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낭산 석조관세음보살입상. 원래 경주 낭산(狼山) 중생사에서 멀지 않은 밭두렁에 머리를 잃은 채 묻혀 있었다. 1997년 4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는데, 그 뒤 일제강점기 때 박물관으로 옮겨온 머리를 찾아 복원했다. 일설에는 황제의 오해를 사 죽을 뻔한 중국 화공이 신라에 와 조성한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사진 ‘절(터) 찾아 떠나는 불교기행’(blog.naver.com/yinolbu)
경주 낭산 석조관세음보살입상. 원래 경주 낭산(狼山) 중생사에서 멀지 않은 밭두렁에 머리를 잃은 채 묻혀 있었다. 1997년 4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는데, 그 뒤 일제강점기 때 박물관으로 옮겨온 머리를 찾아 복원했다. 일설에는 황제의 오해를 사 죽을 뻔한 중국 화공이 신라에 와 조성한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사진 ‘절(터) 찾아 떠나는 불교기행’(blog.naver.com/yinolbu)

중생사(衆生寺) 관음보살의 조성 인연과 영험

중국의 천자(天子)에게 총애하는 여자가 있었다. 자색(姿色)의 아름답고 고운 것이 짝할 사람이 없었다. 천자는 여자를 그림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뽑아 진영(眞影)을 그리게 하였다. 화공은 명을 받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림이 끝나갈 무렵 잘못해서 붓을 떨어뜨렸다. 그때 여인의 배꼽 아래에 붉은 점이 찍혔다. 지우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화공은 마음속으로 ‘아마 붉은색 표시는 틀림없이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붉은 점을 그대로 둔 채 그림을 완성하여 바쳤다. 그림을 본 황제가 말하길 “형상은 곧 진실에 가까운데 그 배꼽 아래의 붉은 점은 몸 안에 감추어진 것이거늘 어떻게 알고 그것까지 그렸느냐?” 하였다. 또한 황제는 크게 진노하며 화공을 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가하려고 하였다. 이때, 승상(丞相)이 주청하여 말하길, “저 사람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이니 그를 사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길, “그가 어질고 정직하다면 짐이 어젯밤 꿈에 본 형상을 그려 올려라. 내 꿈과 다름이 없으면 그를 용서할 것이다.” 하였다. 그 말에 화공은 11면 관음보살상을 그려서 바쳤다. 황제가 꿈에서 본 것과 일치하므로 화난 마음이 풀고 그를 놓아주었다.

화를 면한 후 화공은 박사(博士) 분절(芬節)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기에 신라국은 불법을 공경하고 믿는다고 하니, 그대와 함께 바다에 배를 타고 그곳에 가서 함께 불사(佛事)를 닦아 널리 인방(仁邦)을 이롭게 하는 것이 또한 유익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신라국에 와서 중생사와 인연이 되어 관음보살상을 조성하니 나라 사람들이 우러러 공경하고 기도하여 복을 얻었다.

이와 같은 특이한 인연으로 조성된 까닭에 중생사 관음보살은 신이함이 많았다. 먼저 신라 말 정보(正甫) 최은함(崔殷諴)은 오래도록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중생사 관음보살에게 기도하였더니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태어난 지 석 달이 안 되어 백제의 견훤(甄萱)이 서울을 습격하여 성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최은함은 아이를 안고 중생사에 와서 고하기를, “이웃 나라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사세가 급박한지라 어린 자식이 누가 되어 둘이 다 죽음을 면할 수 없사오니 진실로 대성(大聖)이 보내신 것이라면 큰 자비의 힘으로 보호하고 길러주시어 우리 부자가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소서.” 하고 눈물을 흘려 슬프게 울면서 세 번 고하고 아이를 강보에 싸서 관음보살의 아래에 감추어 두고 돌아갔다.

반달이 지나 적병이 물러간 후 와서 아이를 찾아보니 살결은 새로 목욕한 것과 같고 모습도 어여쁘고 젖 냄새가 아직도 입에 남아있었다. 아이를 안고 집에 돌아와 길렀더니 총명하고 은혜로움이 남보다 뛰어났다. 이 아이가 고려 성종 때 <시무 28조>를 올린 최승로(崔丞魯)이다.

최은함은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고려에 귀순하여 문벌귀족이 되었다. 아들 최승로는 벼슬이 정광(正匡)에 이르렀고 아들 최숙(崔肅)이 있었다. 최숙은 제안(齊顔)을 낳았으니 이로부터 후손이 계승되어 끊이지 않았다.

중생사 관음보살의 영험은 고려조에도 계속되었다. 992년 3월 절의 주지 성태(性泰)는 관음보살 앞에 꿇어앉아 아뢰기를, “제가 오랫동안 이 절에 거주하면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밤낮으로 향화(香火)를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찰의 재정이 어려워 향사(香祀)를 이을 수가 없는지라 장차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떠나기 앞서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하였다.

그날 어렴풋이 잠을 자는데 꿈을 꾸니 대성이 이르기를, “법사는 아직 멀리 떠나지 말고 머물러 있어라. 나에게 있는 인연을 찾아서 재 드리는 비용을 충당하리라.” 하니, 스님은 대성의 말씀에 기뻐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 후 절을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렀다.

그 후 13일이 지나자 홀연히 두 사람이 말과 소에 짐을 싣고 문 앞에 이르렀다. 스님이 나가서 묻기를 “어디에서 온 사람들입니까?” 하니, 말하길 “우리는 김해지역에 사는 사람인데, 지난번에 한 스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말하길 ‘나는 경주 중생사(衆生寺)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여러 가지의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인지라 여러분이 시주의 인연을 지을 수 있도록 여기에 왔습니다.’ 하므로 이웃 마을을 돌며 시주로 거둔 것이 쌀 6섬과 소금 4섬이 되어 실어 왔습니다.” 하였다.

스님이 말하길 “이 절에는 그럴만한 스님이 없고, 그 동네에 가서 시주하도록 말한 바가 없었습니다. 아마 당신들이 잘못 들은 것 같소.” 하였다. 짐을 싣고 온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는 스님이 가르쳐 준 방향으로 왔는데 이 신현정 물가에 이르러서 말하길 ‘절의 거리가 이곳으로부터 멀지 않으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 하여 우리는 뒤쫓아서 온 것입니다.” 하였다.

중생사 스님이 그들을 인도하여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그들은 대성을 우러러보고 예배하며 서로 말하기를, “이 부처님이 시주를 구하던 스님의 모습입니다.” 하고 놀라 감탄하였다. 그 이후 해가 바뀌어도 쌀과 소금을 바치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또 어느 날 저녁은 절 대문에 불이 나서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서 법당의 관음상을 구하려고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이미 정원의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누가 그것을 밖에 내놓았는지를 물었으나 모두 모른다고 말하였다. 대중들은 스스로 움직인 대성의 신령스러운 위력을 알고 더욱 공경하였다.

1173년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점숭(占崇)이라는 스님이 중생사에 살고 있었다. 공부할 기회가 없어 글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순수하여 향화를 부지런히 받들어 중생사를 발전시켰다. 그러자 어떤 스님이 그의 거처를 빼앗으려고 관리에게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였다. “이 절은 국가에서 은혜를 빌고 복을 받드는 장소이니 마땅히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주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관리가 옳다고 생각하여 그를 시험하고자 소문(疏文)을 거꾸로 주니, 점숭은 받은 즉시 바르게 펴들고 거침없이 읽었다. 관리는 탄복하고 물러나 방안에서 다시 읽으라 하니 점숭이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관리가 말하기를, “상인(上人)은 진실로 대성(大聖)의 보살핌을 받고 있소.” 하고 끝내 절을 빼앗지 않았다.

아들을 찾아준 민장사(敏藏寺) 관음보살

경주에 있는 민장사는 각간(角干) 민장(敏藏)이 자신의 집을 내놓아 절로 삼은 것이다. 이곳에 조성된 관음보살 역시 신이로움이 많았다.

우금리(禺金里)에 가난한 여자 보개(寶開)에게 장춘(長春)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를 다니며 장사하는 사람을 따라다녔는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경주에 있는 민장사(敏藏寺)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서 7일 동안 지극히 기도드렸더니 장춘이 갑자기 돌아왔다.

어머니가 기뻐 집에 돌아온 연유를 물으니 장춘이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회오리바람을 만나 선박이 부서져서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저는 널판을 타고 오(吳)나라 해변에 닿았습니다. 오나라 사람들이 저를 데려가서 들에서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고향마을에서 온 것 같은 이상한 스님이 와서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며 저를 데리고 동행하는데, 앞에 깊은 도랑이 있어서 스님이 겨드랑이에 저를 끼고 뛰었습니다.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 향음과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살펴보니 벌써 여기에 도착하였습니다. 초저녁 때 오나라를 떠났는데 여기에 이른 것은 겨우 술시(戌時: 저녁 7시∼9시) 초였습니다.” 하였다. 이때가 745년 4월 8일이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소식을 듣고서 절에 밭을 주고 또 재물과 폐백을 바쳤다.

아이 눈을 뜨게 한 분황사(芬皇寺) 관음

경덕왕(景德王) 때 한기리(漢岐里)에 살던 여인 희명(希明)은 사내아이를 낳았다. 처음에는 괜찮았으나 점점 앞을 보지 못하는 행동을 하였다. 태어난 지 5년이 지나자 결국 눈이 멀었다. 슬픔에 빠져있던 어머니는 어느 날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측에 있는 전각의 북면에 그려져 있는 천수대비(千手大悲) 앞에 나아갔다. 그리고 아이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노래가 끝나자 아이의 눈이 다시 밝아져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아이가 부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무릎을 구부리고 두 손을 모아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빌어 사뢰나이다
천 손에 천 눈을 가지셨으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어
두 눈이 없는 나에게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베푸신다면
그 자비가 말할 수 없이 클 것이 옵니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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