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감은사지,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경주 감은사지,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무왕의 통치와 서원

문무왕은 불교의 이념을 받아들여 고구려를 물리치고 당나라의 야욕까지 막아낸 현명한 군주였다. 무엇보다 충언(忠言)하는 신하들의 견해를 사심 없이 받아들였다. 삼한을 통일한 문무왕은 왕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경주 외곽에 성을 쌓으려고 하였다.

문무왕은 즉위 초부터 토목 공사를 많이 하였다. 천은사(天恩寺) 서북쪽 산 위와 남산에 쌀과 병기를 저장하기 위해 길이가 50보, 넓이가 15보인 장창(長倉)을 설치하였다. 둘레가 2850보가 되는 남산성(南山城) 보수, 그리고 3년 동안 부산성(富山城) 축성, 안북하(安北河) 가에 철성(鐵城) 축성 등 국가적인 토목 공사가 연이어 진행되는 탓에 백성들의 불만이 높았다.

경주 외곽에 성을 쌓겠다는 소식을 들은 의상 법사가 문무왕에게 글을 보내 아뢰기를,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땅 금을 그어서 성으로 삼아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가히 재앙을 씻어서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조언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공사를 중지하여 백성들의 노역을 덜어주었다. 통일 이후에도 그런 기조는 계속되어 문무왕 9년(669) 신혜(信惠) 법사, 14년(674) 의안(義安) 법사를 대서성(大書省)에 임명하고 국정 전반에 대해 자문 받았다.

문무왕은 어려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불교의 힘으로 극복하였다.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고 하자 의상 대사가 급히 귀국하여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대비할 시간이 부족하여 명랑 법사를 불러 불교의 힘으로 타개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명을 받은 명랑은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으로 당의 군사를 물리쳤다.

문무왕은 나라를 다스릴 때도 철저하게 불교사상을 근본으로 하였다. 통일을 이룬 후 전쟁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였다. 긴요하지 않은 세금과 민생에 불편한 법령을 고치거나 폐지하여 백성을 위한 법령이 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집집마다 재물이 넉넉하고 풍족하여 민심이 안정되었다. 그러자 나라 안의 근심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문무왕의 통치관은 부처님 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전륜성왕 사상을 실현한 것이다. 그런 문무왕의 신앙으로 불교는 백성을 다스리는 치국의 이념으로 자리하였고, 나아가 신라 번영의 토대가 되었다.

문무왕 재위 기간 가장 큰 골칫거리는 신라의 해안을 침입해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왜구였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평소 지의 법사(智義 法師)에게 “짐은 죽은 뒤에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 말할 정도였다. 법사가 말하기를, “용이란 축생보(畜生報)가 되는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되었다.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되는 것이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 하였다.

그런 뜻을 품었던 문무왕은 신라 동쪽 해역을 자주 침범하는 왜구를 진압하기 위해 진국사(鎭國寺)라는 사찰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불교의 가르침으로 외세를 진압하고 나라를 지키며 백성을 보호하겠다는 진호국가사상(鎭護國家思想)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유훈에 따라 화장 후 동해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그곳이 지금의 대왕암이다. 아들 신문왕이 절을 낙성한 후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로 바꿨다.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은 감은사 주변에 나타났다. 후에 사람들이 용이 나타난 곳에 정자를 세우고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 그 이름은 주역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利見大人)’ 즉 용이 하늘에 있으니 나라에 큰 인물이 나온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죽어서까지 신라를 위해 헌신하는 문무왕의 서원이 감동적이다.

신문왕의 감은사 사랑

신문왕은 신라 제31대 왕으로 이름은 정명(政明)이다. 681년 7월 7일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문무왕이 완성하지 못한 진국사를 682년 낙성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신문왕은 감은사를 완성할 때 호국의 용이 된 아버지 문무왕이 법당을 들러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대왕암에서 대종천을 따라 감은사 앞까지 온 용이 법당에 들어올 수 있도록 금당 섬돌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었다. 법당 밑은 이중의 방형 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 놓은 다음, 그 위에 큰 장대석을 마루를 놓듯이 깔고, 다시 그 위에 초석을 놓아 금당의 바닥에서부터 일정한 높이의 공간을 만들었다. 이는 용이 들어와서 머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신문왕은 아버지의 흔적이 많은 감은사를 특별히 아꼈다. 동서 양쪽으로 가장 높은 쌍탑을 세웠으며, 국가적인 관리를 위해 사성전(寺成典)을 설치하였다. 사성전은 신라 왕실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에 둔 기구였다. 이곳에는 금하신(衿荷臣) 1인, 상당(上堂) 1인, 적위(赤位) 1인, 청위(靑位) 2인, 성(省) 1인 그리고 사(史) 2인의 관원을 임명하였다. 모든 사찰이 똑같지 않고 사찰 규모에 따라 다소 달랐다. 파견된 사람들이 관원인 것으로 보아 왕실의 중요한 사찰은 직접 관리한 것을 알 수 있다.

신문왕은 국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감은사를 찾았다. 이때 역시 왜구의 침탈은 골칫거리였다. 이를 타개할 방안에 골몰하던 682년 5월 초하루 해관(海官) 파진찬(波珍湌)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에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서 왔다 갔다 합니다” 하였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에게 점을 치도록 하였다. 그가 아뢰기를, “돌아가신 부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또 김유신도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어주려 하시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시면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큰 보배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그달 7일 이견대로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보면서 사자를 보내 살펴보도록 하였다. 산의 형세는 거북의 머리 같고, 그 위에는 한 줄기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사자가 와서 그것을 아뢰니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보답하였다. 그리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은 갑자기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신문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17일에 기림사(祗林寺)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이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라고 하셨다. 태자가 아뢰기를, “쪽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보면 아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왼쪽의 둘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 뒤로 그곳의 연못을 용연(龍淵)으로 불렀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만 가지 파도와 같은 근심을 멈추게 하는 피리였다. 신문왕은 이를 월성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고 외적의 침입과 역병의 창궐 그리고 날씨가 좋지 않을 때 이 피리를 불었다. 그러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였으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만파식전의 신이로움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신문왕을 이어 즉위한 효소왕(孝昭王)은 692년 9월 대현(大玄) 살찬(薩喰)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國仙)으로 삼았다. 그를 따르는 낭도가 천 명이었는데 그중에서 안상(安常)과 친하였다. 693년 3월 낭도들을 거느리고 강원도 지역으로 출병하였으나 북쪽 이민족에게 붙잡혔다. 안상이 그를 구하러 따라갔으나 함께 붙잡혔다.

때마침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었다. 왕은 더욱 놀라고 두려워서 사람을 시켜 조사해보니 창고 안에 있던 거문고와 피리 두 보물이 없어졌다. 왕은 관리를 문책하고 피리를 찾는 자에게 1년의 조세를 상금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5월 부례랑 부모님이 백율사 대비상 앞에 나아가서 여러 날 저녁 천제에게 기도를 드렸더니, 갑자기 향탁(香卓) 위에 거문고와 피리 두 보물이 놓여 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도착해 있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신이한 스님의 도력으로 안상과 함께 피리를 둘로 쪼개어 타고 온 것이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두 사람을 맞아들이고 거문고와 피리도 대궐 안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리고 백율사에 많은 재물을 시주하고 국내에 크게 사면령을 내렸다. 6월 혜성이 나타나자 일관(日官)의 제안대로 피리를 만만파파식(萬萬波波息)이라고 책호(冊號)하니 혜성이 이내 물러갔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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