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아홉 나라가 조공하며 왕조가 영원히 편안하게 된다’는 진호국가사상에 입각해 건립된 황룡사 구층목탑은 신라 밀교의 서막을 개척한 안홍의 저서 《동도성립기》에서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황룡사 구층목탑지 전경. 불교저널 자료사진.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아홉 나라가 조공하며 왕조가 영원히 편안하게 된다’는 진호국가사상에 입각해 건립된 황룡사 구층목탑은 신라 밀교의 서막을 개척한 안홍의 저서 《동도성립기》에서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황룡사 구층목탑지 전경. 불교저널 자료사진.

원광의 점찰법회(占察法會)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의 북조,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소통하면서 불교를 수용하였다. 그 후 전래승과 구법승의 왕래를 통해 다양한 불교사상과 함께 많은 경전이 전래 되었다. 밀교 사상 역시 그런 경로를 통해 다양하게 수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밀교 사상이 어느 정도 형성되었을 것이지만 흐름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관계로 그 전모를 알기 어렵다.

신라 밀교의 초기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신라 원광의 행적이다. 그는 출가 후 나이 30이 되자 삼기산에 들어가 수행하였다. 그 후 4년이 지나자 한 비구가 와서 멀지 않은 곳에 절을 짓고 지내며 주술을 닦았다. 이때 신이 나타나 주술을 닦는 것을 싫어하며 원광을 시켜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주술을 닦던 비구가 이를 거절하자 신은 신통으로 산을 무너뜨려 비구의 수행처를 덮었다. 그 후 더 이상 주술을 닦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주술은 밀교의 주기능이다. 그런 의례를 통해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그런 관계에서 볼 때 원광의 행적에서 볼 수 있는 한 비구의 주술행위는 정형화된 밀교의 모습은 아니지만 밀교 의례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사실로 진평왕 때 밀교가 신라 사회에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주술을 하는 비구가 신과의 갈등에서 패배한 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아직 토착적인 성향이 강한 부족의 종교에 의해 저변을 확보할 수 없었던 초기 밀교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삼기산에서 짧은 시간 경험한 주술은 원광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의 권유로 진평왕 11년(589) 수나라에 들어가 아함, 성실, 반야, 섭론 등 대승불교를 수학하면서도 밀교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진평왕 22년(600) 귀국한 후 대승 경전을 강의하면서도 주술적 관심을 신라 사회에 펼치는 등 원광의 행적에는 밀교와 관련한 여러 행동이 나타나고 있다.

진평왕이 병이 들어 어의가 치료하여도 완치되지 않자 원광을 궁궐로 초청하였다. 그는 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밤에 두 차례 깊은 법을 설하고 계를 받아 참회하도록 하였다. 왕이 그대로 따르자 오래지 않아 병의 차도가 있었다. 이것은 수계참회의 법을 치병주술에 활용하여 병을 치료한 예이다.

원광은 밀교를 활용하여 대중을 교화하였다. 그가 머물고 있던 가서갑(嘉栖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었다. 이것은 점찰법회를 위한 재정 마련을 위한 보이다. 점찰법회는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나오는 점찰법을 말한다. 원광은 그런 법회를 통해 무속적인 점복을 대치하고 밀교가 신라 사회에 널리 퍼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점찰법회에 참여해서 감응을 받은 많은 사람이 점찰보에 전답을 희사하는 자가 많아지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원광은 불모지와 다름없던 고대 한국 밀교에 있어 큰 역할을 한 사상가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삼기산 금곡사(金谷寺)를 중심으로 계승되면서 고대 밀교를 여는 서막이 되었다.

원광의 밀교 사상과 실천은 사후 밀본(密本)에게 계승되어 신라 사회에 널리 퍼졌다. 그가 입적하자 부도가 지금의 안강 서남쪽 삼기산 금곡사에 세워졌다. 그 후 이곳에 밀본이 머무르면서 수행하였다. 밀본은 고대 밀교 사상을 본격적으로 정립한 수행승이다. 그런 그가 삼기산에서 수행했다는 것은 밀교의 서막을 연 원광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 한 밀교적 상승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고대 밀교의 서막을 개척한 안홍(安弘)

원광 이후 신라 밀교의 서막을 개척한 수행자는 안홍이다. 그의 행적에 관해 여러 자료가 존재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진평왕 1년(579)에 태어나 선덕여왕 9년(640) 62세로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입적하였다.

안홍은 수나라에 유학하는 동안 칙명으로 대흥성사(大興聖寺)에 머물면서 황실의 지원을 받아 당시 융성했던 불교 교학인 천태와 삼론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가 공부한 십승비법(十乘秘法)은 천태 지의가 《마하지관》에서 설한 원돈지관이고, 《현의》는 천태와 길장의 저술에 자주 보이는 책 이름이다. 또한 귀국하여서 《능가경》과 《승만경》을 바친 것을 볼 때 여래장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승 교학에 밝았던 안홍이었지만 밀교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귀국 후 그는 호승 비마라진제(毘摩羅眞諦) 등과 함께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旃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였다. 이 경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경명으로 볼 때 밀교계 경전임을 알 수 있다.

안홍의 밀교 사상은 《참서(讖書)》 1권과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두 저술은 책 이름만 전해지고 내용을 알 수 없어 단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다른 곳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내용으로 볼 때 밀교적 색채가 짙은 저술인 것으로 추측된다.

먼저 《해동고승전》을 통해 전해지는 《참서》의 일부를 살펴보면 먼저 신라 첫 번째 여왕을 도리천에 장례 지내고, 두 번째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사천왕사를 세우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자가 돌아와 군주가 태평성대를 이룬다고 예언하였다.

이런 안홍의 예언은 실제로 일어났다. 첫 번째 예언처럼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은 뒤 도리천에 묻어달라는 유촉에 따라 낭산 남쪽에 묻혔다. 뒷날 무덤 밑에 사천왕사가 세워지면서 불교의 기세간론에 의해 선덕여왕의 무덤은 자연적으로 도리천이 되었다.

두 번째 예언처럼 문무왕 10년(670)과 11년 명랑은 낭산 남쪽 신유림에 임시로 사천왕사를 가설하여 문두루법으로 당나라 군사를 물리쳤고, 같은 왕 19년(679) 그곳에 사천왕사가 정식으로 낙성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예언처럼 당에 볼모로 있던 왕자 김인문이 돌아오고 당과의 관계가 원만해지면서 신라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안홍의 다른 저서 《동도성립기》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일부를 보면 신라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의 폐해를 진압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황룡사 9층탑의 건립목적은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아홉 나라가 조공하며 왕조가 영원히 편안하게 된다〔隣國降伏 九朝來攻 王朝永安〕는 진호국가사상에 입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 진신사리에 대한 위신력은 밀교 경전에 전해지고 있다. 《관정경》 권6 《총묘인연사방신주경(冢墓因緣四方神呪經)》에 ‘사리는 마미(麻米)처럼 작지만 큰 위신이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사리탑에 호국의 영력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건립한 황룡사 9층 사리탑은 당연히 밀교적인 교설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신라 사회에서 본격적인 밀교 활동을 펼친 안홍은 선덕왕 9년(640) 향년 64세로 만선도량에서 입적하였다. 그 후 흥륜사 금당 십성의 하나로 봉안된 것을 볼 때 신라 초기 밀교의 선구적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후대 자장과 명랑에게 계승되어 고대 밀교 사상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밀교 사상을 중앙집권에 활용한 자장(慈藏)

선덕여왕 12년(643) 신라에 돌아온 자장은 대국통에 임명되어 승니의 모든 규범을 주관하였다. 불교계의 통합을 통한 왕권 강화와 국가통치를 위한 선진문물의 정립 그리고 신라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대승불교 활동에 노력하였다.

이런 활동 외에도 그는 황룡사에 9층탑을 건립할 것을 선덕여왕에게 청했다. 왕은 여러 신하와 일을 논의하여 시행하였다. 그런 황룡사 9층탑은 이간 용춘(龍春)이 건립 책임자를 맡아 선덕여왕 14년(645)에 완성하였다.

자장의 황룡사 9층탑 건립은 안홍의 영향이었다. 현재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는 황룡사 9층탑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에 여자가 왕위에 오르니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기 때문에 아홉 나라가 침범한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로 인한 재난을 진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황룡사 9층탑에 관련한 예언 일부가 전해지고 있는 안홍의 저술 《동도성립기》를 가탁해서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황룡사 9층탑은 이런 호국적 의식에 진신사리 신앙이 더해져 건설되었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진신사리에 대한 공덕이 강조되었다. 대승 경전에서도 사리를 탑묘에 봉안하여 공양할 것을 설한 것도 공덕설에 입각한 것이다. 이런 사상은 밀교 경전에 이르면 사리탑의 호국적 주력으로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그런 사상적 배경에서 건설된 황룡사 사리탑이었지만 당시 미묘한 정치적 관계로 인해 9층탑은 선덕여왕과 자장의 의도대로 왕실을 위한 지지처가 되지 못했다. 세력이 커진 귀족들은 왕이 곧 부처라는 자장의 진신상주사상(眞身常住思想)은 수용하기 어려운 이념이었다. 오히려 삼국 항쟁의 막바지에서 능력과 힘을 바탕으로 하는 실리적인 중앙 제도가 절실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진신상주사상을 제시하고 총괄하였던 자장은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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