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소식(禪院消息)’, 《선원》 4호.
‘선원소식(禪院消息)’, 《선원》 4호.

2) 글의 유형

《선원》지에 게재된 글은 그 유형상 여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선(禪), 둘째, 선종사, 셋째, 시조, 넷째, 교리, 다섯째, 선학원의 활동, 여섯째, 소설을 중심으로 한 불교문학이다.

먼저 34편에 이르는 선에 관한 글은 선 논설(17편), 선사어록과 조선 후기 추사와 백파 간에 오고간 선 논쟁을 번역한 글(3편), 선의 대중화와 중흥을 위한 논설(4편), 화두(10편)에 관한 글로 가장 많은 편수를 이루고 있다.

경성 안국동 사십번지에서 선원(禪苑)이란 소지(小誌)를 간행한다고 선(禪)에 대하야 직절평범(直截平凡)하게 해설하야 보내라는 통지서가 래부(來付)함을 바드매 자연이 감상(感想)이 발하야 문사(文辭)의 황졸(荒拙)과 어조(語調)의 실격(失格)을 도라보지 아니하고 약간(略干)이까짓것을 초(艸)하야 송정(送呈)하나이다.29)

인용문은 방한암의 글로 《선원》지가 지닌 글의 공통적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선에 대한 직절평범한 해설’을 중심으로 게재된 것이다. 그동안 교종을 칭하는 세력이 점차 많아졌지만30) 독신 비구승 중심의 수좌와 선 수행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 선의 중흥과 함께 대중화가 선학원의 설립 정신 가운데 하나라고 했을 때 《선원》지의 집필 방침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선에 대한 간결하고 직접적인 해설을 담고 있는 글들이 요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김태흡 역시 “심원(心源)을 깨쳐야 생사에 뛰어나고 심근(心根)을 밝혀야 열반에 듭니다. 우리는 심즉시불(心卽是佛)을 체달합시다.”라고31) 강조하였다.

우리 불자는 무엇보다도 해탈의 경계를 얻어 대중을 위해서 노력하려면 먼저 참선이 필요할 것이다. 이럼으로 부처님도 사십구 년을 대중을 위해서 팔만장경의 법을 설하섯스나 실로 뇌로우시지 아니시고 최후 열반의 길까지 자재하심은 설산 륙 년의 대수양 선정력이시다. 이럼으로써 사람으로 사람다운 일을 하려면 먼저 선을 연구하여야 될 것이요. 선을 연구한다는 것보다도 자기가 자기를 알어야 할 급무이다. 자기가 자기를 아는 이상엔 능히 남을 위해서 노력할 수 잇는 것이다. 이것을 왈 참된 사람이라 한다.32)

풍고(風皐)는 자신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남을 위해서 노력하려면 참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른바 선 수행의 당위성을 강조한 논설을 게재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선에 대한 기초적인 글과 그 소개는 우리나라 선종사 기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권상로는 창간호에서 “그 선종이 조선에 들어오기는 어느 시대붙어이며 또는 어떠한인물 어떠한 연원으로써 분포, 발양되엿는가를 피상(皮相)만으로나마 차저 볼가함이 이에 있어서는 아마 정론격인 듯하다.”라고 하였다.33) 그러나 본인이 피상적으로 살펴본다고는 했지만, <보조국사영탑비>, <지증국사비>, <고려용담사총림회방> 등 국내 사료뿐만 아니라 《조당집》이나 《전등록》과 같은 중국 측 자료를 전거 자료로 활용하여 구산선문의 종조(宗祖)와 그 전개를 기술하였다.

시조는 19명이 25편을 게재하였다. 불교 관련 소재와 선학원에서의 단상을 소재로 읊은 것이다. 교리는 선과 관련된 글을 제외한 일반적인 불교 교리를 게재하였다.

예컨대 김경주(金敬注)는 불교의 근본교리가 교리학으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제(四諦), 실천수행 요약으로 계정혜(戒定慧) 삼학, 팔정도(八正道)라고 소개하였다. 그 가운데 3대 골수(骨髓)를 계정혜 삼학이라고 하였다. 삼학에 대해서는 부연설명까지 하였다. 정(定)을 설명하면서 중국과 조선의 선종에 대해 설명하였다.34) 허영호(許永鎬) 역시 <대품반야(大品般若)에 보이는 보살(菩薩)의 십지사상(十地思想)>이라는 글에서 대품반야, 특히 나집의 대품반야에 나타난 십지(十地)가 어떻게 해서 성립·정돈되었는가를 보고자 했다.35)

이밖에 백용성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역해(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譯解)’를 《불일(佛日)》지에 전편을 해석하고자 하였지만, 용이하지 않아 《선원(禪苑)》에 옮겨 그 번역을 마치고자” 한다고 전제하였다.36) 또한 병납(病衲)이라는 필명을 가진 투고자는 “아 ㅡ 엇지하면 병든 이몸이 부처님과 가치 청정하오릿가? 그리고 또 언제나 거짓이업시 이 세상을 사라가오릿가?”라며 참회와 함께 깨치고자 하는 서원을 이루려는 수행자로서의 맹세를 묘사하기도 하였다.37)

한편 <선학원일기초요(禪學院日記抄要)>, <지방선원소식(地方禪院消息)>, <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의 선원(禪院)과 납자수(衲子數)의 통계(統計)>, <우리각긔관의활동상황> 등의 글은 《선원》지가 선학원의 기관지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창간호와 2호에 소개된 <선학원일기초요>는 1931년 적음 스님이 선학원을 인수한 1931년 1월 21일부터 1931년 9월 12일까지의 대소사를 적고 있다.

1호에서는 인수인계 직후 탄옹 화상을 입승(立繩)으로 하여 참선을 시작하였으며, 남녀선우회 조직(1931. 3. 1.),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를 개최하고 적음 스님이 교무원 종회에 중앙선원 설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교무원 종회는 찬의(贊意)를 표방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부결(1931.3.27.)된 점을 소개하고 있다.38) 2호에서는 1932년 9월 14일부터 12월 17일까지 선학원에서 일어난 대소사를 기록하였다. 선방 중수를 위해 현금을 모집한 사실(1931. 9. 14.)이나, 김적음이 범어사 본산 총회에서 경비 보조를 청구했지만, 범어사의 경제적 곤란으로 삭감된 사실 역시 수록하였다.39)

<지방선원소식>에서는 당시 열악한 상황 속에 있었던 지방 선원의 안거 대중과 동정을 정리하였다. 창간호에서는 유점사, 상원사, 표훈사, 직지사, 대승사의 사정만을 소개했지만,40) 제2호에서는 경북 달성의 금락선원(琴洛禪院) 창설과 예산 정혜사(定慧寺) 등 9곳의 지방 선원의 동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1) 제3호 역시 선원 13곳의 사정을 조사하여 <조선 불교계의 선원과 납자수의 통계>42)를 수록했는데, 이것은 선학원이 재건된 이후 침체된 선원의 부활과 수행 여건의 체계화를 의미한 것이다.

제4호는 1935년 선학원이 재단법인의 인가를 받은 이후 제3차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를 개최하고, 선종의 창종을 선언한 이후 간행되었다. 때문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확대 개편된 모습을 수록하고 있다. 예컨대 중앙선원을 전국 선원의 모범선원으로 지정한 점이나, 선종중앙종무원(禪宗中央宗務院), 재단법인(財團法人), 조선불교중앙부인선원(朝鮮佛敎中央婦人禪院) 등 산하기관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43) 아울러 확대된 22곳의 선원 소식44) 과재단법인 인가 이후 기부자 명단과 기부금 규모를 공개하여 안정적이고 투명한 재정 상황 역시 소개하였다.45)

이와 같이 《선원》지는 선학원이 창설된 이후의 침체와 재건, 재단법인 인가와 창종創宗 등 시기별 변화상을 살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대은은 《선원》지에 <부설거사(浮雪居士)>(창간호), <육조대사(六祖大師)>(제2호), <장수왕(長壽王)의 자비>(제3호)를 게재하였다. 이 글들은 이후 불교시보사에서 저작물로 간행되었고, 선학원에서 단행본 형태로 간행되어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들 작품들은 경전을 번역한 것이기보다는 경전에 나온 불교 소재를 요약하거나, 재미있게 서술한 교리입문서이자 신앙서였다.

요컨대 《선원》지에 게재된 글들은 화두와 그 참구, 선에 관한 논설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선종사에 대한 소개 역시 우리나라 선의 효시와 선문 구산의 종조(宗祖)를 통해 그 위상과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아울러 선학원의 활동에 대한 소개는 단순한 불교계의 동정을 소개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 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항일 정신, 그리고 진정한 불교 개혁과 유신은 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반영하고 있다.

[주] -----

29) 方漢岩〔昭和 6年(1931)〕, <一塵話>, 《禪苑》 創刊號, 禪學院, 15쪽.

30) 이재헌(1999), <근대 한국 불교개혁 패러다임의 성격과 한계>, 《종교연구》 18, 한국종교학회, 86쪽.

31) 김태흡〔昭和 6年(1931)〕, <心卽是佛>, 《禪苑》 創刊號, 禪學院, 23쪽.

32) 風皐〔昭和 6年(1931)〕, <참된 사람>, 《禪苑》 創刊號, 禪學院, 27쪽.

33) 권상로〔昭和 6年(1931)〕, <조선의 선종은 어떠한 역사를 갖엇는가>, 《禪苑》 創刊號, 禪學院, 9쪽.

34) 金敬注〔昭和 6年(1932)〕, <佛敎의 三大骨髓>, 《禪苑》 2號, 禪學院, 24∼27쪽.

35) 許永鎬〔昭和 6年(1932)〕, <大品般若에 보이는 菩薩의 十地思想>, 《禪苑》 3號, 禪學院, 13∼16쪽.

36) 백용성〔昭和 6年(1932)〕, <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譯解>, 《禪苑》 3號, 禪學院, 29∼30쪽.

37) 병납〔昭和 6年(1932)〕, <구든맹서>, 《禪苑》 3號, 禪學院, 34∼37쪽.

38) 老婆〔昭和 6年(1931)〕, <禪學院日記抄要>, 《禪苑》 創刊號, 禪學院, 28∼29쪽.

39) 老婆〔昭和 7年(1932)〕, <禪學院日記要抄>, 《禪苑》 2號, 禪學院, 85∼86쪽.

40) 禪學院〔昭和 6年(1931)〕, <地方禪院消息>, 《禪苑》 創刊號, 禪學院, 42쪽.

41) 禪學院〔昭和 7年(1932)〕, <地方禪院消息>, 《禪苑》 2號, 禪學院, 87∼88쪽.

42) 禪學院〔昭和 7年(1932)〕, <朝鮮佛敎界의 禪院과 衲子數의 統計>, 《禪苑》 3號, 禪學院, 72쪽.

43) 禪學院〔昭和 10年(1935)〕, <우리각긔관의활동상황>, 《禪苑》 4號, 禪學院, 29∼34쪽.

44) <禪院消息>, 앞의 책, 42∼43쪽.

45) 禪學院〔昭和 10年(1935)〕, <財團法人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設立當時寄附財産者一覽表>, 《禪苑》 4號, 43∼44쪽.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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