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지 창간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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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원》의 성격과 간행의 의의

《선원》지가 지닌 성격은 일제하 불교계가 지니고 있었던 구조적 모순, 즉 일본불교의 탄압과 왜색불교의 경향, 불교 개혁론 대두 및 한계와 일정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당시 불교계의 선(禪)에 대한 무관심과 독신 비구승에 대한 냉혹한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와 자주적 면모와도 관련이 있다. 때문에 《선원》지가 지닌 성격은 일제하 선의 중흥과 대중화, 선학원의 설립 정신의 천명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선의 중흥과 대중화

《선원》지가 선의 중흥과 대중화에 앞장선 점은 김태흡의 다음 지적에서 알 수 있다.

한참 동안 과학만능의 부르지즘이 놉하서 따윈의 진화론을 말하지 아느면 행세할 수가 업고 맑스의 유물론을 입에 걸지 안으면 사람 노릇을 못하는 것가치 떠들드니 이제는 그러한 시대가 벌서 지나가고 마랏다.… 유물만으로만 살 수 업슴을 각성하는 자가 만커니 엇지 유물주의에만 항상 걸녀 잇슬 것이뇨 그럼으로 그러케 철석(鐵石)가치 구든 것처럼 사납게 날치는 주위자들도 이제는 거개 사상 전환기에 드러서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 인생다운 사람의 길을 발부려고 한다.46)

김태흡의 지적은 진화론과 유물론이 유행했고, 그것을 근간으로 한 불교 개혁론과 유신론이 불교계를 풍미했지만 그 한계는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오히려 종교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하였다. 그 역시 선리(禪理)가 심전개발의 골자임을 밝히고, 민중화하고 대중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현하 조선불교의 형태를 해부하야 볼 때에 질로나 양으로나 눈에 번쩍 띄일 만한 것이 어느 것이냐 하면 누구든지 대답하기에 용이한 일이 아니리라고 밋는다. 그 사업에 잇어서나 그 수련에 잇어서나 한 가지도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것이 업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선학(禪學)에 대하야 더욱이 심하다고 볼 수가 잇다. … 교육기관을 둘러보면 불완전하나마 그런 대로 중앙과 지방을 통하야 불소(不少)한 기관이서잇다. 그러나 선학(禪學)에 대하야 본다면 엇더한가 아주 영성(零星)하기가 짝이 업고 한심하기가 가이업다. 지방의 기개사(幾個寺)가 자발적으로 약간의 선실(禪室)을 유지하야 공사(空寺)를 수직(守直)케 함에 불과하고 조선불교의 체면을 유지할만한 연심성도(硏心成道)의 선불장(選佛場)으로서 조선불교의 기관자신(機關自身)이 설립하야 공인된 선원은 일소(一所)도 업다고 하야도 과언이 아니다.47)

김태흡은 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이어 조선불교계의 선에 대한 인식과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일제하 조선의 불교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육이나 포교를 담당한 기관은 적지 않지만, 선학에 대해서는 엉성하여 선실을 운영하는 사찰은 드물고, 불교계를 대표하고 공인된 선원은 없다고 지적하였다. 상황이 이와 같이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의 종회나 평의회에서 선학의 발전과 선원 문제에 대해서는 거론하는 일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중앙이든지 지방이든지 어느 곳이나 한곳에 조선불교 승려의 인격 수양과 연심수도(硏心修道)를 목적한 대표적 기관으로 고등선원(高等禪院)을 설치하고 기외(其外) 모모(某某)한 곳에는 영구적 선원을 건설하야 불종(佛種)으로 하야곰 부단상속(不斷相續)케 할뿐더러 거양종풍(擧揚宗風)의 조도(祖道)를 현양(顯揚)치 안으면 아니될 것이다.”라고 하였다.48) 결국 선학을 부활시키고, 선원을 확립하며, 선에 조예가 있는 진실한 수행납자의 생활을 보장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사실 당시 불교계에서 독신 비구승의 삶은 처절하였다. 수행납자는 선 수행에 대한 무관심과 대처식육의 풍조로 재가사원(在家寺院)에서는 수행할 수 없고, 경제적 사정이 열악하여 선원의 인원 제한으로 방부를 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병이 들면 간호도 온전히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49) 1926년 백용성의 <건백서>, 이후 선학원의 요청, 그리고 1950년대 불교정화운동 당시까지 청정 비구승단에서는 그들만의 수행 공간으로 삼을 만한 사찰을 할애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이것은 대처승과는 다른 수행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독신 수행승들의 기본적인 요구 조건이었다. 이와 같이 《선원》지는 일제하 불교계에서 선과 수행납자들의 현실을 소개하여 선의 중흥과 대중화를 모색하는 기초로 삼고 그 구체적 운동을 전개한 선학원의 활동을 불교계에 알렸다.

1922년 선학원에서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가 창립되었다. 수행납자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열악한 경제적 상황을 타개하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선우공제회는 창립 직후 지방 19곳의 사찰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운영은 선우의연금(禪友義捐金) 및 희사금(喜捨金)으로 충당하고, 선량(禪量) 중 일부를 저축하여 선원을 진흥시켜 나갔다.50) 이와 같은 선풍진작을 위한 기초적인 노력은 침체기를 겪고 난 이후부터 그 대중화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탄옹(李炭翁) 스님이 입승(立繩) 소임을 맡고 납자(衲子)와 신도 약 20인이 대방(大房)에서 참선을 시작하였다.51) 아울러 선에 대해 설법(說法)하기도 하고, 선과 교에 대한 강화(講話)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1931년 선학원이 적음 스님에 의해서 재건되면서 남녀선우회가 조직되어 그 회원이 70여 명이나 되었다.

부인선우회 역시 조직되어 1931년 3월 21일 총회가 개최되어 한용운이 설법하기도 하였다.52)

오로지 불교라면 ‘남무아미타불’ 염불하는 것인 줄 알엇스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관세음보살만 불으면 이생에서는 아무 일이 업시 만사성취하는 요소인 줄 알엇스며 지장보살만 불으면 죽을 때는 무사히 죽고 남무아미타불만 불으면 죽어서 극락세계를 간다는 단편한 불교의 교리인 줄만 알엇섯다. 더욱이 이것은 조선의 부인에게는 말할 수 업시 유행되엿든 것이다. 그러나 부인게서도 엇더한 게급에 잇서서 좀더 참다운 교리를 탐구하려고 신고한 사람도 만엇서슬 것이다.53)

부인선원의 회주 김 씨 묘연화의 술회다. 조선의 여인들이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의 명호만을 지극정성으로 외우는 것만으로 복락을 얻는 타력 신앙에 의존해 왔었음을 언급한 것이다. 부인선우회는 선학원이 재건된 이후 중앙선원의 일부 공간에서 좌선을 시작했지만, 안국동 41번지에 가옥을 마련하여 ‘조선불교중앙부인선원’으로 독립하였다. 부인선우회에서는 1931년 11월 정기회에서 간부 우풍운(禹風雲)이 발의한 재만(在滿)동포구제사업이 한뜻으로 가결되어 현금 7원 가량과 의복 80여 점을 수집하여 재만동포구제회(在滿同胞救濟會)에 송치(送致)하기도 하였다.54) 부인선원은 강령까지 마련하여 그 수행질서를 체계화시키기도 하였다. 1934년 동안거부터 1967년까지의 중앙선원 안거방함록》에는 출가 수행자뿐만 아니라 부인선원에서 수행했던 부인들의 명단도 수록되었다.55) 중앙선원의 부인선원은 지방까지 확산되어 표훈사 부인선원(表訓寺 婦人禪院) 역시 개설되어 10여 명이 수행하기도 하였다.56) 선학원의 부인선원 개설과 수행은 일제하 불교계에서는 그 유례가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표는 《선원》지에 수록된 주요 논설과 화두강화(話頭講話)에 관한 글이다. <불시선(不是禪)>이나 <심즉시불(心卽是佛)>, <본지풍광(本地風光)>,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비문자(文字非文字)> 등의 글은 선의 기초이자 핵심적인 내용을 주제로 기술하였다. 또한 백용성의 <선화누설>은 공안집인 《선문염송》을 쉽게 풀이한 강화(講話)로 연재의 형태를 띠고 있다. 아울러 <호선론(護禪論)>은 일제하 불교계의 선에 대한 인식과 수좌들의 암울한 현실, 그리고 조선을 대표하는 선의 중심기관 설치라는 개선책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서진선(西震禪)의 동별(同別)>과 같은 글은 인도와 중국 선의 같고 다름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선원》지는 선에 관한 기초적 논설과 화두의 개념과 참구의 방법을 소개하였다. 이것은 선의 중흥과 대중화를 모색하기 위한 직접적인 방안이기도 하였다. 또한 《선원》지는 일제하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선에 대한 인식이나 수좌들의 암울한 수행환경을 지적하고 선과 수좌를 소홀히 한 불교계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불교계에 대한 비판과 암울한 선과 수좌들의 현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선 수행이 지닌 가치와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인식시키고 선학원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의 한 표현이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선학원이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시키고자 진력하는 모습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주] -----

46) 김태흡〔昭和 10年(1935)〕, <心田開發과 禪의 大衆化>, 《禪苑》 4號, 禪學院, 10∼11쪽.

47) 김태흡〔昭和 7年(1932)〕, <護禪論 - 新年을 當하야>, 《禪苑》 2號, 禪學院, 2쪽.

48) 김태흡, 앞의 글, 5쪽.

49) 김태흡, 앞의 글, 6쪽.

50) <禪房編年>, 《韓國近世佛敎百年史》 제2권, 9∼16쪽.

51) 老婆〔昭和 6年(1931)〕, <禪學院日記抄要>, 《禪苑》創刊號, 禪學院, 28∼29쪽.

52) 老婆, 앞의 글, 29쪽.

53) 김씨묘연화〔昭和 10年(1935)〕, <조선불교중앙부인선원>, 《禪苑》 4號, 禪學院, 32∼33쪽.

54) 老婆〔昭和 7年(1932)〕, <禪學院日記要抄>, 《禪苑》 2號, 禪學院, 85쪽.

55) 法眞(2007), <禪學院 中央禪院 芳啣錄과 禪宗復興>, 《選佛場 - 安居芳啣錄과 首座大會會錄》, 한국불교선리연구원, 9∼30쪽.

56) 선학원〔昭和 7年(1932)〕, <朝鮮佛敎界의 禪院과 衲子數의 統計>, 《禪苑》 3號, 禪學院, 72쪽.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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