관이었던 교무원 종회에 수좌들을 위해 청정 사찰 몇 곳을 할애해 달라는 건의서를 작성하여 제출한 일이었다. 수좌들을 위한 청정 사찰의 할애 요청은 선종의 위상과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대처풍조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닌 일반적 현상으로 정착한 이상 수좌들의 이러한 요구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결국 1926년 백용성의 두 차례에 걸친 건백서, 1931년 선학원 재건 이후 김적음의 요청, 그리고 1935년 선종중앙종무원과 1939년 조선 불교 선종 정기선회(朝鮮佛敎禪宗定期禪會)의 동일한 요청은 청정 비구승의 호법(護法)과 항일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주] -----

57)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편(2005), 《조계종사 – 근현대편》, 조계종출판사,97쪽.

58) 선학원〔昭和 10年(1935)〕, <우리각긔관의활동상황>, 《禪苑》 4號, 禪學院, 30쪽.

59) 위의 글, 31쪽.

60) 위의 글, 31쪽.

61) 《선원》에 소개된 지방선원의 수적 변화는 1931년 4곳, 1932년 2월에 11곳, 1932년 8월 19곳, 1935년 22곳으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오경후(2006), <선학원운동의 정신사적 기초>, 《선문화연구》 창간호, 한국불교선리연구원, 361쪽, 2006. <표2>, 《선원》지에 소개된 지방선원의 수적 변화 참조.)

62) 선학원〔昭和 10年(1935)〕, <우리각긔관의활동상황>, 《禪苑》 4號, 禪學院, 29∼30쪽.

63) 禪宗中央宗務院(1935), 《朝鮮佛敎禪宗首座大會會錄》, 中央印刷所, 7∼8쪽.

64) 禪宗中央宗務院, 앞의 자료, 22∼47쪽.

65) 禪宗中央宗務院(1935), <開會辭>, 《朝鮮佛敎禪宗首座大會會錄》, 中央印刷所, 6쪽.

66)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편(2005), 《조계종사 - 근현대편》, 조계종출판사, 95쪽.

67) 선학원〔昭和 10年(1935)〕, <우리각긔관의활동상황>, 《禪苑》 4號, 禪學院, 29∼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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