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사상연구원은 ‘명나라 불교정책 그리고 보살의 개념’을 주제로 4월 2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법련사 대웅보전에서 ‘제145차 정기 월례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보살 개념에 대한 고찰(서정원·동국대 / 논평 권규민·동국대, 나지용·금강대) △명 황제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김진무·원광대/ 논평 정완·동국대, 곽뢰동국대) 이 발표될 예정이다.

이날 월례 학술대회는 법련사 유튜브 채널로 생중계된다.

문의. bojosasang@naver.com

다음은 연구원이 배포한 주제발표 요약.

■ 서정원(동국대) ‘보살 개념에 대한 고찰’

본 발표는 보조지눌(普照知訥, 이하 지눌)의 보살행(菩薩行) 개념에 접근하기 위한 시론이다.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는 선오후수(先悟後修)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후수, 즉 수행에 주목해 본다면 지눌이 말하는 수행이란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오후보림(悟後保任) 보다는 보살행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반적인 불교상식에서 보았을 때, 보살행은 인(因), 깨달음은 과(果)로 시간적 선후가 명확한 것인데, 지눌에게는 이것이 역전되어 있다고 판단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보살행과 깨달음의 역전현상이 불교적인 전거가 없는 것은 아닌데, 바로 《화엄경(華嚴經)》에 나타난 인과교철(因果交徹)이 그 전거라 할 수 있다. 《화엄경》상에서 경주(經主)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지만, 설자(說者)는 주로 보살들이다. 이를 인위(因位)의 보살이 붓다라는 과위(果位)를 설〔菩薩行〕한다고 하여 인과가 서로 통한〔交徹〕다는 의미에서 청량 징관(淸凉 澄觀)이 인과교철이라 명명한 것이다.

위와 같은 《화엄경》의 독특한 보살행은 이 경전이 초기 대승경전이라는 점에서 더 이색적이다. 왜냐면 대승불교의 초기부터 보살행과 불과의 관계는 우리의 일반적 상식과 반드시 맞는 형태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 발표는 지눌이 말한 깨달음과 실천의 역전관계에 대해서 그 전거를 현재 구할 수 있는 최대 상한선인 초기 대승경전의 성립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보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하여 보살개념의 성립과 관련한 선행연구를 검토하고, 주류불교의 보살에 대한 전제들을 살펴보며, 초기 대승경전 상에서는 《법경경(法鏡經)》처럼 주류불교의 보살에 대한 전제를 받아들여 보살행을 설하는 경전, 《법화경(法華經)》처럼 대승의 독자적인 보살행을 설하는 경전으로 구분해볼 것이다. 결론으로 초기 대승경전에서 보살행은 반드시 인행(因行)에 국한되어 이해된 것은 아니었음을 본 발표에서 주장하고자 한다.

■ 김진무(원광대) ‘명(明)황제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

명을 세운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즉위 초에 철저하게 주희(朱熹)를 중심으로 하는 ‘이학(理學)’으로 통치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이학’이 시대정신을 주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 대하여 태조는 ‘선세원(善世院)’을 설치하고 승관제(僧官制)를 채택하여 통제하였으며, 이후 ‘승록사(僧錄司)’로 개편하여 더욱 철저하게 도첩(度牒)을 관리하였다. 더욱이 홍무(洪武) 24년(1391)에 신명불교방책(申明佛教榜冊)을 발표하여 시행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승려가 재가의 신도를 만나는 것도 불가능하게 하였다. 비록 태조의 사후 성조(成祖: 永樂帝)는 태조의 철저한 불교통제 정책을 어느 정도 완화하였고, 영종(英宗)과 신종(神宗)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보호하였지만, 전체적인 명대의 황제들은 불교에 대한 통제정책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황제들의 불교통제정책에 대하여 당시 불교계에서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 본 주제의 연구내용이다. 이 시기의 불교계는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타락한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불교를 중흥하고자 하는 고승들의 노력이 대비되고 있다. 특히 초석 범기(礎石 梵琦), 계담 종륵(季潭 宗泐), 도연(道衍)과 공곡경륭(空谷 景隆) 등과 같은 고승들의 사례를 통하여 이를 구체적으로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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