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표 율사에게 가사와 바리, 《공양차제비법》 한 권, 《일찰선악업보경》 두 권, 간자 189개를 전해 받은 영심이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속리산에 창건한 법주사. 불교저널 자료사진.
진표 율사에게 가사와 바리, 《공양차제비법》 한 권, 《일찰선악업보경》 두 권, 간자 189개를 전해 받은 영심이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속리산에 창건한 법주사. 불교저널 자료사진.

‘점찰경’과 점찰법회의 내용

점찰법회(占察法會)는 새끼손가락 굵기의 목륜상(木輪相)을 던져 나온 괘를 보고 자신의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다. 이 법회는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따른 것으로, 이 경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 다른 이름으로 《지장보살업보경(地藏菩薩業報經)》, 《대승실의경(大乘實義徑)》, 또는 《점찰경(占察經)》으로 불린다. 경전의 내용은 지장보살이 말세 중생을 위해 업장을 소멸하여 내세에는 왕생극락하고, 정법으로 나아가는 방편을 설한 것이다.

《점찰경》 상권에 불멸 후 악세에서 출·재가 중생이 세간과 출세간의 인과법에 대하여 확고한 신심을 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장애를 만나 의혹이 일어나거든 목륜상법(木輪相法)을 써서 선악의 숙세(宿世)의 업과 그 과보를 점찰하여 참회 수행할 것을 설하였다.

괘를 보는 방법은 목륜 열 개로 숙세에 지은 선업과 악업의 차별을 점치는 심륜상법(十輪相法), 목륜 세 개로 지은 업의 원근과 강약·대소 차별을 살피는 삼륜상법(三輪相法), 그리고 목륜 여섯 개의 각 3면에 1에서 18까지 숫자를 하나씩 써넣고 이것을 던져 나오는 수의 합인 1에서 189로 삼세 중 받을 과보의 차별을 점치는 육륜상법(六輪相法)의 3가지가 있다. 현세에 나타난 인간의 길흉화복을 숙세의 과보로 보고 참회하고 선업을 지어 내세를 밝힐 것을 가르친 것이다.

《점찰경》을 중국에서 조성된 위경으로 볼 때 점찰법회는 인도불교에는 없고 중국불교에서 시작된 법회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진표전간(眞表傳簡)> 조에 중국의 점찰법회를 소략하게 전하고 있다.

개황(開皇) 13년(593)에 광주(廣州)에 참법(懺法)을 행하는 승려가 있었다. 그는 가죽으로 점자(岾子) 두 장을 만들어 선(善)과 악(惡) 두 글자를 써서 사람에게 던지게 하여 선자(善字)를 얻은 자를 길(吉)하다고 했다. 또 그가 스스로 박참법(撲懺法)을 행해서 지은 죄를 없애게 한다고 하니 남녀가 한데 어울려서 함부로 받아들여 비밀히 행해서 청주(靑州)에까지 퍼졌다.

동행(同行) 관사(官司)가 이것을 조사해 보고 요망스러운 일이라 하니 그들이 말했다.

“이 탑참법(搭懺法)은 《점찰경》에 의한 것이고, 박참법은 여러 경(經)의 내용에 따른 것으로, 온몸을 땅에 던져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한다.”

이 사실을 아뢰자 황제(皇帝)가 내사시랑(內史侍郞) 이원찬(李元撰)을 대흥사(大興寺)로 보내 여러 대덕(大德)에게 물으니, 대사문(大沙門) 법경(法經)과 언종(彦琮) 등이 대답했다. “《점찰경》은 두 권이 있는데, 책머리에 보리등(菩提燈)이 외국에서 번역한 글이라고 하였으니 근대(近代)에 나온 것 같습니다. 또한 사본(寫本)으로 전하는 것이 있는데, 여러 기록을 검사해 보아도 아무 데도 바른 이름과 번역한 사람과 시일(時日)이나 장소가 없습니다. 탑참법(搭懺法)은 여러 가지 경(經)과는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의해서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칙령(勅令)으로 이것을 금지시켰다.

후에 《점찰경》에 대해 경문을 자세히 보고 이에 실단(悉壇,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방법)이 깊고 세밀하며 더러운 잘못을 깨끗하게 하고 게으른 사람을 분발하게 하는 것은 이 경전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또한 대승참(大乘懺)이라 이름 한 것이고, 또한 말하기를 육근(六根)이 모인 가운데 나왔다고 하는 것이다. 개원(開元), 정원(貞元) 연간의 두 《석교록(釋敎錄)》 가운데 정장(正藏)으로 편입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중국에서도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대중들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확대된 것을 알 수 있다.

점찰법회는 신라의 구법승들에 의해 전해졌다. 신라시대 점찰법회는 원광 법사가 가서사(嘉栖寺)에서 처음으로 열었고, 뒤이어 안흥사(安興寺)의 비구니도 시행한 기록이 있다. 원효와 절친이며 신승(神僧)이었던 사복(蛇福)이 입적하자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금강산(金剛山)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도량사(道場寺)라 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3월 14일이면 점찰회(占察會)를 여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점찰법회는 통일 전 신라 사회에 들어와 점점 확대되었고, 마침내 진표 율사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이와 같은 점찰법을 행하면서,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게 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하여서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과 무명을 저지할 뿐 아니라 청정행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한다는 불법 수행의 중요한 의미가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영심(永深)의 점찰법회 계승

진표는 발연사를 나와 다시 부사의방으로 갔고 그런 후에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를 뵈기도 하고 혹은 진문 대덕(眞門 大德)의 방에 가서 살기도 하였다. 이때 속리산 대덕 영심이 대덕 융종(融宗)·불타(佛陁) 등과 함께 율사가 있는 곳에 와서 청하였다.

“우리는 1000리를 멀지 않게 여기고 계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원하건대 법문(法門)을 주십시오.”

진표가 묵묵히 쳐다보며 대답이 없었다.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 위로 올라가 땅에 거꾸로 떨어지며 용맹하게 참회하였다. 이를 지켜본 진표가 마침내 가르침을 전하여 관정(灌頂)을 하고 가사와 바리,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한 권, 《일찰선악업보경(日察善惡業報經)》 두 권, 미륵의 진생(眞栍) 9자와 8자가 포함된 간자 189개를 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경계하여 말하였다.

“9자는 법 자체이고 8자는 신종성불종자이다.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맡기었으니 이를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산에 길상초가 자라는 곳이 있으니 여기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여기에 따라 법을 가르쳐서 인간계와 천계를 널리 제도하고 후세에 널리 펼쳐라.”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곧바로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창건하고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영심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이곳이 지금의 법주사이다.

심지 계조(心地繼祖)의 점찰법회 계승

심지(心地)는 신라 제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아들이다. 태어나서 효성과 우애가 깊었고 천성이 깊고 지혜로웠다. 15세 때 출가한 후 스승을 따라 불도에 힘썼다. 팔공산에 머물렀는데 마침 속리산 영심(永深)이 진표 율사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가지고 과증(果證) 법회를 개최하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기약이 지나 도착한 탓에 참례를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는 그냥 땅에 주저앉아 뜰을 치며 사람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하였다. 7일이 지나서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렸는데 서 있는 자리 사방 10척 정도는 눈이 흩날려도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신이하게 여겨 당(堂)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심지는 자기를 낮추고 병을 핑계로 방에 물러나 있으면서 당을 향해 몰래 예를 올리니, 팔꿈치와 이마에서 모두 피가 흘러 진표가 선계산에서 하던 것과 비슷하였고, 지장보살이 날마다 와서 위문하였다.

법회가 끝나자 산으로 돌아오는데 도중에 두 간자가 옷섶 사이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영심에게 돌아가 아뢰었다. 그러자 영심은 “간자는 함 안에 있는데 어찌 너에게 이를 수 있겠느냐?” 하며 봉해 놓은 것을 확인해 보니 예전과 같은데 안에 간자가 없었다. 영심은 매우 이상하게 여기고 거듭 싸서 보관하였다. 또 심지가 가다가 먼저와 같아서 다시 돌아가 아뢰니 영심이 “부처의 뜻이 너에게 있으니 네가 그것을 받들어라.”라고 하고 간자를 주었다.

심지가 간자를 정수리에 이고 산으로 돌아가니 산신이 두 선자(仙子)를 이끌고 맞이하여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심지를 바위 위에 앉히고 아래에 엎드려 삼가 계를 받았다. 심지는 “지금 장차 땅을 택해서 간자를 봉안하고자 하는데 우리가 능히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높이 올라가 간자를 던져서 점을 쳐보기를 청하자.” 하였다. 이에 신들과 산꼭대기에 올라 서쪽을 향해 던지니 간자가 곧 바람에 날려 날아갔다. 이때 신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막힌 바위가 멀리 물러나고 숫돌처럼 평평하구나. 낙엽이 날아 흩어져 밝게 되었구나. 불골간자를 찾아서 깨끗한 곳에 봉안하여 정성을 바치리라.” 하였다. 노래를 마치고 숲의 샘 속에 있는 간자를 찾아내고 그곳에 강당을 지어 안치하였다. 지금 동화사(桐華寺) 참당(籤堂)의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다.

간자는 고려시대까지 전해졌다. 문사(文士) 김관의(金寬毅)가 편찬한 《왕대종록(王代宗錄)》 2권에 보면, 신라 말 대덕 석충(釋沖)이 태조에게 진표 율사의 가사 1벌과 간자 189개를 바쳤다고 하는데, 이것이 지금 동화사(桐華寺)에 전해 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예종(睿宗)이 일찍이 간자를 안에서 보고 공경하다가 갑자기 9자 간자를 잃어버려서 상아로 그를 대신하여 본사로 돌려보냈다. 지금 곧 점점 변해 같은 색이 되어 새것과 옛것을 구별하기 어렵다고 한 내용이 있다.

김경집 | 동국대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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