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의향서 체결(2002.12.22. 중국 베이징, 조불련 황병준 부위원장·한성기 국제부장과 조계종 양산 사회부장·지일 민추본 조직국장)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의향서 체결(2002.12.22. 중국 베이징, 조불련 황병준 부위원장·한성기 국제부장과 조계종 양산 사회부장·지일 민추본 조직국장)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외금강산에 목탁 소리 켜다”

흔히 금강산이라면 내금강을 가리킨다. 휴전선 북쪽의 금강산은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뉜다.

금강, 봉래, 풍악, 개골 등 네 가지로 알려진 산 이름은 문헌적으로 열세 가지 별칭이 쓰였다. 상악, 풍악, 개골, 설봉, 해악 등 자연 계통이 다섯 가지이고, 금강, 기달, 지달, 열반, 중향성, 수미산 등 불교 계통이 여섯 가지였다. 또 봉래, 선산 등 도교 계통이 두 가지였다.

신라 때부터 불렀던 ‘상악’은 《삼국사기》에 처음 나온다. “산 모양이 서릿발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7세기 말, 중국 당나라에까지 알려진 금강산의 이름은 《신역화엄경》 <제보살주처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동북방 청량산 다음에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다. 그곳에 법기보살이 거처하며 1200명(구역 《화엄경》에는 1만 2000명)의 권속과 더불어 머물러 있으면서 설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금강산의 유래는 모두 이 경전을 인용하게 됐다.

1454년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풍악(楓岳)이라고도 하고, 개골(皆骨)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의 산수(山水)가 천하에 이름났는데, 이 산의 천만 봉우리는 눈처럼 서서 높고 절묘함이 으뜸이며, 또 불서(佛書)에 담무갈보살(曇無竭普薩)이 머무르던 곳이란 말이 있어서 인간의 정토(淨土)라 이른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중국 사람들이 ‘고려국에 나서 친히 금강산 보기를 원한다.’고 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 개골, 열반, 풍악, 기달의 다섯 가지 이름이 처음 기록됐다.

조선 초기부터 공식 기록된 금강산은 꽃과 새싹이 온산을 뒤덮는 봄 이름이다. 녹음이 짙게 드리우는 여름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 가을에는 일만 이천 봉우리가 단풍으로 물들므로 풍악산,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바위가 앙상하게 드러나서 개골산이라 불렀다. 산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 개골산은 달리 열반산으로도 불렸다.

예로부터 금강산에는 “일만 이천 봉에 팔만 구 암자(八萬九庵子)가 있다.”고 했다. 봉우리의 수는 비슷할지라도 ‘팔만 구 암자’는 낭설이다. 후대에 ‘팔만 구 암자’로 와전된 팔방구암자(八方九庵子)는 “한 사찰을 중심으로, 여덟 방면으로 아홉 개의 암자를 둔다”는 뜻이다. 이 전설은 600년에 백제의 관륵과 융운 대사가 내금강 도솔봉(천일대의 옛 이름) 산허리에 팔방구암을 짓고 ‘정양’이라 이름 붙인 데서 생겨난 말이다. 통도사와 해인사, 송광사 등 총림 사찰의 위상을 나타내는 말이 사찰 개수로 바뀐 것이다. 팔방보다는 발음상 분명하게 들리는 팔만이 민요 가락으로, 이야기로 전해지면서 생긴 이야기이다.

내금강산과 달리 외금강산은 7세기 중엽 신라가 진출하면서부터 기록됐다. 통일신라에서 고려,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구룡연 폭포와 만물초(만물상의 옛 이름), 삼일포와 해금강, 총석정 등이 기록됐다. 분단 이후 기록은 2002년 12월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의향서’ 체결로 공식화됐다. 이번 호에는 남북불교 교류의 정점을 찍은 금강산 신계사 공동 복원에 대한 뒷이야기를 알아본다.

외금강 신계사 복원 착공식

외금강은 주능선이 동쪽으로 동해안과 잇닿아 있는 지역이다. 수많은 계곡과 바위 준봉들의 웅장하고 기 센 모양새가 남성적인 외금강은 만물상, 구룡연, 삼일포, 해금강 구역이 대표적인 명승이다. 흙산이어서 산세가 부드럽고 여성적인 서쪽 지역은 내금강이라 부르며, 만천·만폭·백운대 구역 등이 대표적인 경승지다.

외금강을 대표하는 사찰은 신계사와 발연사 등이다. 519년 신라의 보운 조사가 개창한 신계사는 643년 신라 김유신 장군의 원찰로 중창되었고, 679년 신라 왕실 지원으로 외금강의 대찰이 됐다. 그로부터 1929년 2월까지 중수와 중창을 거듭한 신계사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6월, 미 공군의 폭격으로 모두 전소됐다.

통일신라 진표 율사의 ‘계림(戒林)’이라고 일컫던 발연사는 766년에 창건된 후, 1800년경 산불 화재로 전소됐다. 발연사 홍예교는 1199년 축조된 것으로, 금강산에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외금강산 신계사는 1825년 남경 지환 대사가 지은 《금강산신계사사적》과 1942년 승려 김탄월이 지은 《유점사본말사지》에 5전 4각 1루, 10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해방 이후에는 1949년 외금강박물관 또는 금강산특수박물관으로 지정되면서 전통사찰 기능을 잃었다. 1998년 3월 14일 중국 베이징에서 남측 평화통일불교협회(이하 평불협)와 북측의 조선불교도련맹(이하 조불련)이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이하 아태·평화위원회) 관할 하에 ‘금강산 문화재 복원을 위한 합의서’를 체결하면서 신계사 공동 복원 문제가 처음 논의됐다.

그해 11월 18일부터 금강산관광이 처음 시작되면서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은 남·북한의 주요 현안이었다. 통일부가 평불협의 복원사업에 대해 유보조치를 단행하는 등 남측 내부에서도 설왕설래 됐다. 하지만 1999년 2월 23일 평양에서 현대아산 실무협의단이 북측 아태·평화위원회에 신계사 복원사업을 제안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그 첫걸음은 2002년 12월 22일 중국 베이징 평양관에서 남측 서정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대리한 양산 사회부장과 북측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을 대리한 황병준 부위원장이 각각의 대표자 명의로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의향서’를 협의한 것이었다. 2003년 2월 10일에는 베이징 평양관에서 신계사 복원불사 서명본이 교환됐다. 같은 해 7월 9일 조계종단과 현대아산은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고, 그해 8월 14일 조계종과 조불련은 전문을 주고받으며 세부사항을 점검했다. ① 신계사 복원불사를 조속히 추진할 것 ② 빠른 시일 내에 실무회담을 개최할 것 ③ 서울에서의 실무회담 개최 유무에 대한 조불련 답신 ④ 신계사 복원과 관련해 유관기관의 협조는 남한의 조계종과 북측의 조불련에서 책임지고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10월 21일부터 25일까지 금강산에서 신계사 복원불사를 위한 실무회의를 가졌다. 이를 기반으로 같은 해 11월 9일부터 25일까지 남북 공동 시·발굴조사 및 남북 공동 지도위원회는 신계사지에 대한 기초 시·발굴조사를 실시하고, 대웅전 설계를 위한 기초작업을 진행했다. 또 12월 30일 ‘금강산 신계사 남북공동 시·발굴 보고서’를 발간했다. 한편, 그해 12월 한국불교종단협의회는 남북불교 교류를 위한 북경 연락사무소를 지정하고, 길정태를 소장에 임명했다.

조계종단과 현대아산은 2004년 1월 30일 실행계획서에 합의했다. 3월 18일 조계종단은 조불련과 팩스 전문으로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과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이 서명한 ‘금강산 신계사 복원 리행을 위한 실행계획서’에 합의했다. 같은 해 3월 23일 미산 조계종 사회부장, 현대아산 등은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 정서화 책임부원, 리의화 문화보존지도국 부국장, 한용길 평양건설건재대학 책임교수 등과 금강산 김정숙휴양소에서 실무회의를 가졌고, 그해 4월 6일 낮 12시 금강산 신계사지에서 대웅전 착공식을 거행했다. 목조건축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 위한 첫 삽을 떴다.

또 하나의 관광명소가 된 신계사

전소된지 54년 만에 신계사지에서 열린 공식 법회는 남측의 사회와 집전으로 삼귀의에 이어 반야심경 봉독,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의 개식사, 경과보고 및 봉행사, 북측 리의하 문화보존지도국 부국장의 축사, 불사 축원문 낭독, 남북불교 대표단 30명의 공동 시삽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신계사 복원 1단계 첫 사업으로 대웅전을 그해 11월에 완공하였고, 2007년까지 전체 복원공사를 이루기 위한 착공식이 열렸다. 착공식에는 남측의 보선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종상 불국사 주지, 학담 민족문화추진본부 상임집행위원장, 조계종 미산 사회부장, 탁연 문화부장 등 75명과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 심상련 서기장 등 검은색 장삼에 붉은색 가사를 걸친 10명 북측 승려, 리의하 문화보존지도국 부국장, 금강산관광총회사와 안내원, 조선중앙방송 기자 등 85명이 함께했다.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은 북측 대표로 “북남 불교도들이 문화유물 보존으로 민족적 자부심을 크게 발현하는 애국적 불사를 이뤘다. 6·15 북남 공동선언 실현을 위해 한마음으로 단합하자.”는 인사말을 했다.

남북 공동 복원을 위해 조계종단은 2004년 6월 19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1층 로비에서 ‘금강산신계사복원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추진위원장에 종상 불국사 주지를, 집행위원에 지원 스님과 도각 스님 등을 위촉했다. 신계사 복원불사는 4개년 사업으로 진행됐다.

신계사 복원추진위는 12개 건물 복원을 위한 예산 86억 원 투입, 복원불사 및 발굴의 실무, 불사 기금 마련을 위한 대외홍보, 사업 진행을 위한 남·북한 교류 행정 실무 등을 담당했다. 같은 해 8월 3일부터 25일까지 신계사지 2차 발굴조사와 석탑 해체 작업, 보존처리가 이어졌다. 복원 현장 공사 준비에 이어 현장사무실도 세웠다.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신계사 삼층석탑은 장연사지 삼층탑, 정양사 삼층석탑과 함께 금강산의 3대 옛 석탑으로 불린다. 9월 23일 신계사에서 6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복원 불사 입재식과 위령재를 개최했다. 10월 6일부터 13일까지 공사 일정 등에 관한 금강산 실무회의가 열렸다. 그해 11월 11일에는 제정 스님이 금강산 신계사 불사 도감으로 파견됐다.

2004년 11월 20일 오전 11시에 열린 신계사 대웅보전 낙성식에는 남북의 630여 명이 함께했다. 단산 김재일이 쓰고, 목우 조정훈이 새긴 대웅보전 편액 제막식으로 시작된 이 행사에는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산 조계종 원로의장을 비롯해 이봉조 통일부 차관, 유홍준 문화재청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프랑수아 프랑스 대사, 왁신 태국 대사 등 320여 명과 금강산관광 6주년 기념식 참관단 300여 명이 참여했고, 북측에서는 차금철 조불련 책임부원, 최일람 문화보존지도국 설비보존 차장, 서철민 문화보존총국 책임부원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은 봉행사에서 “신계사 복원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화합과 통일의 초석을 놓는 것”이라고 평가했고, 김법전 조계종 종정은 “대결과 갈등은 화해와 단결로 바뀌고 분단과 단절은 교류와 소통으로 변화하며, 번뇌와 차별은 보리와 평등으로 승화되는구나.”라는 기념 법어를 내렸다. 이때 북측에서는 별도의 메시지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날 대웅보전에 봉안된 불상을 비롯해 신계사 복원공사에 들어간 목재 70여 t과 석재 125t, 기와 1만 3000여 장은 2004년 9월 17일부터 남측이 운송한 자재들이다. 신계사 복원공사는 현지에서 자재를 직접 가공해 지은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모든 작업을 한 뒤 금강산 신계사로 운송해 6개월 동안 ‘조립’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렇게 신계사 대웅전 복원을 시작으로 금강산관광 명소가 또 하나 탄생했다.

신계사, 한반도의 ‘통일바라기 사원’

구한말 ‘봉오동전투’의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은 1890년부터 2년간 신계사에 머물면서 지담 대사로부터 글을 배우고, 역사 의식과 항일정신을 길렀다. 1900년대에 고승 경허 선사는 금강산을 찾아와 《금강산유산가》를 남겼다. 경허 선사는 “신계사의 문을 두드리니 외금강이 절경이다. 집선봉에 가던 구름 바람조차 흩어지고, 문필봉의 묘한 형용 석가세존을 닮았구나. 보광·보운 두 암자는 염불·간경에 알맞은 절이다.”라고 했다. 방한암 선사는 1899년 신계사 보운강당에서 《수심결》 등 경학을 공부했다. 효봉 선사는 1925년 신계사에서 석두 화상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신계사는 1922년 12월 용화전 등이 화재로 모두 불탔고, 1929년에는 만세루 등 11개 전각이 중건되었다. 그해 신도 유경화는 180석의 토지를 신계사 미륵선원에 시주했다. 그 뒤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950년까지 대웅보전, 나한전, 칠성각 등 전각, 대웅전 앞 석탑 1기와 공덕비가 남아 있었다. 마당에 서 있는 보리수 한 쌍은 1947년 9월 경 원산에서 옮겨 심은 나무다.

일제강점기 유점사의 말사였던 신계사는 1949년 박물관으로 지정되면서 ‘금강산특수박물관’으로 명칭이 변경됐는데, ‘신계사특수박물관’으로도 불렸다. 1951년 6월 미군 폭격으로 전소되어 절터만 남은 신계사는 이후 2004년 4월 분단 이래 처음으로 복원불사가 남북 공조사업으로 추진되어 2007년 10월 대웅보전과 만세루, 최승전, 종각 등 11개 건물이 낙성됐다. 2008년부터 주지를 맡은 진각 대사와 2~3명의 부전이 머물렀으며, 남북교류가 멈춘 뒤인 2013년 10월에는 조선정교위원회 러시아 신부 일행이 방문한 바 있다.

금강산 신계사는 입적한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과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 등의 비원이 서려 있는 한반도의 ‘통일바라기 사원’이다.

이지범 | 북한불교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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