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의 중심도량 월정사. 자장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불교저널 자료사진.
오대산의 중심도량 월정사. 자장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불교저널 자료사진.

중국에서 문수보살을 만난 자장

당나라에 간 자장은 청량산(淸凉山)을 찾아갔다. 그곳에 만수대성(曼殊大聖)의 소상이 있었다. 중국인 사이에는 제석천이 석공을 이끌고 와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자장이 소상 앞에서 기도하였다. 밤에 소상이 정수리를 쓰다듬고 범게(梵偈)를 주는 꿈을 꾸었다. 내용을 몰라 궁금해 하는데 다음날 노승이 와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 주었다.

“가라파좌낭(呵囉婆佐囊)은 일체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㘑哆佉嘢)는 자성이 가진 바 없다는 말이요, 낭가사가랑(曩伽呬伽曩)은 법성을 이와 같이 해석한다는 말이요, 달예노사나라(達㘑盧舍那)은 즉 노사나(盧舍那)를 본다는 말이외다.”

말을 마치자 노승은 가지고 있던 가사 등 물건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그대의 본국 동북방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이 있고, 1만 문수보살이 항상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친 노승은 곧 사라졌다. 그 후 자장이 영험 있는 유적을 두루 찾아보고 고국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태화지 용이 나타나 재(齋) 지내주기를 청하였다. 7일 동안 공양하자 용은 자장에게 옛날 게송을 해석해준 노승이 바로 문수보살이라고 알려주었다.

신라에서 문수보살을 만난 자장

정관 17년(643) 구법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은 오대산으로 가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하였으나 3일 동안 날씨가 어두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선덕여왕이 스님을 중용하여 대국통(大國統)이 되었다. 승니(僧尼)의 일체 법규를 주관하는 기회로 여기고 과감히 나서 불교를 널리 퍼뜨렸다. 이때 나라의 사람들이 계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것이 열 집에 여덟아홉이었다. 출가하려는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다.

선덕여왕을 도와 신라불교를 발전시킨 자장은 대국통에서 물러난 후에야 강릉부(江陵府) 오대산으로 갈 수 있었다. 태화지에서 만난 노승의 말대로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 수다사(水多寺)를 창건하고 살았다. 이상한 스님이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중국 오대산 북대(北臺)에서 본 모습과 같았다. 노승은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놀라서 깨어나 아침 일찍 대송정에 가니 과연 문수보살이 온 것에 감응하여 법요(法要)를 물었다. 문수보살은 다시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사라졌다.

태백산으로 옮긴 자장은 큰 구렁이가 나무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시종에게 이곳이 갈반지라고 말하였다. 그곳에 석남원(石南院)을 창건하고 문수대성이 올 것을 기다렸다. 어느 날 늙은 거사가 남루한 방포(方袍)를 입고 칡으로 엮은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고 와서 시종에게 자장을 보려고 왔다고 말하였다.

시종은 말하기를 “스승님을 받들면서부터 아직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보지 못했는데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미친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거사는 “다만 너의 스승에게 알리기만 해라.”라고 하였다. 마침내 들어가 알리니 자장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말하였다. “아마 미친 자인가 보다.” 시종이 나가서 그를 내쫓으니 거사가 “돌아간다. 돌아간다.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삼태기를 뒤집어 터니 개가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변하였다. 거사는 거기에 올라타고 빛을 발하며 사라졌다.

자장이 그것을 듣고 비로소 예법에 맞는 몸가짐을 갖추고 빛을 찾아 남쪽 고개로 쫓아 올라갔다. 거사의 자취는 이미 묘연하여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자장이 그곳에 쓰러져 죽자 유골을 다비하여 굴속에 안장하였다.

자장 이후 정립된 신라의 오대산 신앙

자장이 입적한 후 정신대왕(淨神大王;신라 신문왕)의 태자 보천(寶川), 효명(孝明) 두 형제는 속세를 떠날 뜻을 은밀히 약속하고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숨었다. 호위하던 자들이 주변을 살폈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두 태자가 산속에 머물며 정진하는데 푸른 연꽃이 문득 땅 위에 피었다. 형인 보천 태자가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살면서 보천암(寶川庵)이라고 하였다. 동북쪽을 향하여 600여 보를 가니 북대(北臺) 남쪽 기슭에도 푸른 연꽃이 피었다. 아우인 효명 태자도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 두 사람은 각기 부지런히 정업을 닦았다.

하루는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가 우러러 배례하니, 동대인 만월산(滿月山)에 1만 관음보살의 진신이 나타나고, 남대인 기린산(麒麟山)에 팔대보살을 수위로 한 1만 지장보살, 서대인 장령산(長嶺山)에 무량수여래를 수위로 한 1만 대세지보살, 북대인 상왕산(象王山)에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수위로 한 500 대아라한, 중대인 풍로산(風盧山)에 비로자나(毘盧遮那)를 수위로 한 1만 문수보살의 진신이 나타났다. 형제는 오만 진신에게 일일이 우러러 예배하였다. 문수보살은 매일 이른 새벽에 36가지 모양으로 변신하여 나타났다.

정신대왕이 서거하자 신하들이 장군 네 사람을 산으로 보내 두 왕자를 맞아오게 하였다. 보천은 울면서 굳이 사양하였다. 결국 효명이 명을 받들 수밖에 없었다. 궁궐로 돌아가 즉위한 효명은 나라를 다스렸다. 몇 해가 지나자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진여원(眞如院; 지금의 상원사)을 개창하였다.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당 안에 모셨다. 지식(知識) 영변(靈卞) 등 다섯 명을 두고 《화엄경》을 전독하는 화엄사(華嚴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공양할 비용을 두고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랐다.

또한 보천암을 화장사(華藏寺)로 고치고 오대의 본사(本寺)로 삼았다. 국왕이 천추를 누리고, 백성은 평안하고 문무는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할 것을 기원하기 위해 행실이 정결한 복전승에게 명하여 향화(香火)를 받들게 하였다. 또 하원(下院)의 문수갑사(文殊岬寺)를 더 배치하여 여러 사(社)의 도회소(都會)로 삼고 복전승 일곱 명을 두고 밤낮으로 늘 화엄신중 예참을 행하였다. 그리고 재에 드는 경비와 의복의 비용은 하서부의 도내 8주(州)의 세금으로 네 가지 일의 자금에 충당하였다.

오대산에 남은 보천은 항상 그 신령한 골짜기의 물을 길어 마셨으므로 만년에 육신이 허공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에 이르렀다. 그곳에 머물며 수구다라니(隨求陁羅尼)를 외우는 것을 낮과 밤의 과업으로 삼았다. 어떤 때는 문수보살이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기별(成道記莂)을 주기도 하였다. 보천이 바야흐로 입적하는 날 후일 산중에서 행할 국가에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오대산은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로서 각 대(臺)는 불보살의 진신이 항상 머무는 땅이다. 청색[방]은 동대의 북각 밑과 북대의 남쪽 기슭 끝에 있으니 관음방을 두어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1만 관음상을 그려서 봉안하고, 복전 다섯 명을 두어 낮에는 8권의 《금광명경》, 《인왕경》, 《반야경》, <천수주>를 읽고, 밤에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하며 이름을 원통사(圓通社)로 한다.

적색[방]인 남대 남면에 지장방을 두고, 원상의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8대 보살을 수위로 한 1만 지장보살상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승 다섯 명이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염송하며 이름을 금강사(金剛社)로 한다.

백색[방]인 서대 남면에 미타방을 두고 원상의 무량수불과 흰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수위로 1만 대세지보살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승 다섯 명이 낮에는 8권의 《법화경》을 읽고, 밤에는 미타예참(彌阤禮懺)을 염송하며 이름을 수정사(水精社)로 한다.

흑색[방]인 북대 남면에 나한당을 두고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수위로 500나한(羅漢)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승 다섯 명이 낮에는 《불보은경》과 《열반경》을 읽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염송하며 이름을 백련사(白蓮社)로 한다.

황색[방]인 중대의 진여원 중앙에 진흙으로 빚은 문수보살과 뒷벽에는 노란 바탕에 비로자나불을 수위로 한 36가지로 변화하는 모양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승 다섯 명이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염송하며 이름을 화엄사(華嚴社)로 한다.

보천암을 화장사로 고쳐 세우고 비로자나 삼존과 대장경을 봉안하였다. 복전승 다섯 명이 대장경을 항상 열람하고, 밤에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하였다. 매년 화엄회(華嚴會)를 100일 동안 베풀며 이름을 법륜사(法輪社)로 한다.

이처럼 자장에서 시작해 보천, 효명 때 완성된 신라 오대산 신앙은 중국 오대산처럼 불보살의 성지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나아가 이곳이 불보살들이 상주하는 불국토이며, 그 위신력으로 신라의 발전과 백성의 편안함을 기원한 신앙이었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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