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종(金夏鐘)의 ‘낙산사’. 궁중의 화원인 김하종이 수춘(壽春, 현재의 춘천) 부사로 부임한 이광문을 따라 순조 16년(1816) 관동지방을 여행하면서 금강산과 관동지역, 설악의 명승을 그린 《해산도첩(海山圖帖)》 에 수록돼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김하종(金夏鐘)의 ‘낙산사’. 궁중의 화원인 김하종이 수춘(壽春, 현재의 춘천) 부사로 부임한 이광문을 따라 순조 16년(1816) 관동지방을 여행하면서 금강산과 관동지역, 설악의 명승을 그린 《해산도첩(海山圖帖)》 에 수록돼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의상과 원효가 만난 낙산사 관음보살

당나라에서 돌아온 의상(義湘) 법사가 명주(溟州) 땅에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해변 굴 안에 주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이곳 지형이 인도의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과 비슷하여 낙산(洛山)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이곳을 소백화(小白華)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은 것이다.

의상이 이곳에 머물며 매일 목욕재계하고 기도한 지 7일째 되던 날 새벽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龍天)의 8부(八部) 시종이 굴속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니 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주었다. 염주를 받아 물러나는 의상에게 동해의 용왕이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므로 법사가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을 목욕재계하고 기도하자 이번에는 관음보살이 현신하였다. 관음이 말하기를, “낙산 정상 자리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전각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였다. 의상이 그 말을 듣고 굴 밖으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여기에 전각을 짓고 관음보살상을 조성하였다. 원만한 모습과 고운 자질은 엄연히 하늘이 낸 듯하였다. 불사가 원만하게 이루어지자 대나무는 없어졌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의상은 그 땅이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임을 알았다. 그런 연유로 그 절 이름을 낙산사라고 이름 하였고, 신중과 용왕에게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의상이 다녀간 뒤에 원효 법사(元曉 法師) 역시 관음보살의 현신을 보기 위해 이곳으로 향했다.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가운데서 흰옷을 입은 한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그 여인을 희롱할 생각으로 벼를 달라고 하였다. 여인은 장난으로 벼가 흉작이어서 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원효가 다시 길을 가는 도중 다리 밑에서 월수건(月水帛)을 빨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원효가 마실 물을 청하니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이를 엎질러 버리고 냇물을 떠서 마셨다. 때마침 들 가운데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말하기를, “제호를 마다한 화상이여!” 하고는 홀연히 숨어버렸다. 그 소나무 아래에 여인이 벗어 놓은 신발 한 짝이 있었다.

원효가 절에 이르니 관음보살상 아래에 소나무 아래에서 본 신발 한 짝이 있었다. 그때 비로소 앞에서 만난 여인이 성스러운 관음보살의 현신임을 알았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하였다. 원효가 성스러운 동굴에 들어가 관음보살의 현신을 보고자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갔다.

의상이 받은 두 구슬은 고려시대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몽고 병란 이후 1253년과 1254년 사이에 두 보살의 진용(두 보살은 의상이 조성한 관음보살과 후에 범일국사가 조성한 정취보살이다)과 두 보주를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겼다. 몽고 군대의 공격이 심하여 성이 함락되려고 하는 급박할 무렵에 주지 아행(阿行)이 은합에 두 보주를 담아서 몸에 지니고 도망하려고 하였다. 절의 노비였던 걸승(乞升)이 이를 빼앗아 땅에 깊이 묻고 서원하기를, “내가 만약 병란에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두 보주는 끝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여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며, 내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두 보물을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 하였다.

1254년 10월 22일 성이 함락되자 아행은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하고 적병이 물러간 뒤 땅속에서 보주를 파내어 명주도(溟洲道) 감창사(監倉使)인 이녹수(李祿綏)에게 바쳤다. 그는 두 보주를 받아서 감창고(監倉庫) 안에 보관하였다.

1258년 11월 기림사(祇林寺) 주지 각유(覺猷)가 임금께 아뢰기를, “낙산사 두 보주는 국가의 신보입니다. 양주성이 함락될 당시에 절의 노비 걸승(乞升)이 성 가운데 묻어 두었다가 병사들이 물러간 뒤에 창고를 감독하는 사람에게 주었고, 그 후부터 명주 군영의 창고에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이 위태로워 지키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어부(禦府)로 옮기어 안치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윤허하여 야별초(夜別抄) 10명을 보내어 걸승을 거느리고 가서 명주성에서 보주를 거두어 내부(內府)로 옮겼다. 이때 심부름한 관원 열 명에게 각각 은(銀) 1근과 쌀 다섯 섬을 주었다.

조신의 무명을 깨우친 낙산사 관음보살

신라시대 세달사(世達寺)의 토지가 명주 내리군(㮈李郡)에 있었다. 사찰은 그곳 관리인으로 조신(調信)을 보냈다. 명주에 온 조신은 미모가 출중한 태수(太守) 김흔(金昕)의 딸을 좋아하였다. 수행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여러 번 나아가 김흔의 딸과 결혼하고 싶은 희망을 빌었다. 수년이 지나자 동안 김흔의 딸은 짝이 생겨 결혼하였다.

조신은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음을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었다. 그립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교차하는 사이 깜빡 잠이 들었다.

꿈에 김흔의 딸이 의젓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며 웃는 얼굴로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상인의 얼굴을 알아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잠시도 잊지 못하였으나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다른 사람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스님과 한 무덤에 묻힐 반려가 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신은 대단히 기뻐하며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을 살며 자녀 다섯을 두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과 가정을 이루었으나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집은 다만 네 벽뿐이요. 나물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실의에 찬 두 사람은 품을 팔아 입에 풀칠할 요량으로 서로 잡고 끌고 하며 사방을 떠돌아다녔다. 이와 같은 생활을 10년 동안 하면서 두루 초야를 유람하니 입은 옷은 찢어지고 낡아 몸을 가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침 명주 해현령(蟹峴嶺)을 지날 때 15세 된 큰아이가 홀연히 굶어 죽었다. 통곡하며 주검을 거두어 길에 묻었다. 부부는 남은 네 자녀를 거느리고 우곡현(羽曲縣)에 이르렀다. 길가에 띠풀을 묶어 집을 삼아 살았다. 부부는 늙고 또 병들고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10살짜리 딸이 밥을 얻으러 돌아다녔는데 마을 개에게 물려 돌아와 아픔을 호소하니, 부모가 목이 메어 흐느껴 울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부인이 괴로워 머뭇거리며 눈물을 훔치고 나서 창졸히 말하기를,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고 옷가지도 많고 아름다웠습니다. 맛 좋은 한 가지의 음식이라도 당신과 나누어 먹고, 얼마 안 되는 옷가지도 당신과 나누어 입으면서 함께 산 지 50년, 그 사이 정은 더할 수 없이 깊어졌고, 사랑은 얽히고 묶였으니 가히 두터운 인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노쇠와 병고가 해가 거듭될수록 심해지고 추위와 배고픔은 날로 더욱 절박해집니다. 한 칸의 곁방살이, 한 병의 마실 것도 사람들이 용납하여 주지 않으니, 수많은 집 문 앞에서 당하는 그 수모는 산더미같이 무겁기만 합니다. 아이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지쳤어도 면하게 할 수 없으니 어느 틈에 사랑함이 있어 부부의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지경에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겨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젊은 얼굴에 예쁜 웃음은 풀잎 위의 이슬 같고, 지란(芝蘭) 같은 백년가약은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 같습니다. 당신은 제가 짐이 되고 저는 당신 때문에 근심이 생깁니다. 옛날의 즐거움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우환에 접어드는 길목이었습니다. 당신과 제가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지요? 여러 새가 함께 굶어 죽는 것은 차라리 짝을 잃은 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어려울 때 버리고, 좋을 때 가까이하는 일은 인정으로 차마 할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행하고 그치고 하는 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며,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명이 있는 것이니 청컨대 내 말을 좇아 헤어지기로 합시다.” 하였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을 나누어 막 가려고 할 때 아내가 말하기를, “저는 고향으로 가겠습니다. 당신은 남쪽으로 가시지요.”라고 하며 서로 잡았던 손을 막 놓고 갈라서 길을 떠나려 할 때 꿈을 깼다.

새벽이 되어서 보니 하룻밤 사이에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어 있었다. 넋 잃은 모양은 더 이상 인간 세상에 뜻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살이의 괴로움에 이미 염증이 난 것이 마치 백 년의 쓰라림을 겪은 것 같았다. 이때 탐욕의 마음도 깨끗이 얼음 녹듯 사라져버렸다. 관음보살의 거룩한 모습을 보며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부끄럽게 여기며 참회하였다. 꿈속에서 큰아이를 파묻었던 해현령으로 가서 자리를 파보았더니 돌로 조성된 미륵이 나왔다. 깨끗이 씻어서 이웃 절에 봉안하였다. 경주로 돌아가 토지를 관리하는 책임을 벗고 나서 사재를 기울여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착한 일을 닦았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