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된 개성 영통사 전경. 사진 제공 천태종 광수사.
복원된 개성 영통사 전경. 사진 제공 천태종 광수사.

해방 이후 북측 사찰로는 동쪽의 금강산 신계사와 서쪽의 개성 영통사가 유명하다. 두 사찰은 각각 2005년 10월과 2007년 10월에 남북 공동으로 복원됐다. 신계사는 북측 조선불교도련맹(이하 조불련)과 남측의 조계종, 영통사는 천태종이 복원한 사찰이다.

6세기 초 창건되어 1951년 6월에 소실된 외금강산 신계사와 다르게 개성 영통사는 1027년 창건된 이후, 16세기 말에 발발한 7년 전쟁(임진왜란) 때 소실되면서 그 명성도 함께 사라졌다.

개성 오관산의 웅장한 산악미와 조화된 계곡미, 울창한 수림미의 아름다움을 가졌던 영통사는 1799년 편찬된 《범우고》에 따르면 “동서로는 약 150칸, 남북으로는 약 80칸이나 되는 대규모 사찰이었다.”고 했다. 이것은 1592년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년 전쟁 이전의 가람 모습이다. 그 후 1901년 5월 화재로 다시 소실된 영통사는 터가 개인 집과 농지로 전용되는 등, 백 년 동안 ‘숲 풀에서 잠자는 유적’이라 불렸다.

천 년 전, 중국 송나라 서긍이 본 개경의 모습은 《고려도경》에 자세히 묘사됐다. 개성에는 왕궁에 필적할만한 규모의 사찰도 10곳이 넘었다고 했다. 고려 황궁인 개성 만월대 등과 마찬가지로 오관산 영통사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영남 사림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은 1478년 《유송도록》에서 “쌓은 것은 500년을 쌓아도 부족하였고, 허무는 것은 하루 만에 헐고 남음이 있었다.”라고 고려 도읍지의 흥망성쇠를 회고했다.

고요히 잠들었던 유적은 1997년 가을에 다시 깨어났다. 북측의 ‘령통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 유적을 일깨웠고,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그 유적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판문점 남북출입사무소에 근무하는 북측 군인들까지 경제협력이라 평가하는 개성 영통사의 복원과정과 완공에 이르기까지 뒷이야기를 살펴본다.

개성 영통사, 비원의 이력

‘기록의 나라’로 불리는 고려와 조선에서조차 영통사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부엉이가 울었다.”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기록했는데, 고려왕과 명나라 사신까지 다녀갔던 영통사에 대해 한 줄의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것은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고려 현종의 왕명으로 1027년 창건된 오관산 영통사는 고려 왕실의 원찰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도 창건과 폐사에 관한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1215년 각훈 대사가 왕명으로 편찬한 《해동고승전》 권제1에는 “1027년(현종 18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946년 원공 국사 지종이 17세 때 영통사 관단에서 수계를 받았다.”거나, 또 법상종의 고승 혜소 국사 정현이 “980년대 영통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덕 국사 난원이 영통사에서 수도하였으며, 왕명으로 문종의 넷째 왕자 후를 승려가 되게 하여 화엄교관을 가르쳤다.”라는 기록을 볼 때, 영통사는 11세기 초에 이미 대찰로 자리했다.

고려 왕 씨 가문의 원찰인 영통사는 오관산 아래 마하갑(摩訶甲) 일대의 사찰을 통괄하는 사찰로 1027년에 창건 또는 중창됐다. 이 시기에 본격화된 《초조대장경》의 판각과 인쇄 작업에 따른 고급인력과 종이 제조에 필요한 노동력의 수급, 닥나무 등 원자재 공급이 원활한 곳으로 선정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므로 영통사는 제8대 고려 현종의 비원이 서린 사찰이라 할 수 있다.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의천 열반다례재. 사진 제공 천태종 광수사.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의천 열반다례재. 사진 제공 천태종 광수사.

그 후 1065년 5월 14일 대각 국사 의천이 영통사에 출가하면서 고려 왕실은 다른 어떤 사찰보다 많이 이 절을 찾았다. 왕실 주관의 재나 기신도량 등이 이곳 영통사에 개설됐다.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 국사가 1101년 10월 5일 입적하자 2년 뒤에는 영통사 서북쪽에 제사 지낼 사당으로 쓴 경선원이 완공됐다. 이곳에 국사의 부도를 만들어 동쪽 석실에 모셨던 유골을 이장하면서 영통사는 대가람으로 변모했다.

조선 세종 때는 교종 18개 사찰 중 한 곳으로 지정됐고, 거주 승려는 100명만이 허용되었다. 또 성종 때에는 수륙사로 지정됐다. 1502년 박은의 《읍취헌유고》에는 영통사에 스님들이 살고,흙다리를 고쳤다고 했으며, 1510년대 김안로의 《희락당고》에서는 파괴된 절을 다시 세웠다고 했다. 16세기 이행은 《천마록》의 시에서 “옛 절은 퇴락하여 풀들만이 밝힌다.”라고 했다. 하지만 1554년 주세붕이 《무릉잡고》에서 “밤새도록 서쪽 누방에 베개를 누이다.”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영통사에는 전각들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영통사의 후신인 흥성사는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이전까지 고려 때의 위용은 아니더라도 중수와 보수가 여러 차례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1671년 김창협이 쓴 《농암집》 <송경유람기>에는 “이 절은 옛 송경의 대가람으로,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건물이 열 중에 두셋 정도만 남아 있다. 뜰에는 세 기의 석탑이 서 있고 문밖에는 고려시대 승려 의천의 비가 서 있는데, 중간 이하는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 없다. 채수가 《유송도록》에서 매우 칭찬한 명승지 서루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다.

표암 강세황은 1757년에 그린 《송도기행첩》 <영통동구> 그림에서 절로 들어가는 입구의 경관만을 그렸다. 표암이 이곳을 방문할 즈음 영통사는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는 당나귀를 탄 선비와 하인 두 사람, 중량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상징처럼 그려 놓아 이채롭다.

1998년과 1999년 두 해에 걸쳐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일본 다이쇼(大正)대학이 공동으로 추진한 영통사 유적 발굴조사에서는 명나라 세종의 연호로 쓰인 ‘가정 43년’이 찍힌 수막새가 출토됐다. 이로써 영통사는 적어도 1564년 명종 때까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71년 김창협이 <송경유람기>에서 “두세 채의 건물이 있을 뿐, 송도제일의 서루(西樓)가 남아 있지 않고, 석재 유물이 남아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영통사가 폐사된 것은 화재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임진·정유재란 때 가람 대부분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2005년 발간된 북측 자료에 의하면 “1901년 5월 화재로 사찰이 전소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고려 중기 때 규모라기보다 1, 2동 남아있던 전각이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이던 1939년 촬영된 흑백사진에서도 사찰 건물로 추정되는 한옥 기와집 몇 채를 판독할 수 있다.

12세기 대각국사 의천의 지하궁전으로, 개경의 으뜸 사찰이던 영통사는 10세기에 개창, 11세기에 창건되어 500년 넘게 고려와 조선의 불교를 이끈 개성 땅의 명찰이었다. 조·왜의 7년 전쟁으로 파괴된 이후, 영통사의 명맥은 산재한 유적지 유물처럼 흩어지고 잊혔다.

복원 공사 중인 개성 영통사. 사진 제공 천태종 광수사.
복원 공사 중인 개성 영통사. 사진 제공 천태종 광수사.

남북 서해루트의 통일 성전

개성 영통사는 고구려와 고려의 전설이 깃든 개성직할시 용흥동에 있다. 고구려 때 ‘크고 깊은 골짜기’라는 뜻의 마하갑으로 불렸다. 이곳은 승려가 계를 받던 마하갑사가 있던 절골이다. 고려 때 영통골은 고려 왕 씨의 집성촌으로, 고려 건국신화가 탄생한 성소이다. 북측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2002년 9월 발간한 《영통사유적발굴보고》에 보면, “영통사는 우리 민족사에서 첫 통일국가로 등장한 고려의 이름 있는 절간의 하나다. 고려의 숭불정책의 역사적 배경에서 세워진 절 건물 중의 하나다. 또 고려 천태종의 시조 대각 국사 의천의 사적이 깃들여 있는 절”이라고 했다.

5개 산봉우리가 관 또는 갓처럼 생겼다고 붙인 오관산은 보관을 쓴 산이란 의미로 관모산이라 부른다. 이 산의 동남쪽에 자리한 영통사는 1901년 5월부터 ‘수풀에 묻힌 절터’가 됐다. 농토와 나대지로 있던 영통사 유적은 1997년 가을에 조·일 공동조사팀〔북측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일본 다이쇼대학 불교연구소,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약칭 조선총련, 조총련) 고고학협회〕이 현지답사를 진행하며 문화·학술적 온기를 불어넣었다. 북측의 고고학연구소에서는 작고한 소장 한인호, 실장 김종혁, 연구사 리창언을 비롯한 학술연구 성원들과 발굴대원이 참가했으며, 일본 다이쇼대학 종합불교연구소에서는 사이토 다다시 명예교수, 다다 고분 불교연구소 소장대리, 전호천 조총련력사고고학협회 회장을 비롯한 연구 성원들이 참가했다. 이러한 발굴조사는 1997년 9월 중순, 평양에서 북측 사회과학원과 조총련이 ‘개성 영통사지 발굴조사 협력사업에 관한 각서’를 체결하면서 이뤄졌다.

개성 영통사지 발굴조사는 해방 이후 일본 측과 학술 협력한 첫 사업이다. 그 후 영통사 유적발굴조사는 북측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평양건설건재대학 건축사연구실을 중심으로, 1998년 4월 중순부터 1999년 10월 중순까지 4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리고 2000년 봄과 가을 두 차례의 보충 발굴이 이루어지고, 2005년 10월 31일 영통사는 남북 공동 사업을 통해 완성됐다.

남북 협력사업의 모델인 영통사는 고려 천태종을 창종한 대각 국사 의천이 출가한 사찰이자 열반지(涅槃地)다. 이곳에 대한 복원계획은 1998년 5월경, 영통사 터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일본 다이쇼대학의 제안을 받은 조총련 부의장 겸 동경도위원회 위원장 김수식과 재일교포 최준이 국내로 들어와 남측 천태종(당시 전운덕 총무원장)에 처음 의향을 전하면서 시작됐다.

개성 영통사 복원 낙성법회. 사진 제공 천태종 광수사.
개성 영통사 복원 낙성법회. 사진 제공 천태종 광수사.

이때 천태종단에서 제의한 영통사 방문은 2000년 11월 21일부터 25일까지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이 초청장을 보내 확정 추진됐다. 그 당시에 덕수 천태종 총무부장을 단장으로 경천 교무국장 등 종단과 신도대표, 학계 교수 등 13명이 중국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 개성으로 이동하여 2000년 11월 23일 영통사 터를 처음 방문했다. 이런 사실은 김무원 천태종 사회부장의 《개성 영통사 복원 지원 과정에 관한 연구》 논문에 수록됐다.

2000년 11월 북측의 문화보존지도국과 조선경제협력위원회 산하에 ‘개성령통사복원추진위회’가 처음 구성됐다. 리의화 문화보존지도국 국장, 김성철 조선경제협력위원회 국장, 최경철 과장 등이 실무사업을 맡았으며, 심상진 조불련 부위원장 등이 복원사업의 가교를 담당했다. 개성령통사복원추진위회 위원장인 김세민 사회과학원 부원장, 오학성 책임부원과 영통사 발굴현장 책임자로 리창언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중세고고학실 연구사, 최명근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추처장, 일본 조총련 부위원장인 김수식 도쿄위원장, 국제관계 조일남 부국장 등이 사업회의에 참가하고 당국과 협의를 진행했다.

그 다음, 2003년 2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 등이 참석한 남북불교 회의에서 실무 합의한 후, 그해 4월 3일 베이징에서 조선경제협력위원회 국장 김성철 령통사복원추진위회 사무국장, 최경철 참사 등과 남측의 천태종 김무원 사회부장 등이 ‘개성 영통사 복원에 관한 약정’에 최종 합의했다. 같은 해 10월 17일을 기해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개성시에 위치한 영통사 복원을 위한 공동사업 실행에 그간에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하여 인력 및 물자 수송을 육로를 통하여 운행 전에 있어 운송협약을 합의한다.”라는 ‘운행합의서’를 체결했다.

2003년 10월부터 시작된 복원사업 기간에는 육로 방북 16회에 걸쳐 천태종 스님 69명과 종단 실무자 83명, 대한통운 운송기사 155명 등 연인원 307명의 인적 왕래가 이루어졌다. 기와 약 46만여 장, 단청재료 3000세트, 중장비 차량 7대, 조경용 묘목 1만 그루, 비닐 자재 100톤, 각종 건축 마감재 등을 남측 천태종이 지원했다. 북측에서는 건축 인력과 기술자, 장비와 시멘트, 모래, 철근 등 건축자재를 투입하여 약 3년에 걸쳐 29채의 전각을 완공했으며, 3기의 고려 석탑과 6채의 건물은 1200여 평의 경내 중앙 회랑에 들어섰다.

북측 《조선중앙방송》 등에서도 여러 차례 보도한 바 있는 영통사 발굴조사와 복원사업은 대각 국사가 열반한 직후인 1113년에 중창된 건축양식을 기본모델로 하여 총 4만 평의 부지에 기본사찰, 동북쪽 무덤, 서북쪽 건축지구 등 세 구역으로 나누어 진행됐다. 고려 시대의 사원 건축기법에 따라 총 건축면적 2800여 평에 이르는 기존의 절터에다 전각 29동과 3기 석탑, 대각국사비, 돌다리를 복원했다.

2005년 10월 31일 오전 11시 개성 영통사에서 대한불교천태종과 조불련 중앙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준공 낙성식이 열렸다. 건축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인 낙성식(落成式)에는 북측 불교도 200명과 남측 300명이 참가했다. 분단 이후, 최대 규모의 인파가 한자리에 모인 이날 낙성법회 후에는 남북 학자들이 영통사 복원의 역사적 의의에 관한 남북 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2008년 이후 남북 관계의 경색에도 불구하고 2015년 11월 3일까지 대각국사 의천 다례재 등 남북공동 행사는 거의 매년 봉행되었다.

그러나 경색된 남북 관계에 이은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 여파로 북녘으로 가는 길은 닫혀 있다. 다시 남녘에서 불어온 봄기운은 스며들었지만, 인기척은 들리지 않는다. 평화의 제도화를 함께 만드는 곳인 DMZ과 판문점이 분주해지면, 한반도 서쪽 루트의 통일 관문이 다시 열릴 것이다. 남북이 하나 되어 경제와 번영을 일궈가는 개성공단이 재가동되는 날, 사람들은 개성으로, 대각 국사 의천의 꿈이 서린 영통사의 통일 성전에서 법향 가득한 만남을 이룰 것 같다.

이지범 | 북한불교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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