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지는 당 군사가 침략하자 호국 밀교의례인 문두루비법을 행하기 위해 임시로 지은 사찰이다. 후에 다시 지었다. 사진 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gyeongju.go.kr/gyeongjuimage).
사천왕사지는 당 군사가 침략하자 호국 밀교의례인 문두루비법을 행하기 위해 임시로 지은 사찰이다. 후에 다시 지었다. 사진 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gyeongju.go.kr/gyeongjuimage).

명랑은 누구인가

명랑 법사는 신라 경주에서 아버지 사간(沙干) 재랑(才良)과 어머니 남간부인(南澗夫人)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소판(蘇判) 김무림의 딸로 자장 스님의 누이이다. 어머니가 청색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꾸고 임신한 후 명랑을 낳았다. 위의 두 형 모두 출가하였다. 큰형은 국교대덕(國敎大德), 둘째 형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다.

《삼국유사》에는 명랑이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에 들어갔다가 정관 9년 을미(635년)에 귀국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명랑의 외숙인 자장이 중국에 간 것이 선덕여왕 5년(636)이고 귀국한 것이 12년(643)이다. 자장과 명랑 사이를 볼 때 나이가 어린 명랑이 자장보다 앞서 중국으로 법을 구하러 가기에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사실로 보기 어렵다.

문무왕 10년(670) 당나라 설방(薛邦)이 침략했을 때 각간 김천존이 왕에게 “근유명랑 법사입용궁 전비법이래(近有明朗法師入龍宮 傳秘法而來)”라 말하였다. 여기서 “근유(근래)”를 35년 전인 635년으로 보기 어렵다. 그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명랑의 귀국은 선덕여왕 때가 아니고 문무왕 초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명랑이 중국에서 불법을 공부하면서 가장 관심을 두었던 분야는 밀교였다. 《삼국유사》 <혜통항룡(惠通降龍)> 조에 명랑의 법을 신인(神印; 문두루비법)이라 말하고 있는 점에서 그가 중국 구법에서 밀교를 배웠음을 알 수 있다. 구법 후 신라로 돌아올 때 해룡의 청으로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 받고 황금 1000냥을 받았다. 용궁에서 집까지 땅 밑으로 이동한 후 우물 바닥으로 솟아 나왔다. 나중에 집을 절로 만들어 용왕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꾸몄다.

당나라의 침입과 문두루비법

명랑은 귀국 후 중국에서 배운 신인(神印;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 군사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668년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남은 군사를 백제에 두고 물러가지 않았다. 심지어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듬해 당나라 고종은 김인문 등을 불러서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멸하고도 우리를 해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라며 그를 옥에 가두었다.

670년 고종은 설방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려고 군사 50만을 조련하였다. 당나라의 음모를 알게 된 김인문은 이를 유학하고 있던 의상 스님에게 알렸다. 의상은 곧바로 귀국하여 이런 사실을 문무왕에게 알렸다.

왕이 매우 염려하여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방어책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아뢰기를, “근래에 명랑 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해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왕궁에 들어와 전후 상황을 들은 명랑이 아뢰기를,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그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을 개설함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국경을 지키던 병사가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당나라 군사들이 수없이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순회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명랑을 불러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급박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명랑이 말하기를,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지으십시오.”라고 하였다.

명랑의 말에 따라 채색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고, 유가명승(瑜伽名僧) 12명이 명랑을 상수로 하여 문두루비밀법(文豆婁秘密法) 행하였다. 그러자 신라와 당나라 군사가 싸우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의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 그 후 절을 다시 짓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당나라의 야욕은 다음 해에도 이어졌다. 671년 당나라는 조헌(趙憲)을 장수로 삼고 군사 5만 명으로 쳐들어왔다. 그 법을 썼더니 배들이 전과 같이 침몰하였다.

문두루비법은 무엇인가

명랑이 행한 문두루비법은 《관정경》 제7경인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의 문두루법에 입각해서 행해진 밀교 의례이다. 이 경은 4세기 초 진(晋)나라에 온 백시리밀다라(帛尸利密多羅)에 의해 번역된 후 호국 의례를 행하는 중요한 밀교 경전으로 신앙 되었다. 명랑 역시 중국에서 공부한 이 경을 밀교 의례의 중요 경전으로 여기고 당나라를 물리치는 비법의 전거로 삼은 것이다.

명랑은 그 외에도 《금광명경(金光明經)》과 《대방광십륜경(大方廣十輪經)》을 활용해서 밀교 사상을 펼쳤다. 당나라를 물리친 비법에 사천왕사의 창건과 유가승 12인 등은 《관정경》에는 없는 내용이다. 사천왕사의 창건은 《금광명경》에 의거한 것이다. 경의 제6 <사천왕품>에 호국의 사천왕과 28부의 귀신은 《금광경명》이 널리 유포되는 국토의 왕과 인민을 원적(怨敵), 기근(饑饉), 질역(疾疫), 간난(艱難)에서 지키겠다는 내용이 전한다.

명랑은 《금광명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집을 절로 바꿀 때 용궁에서 받은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꾸미고 금광사(金光寺)라 이름하였다. 용궁에서 받은 황금과 《금광명경》의 호국 사상을 선양하려는 의도에서 창건된 사찰임을 의미한다.

《금광명경》에는 불신(佛身)과 불법(佛法)을 금색(金色), 금광(金光)으로 표현한다. 특히 제3 <참회품>을 보면 금고(金鼓)가 등장하고, 참회법을 금광이라 말하며, 제불의 몸을 금광이라 찬탄한다.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은 명랑은 금광사를 창건하였으며, 낙성식에서 당대 고승인 혜숙을 기도로 초청하는 신이를 보였다.

《삼국유사》 의해 <이혜동진(二惠同塵)> 조를 보면 새로이 금강사를 창건하여 낙성회를 열었을 때 덕이 높은 스님들이 다 모였으나 오직 혜숙 법사만 이르지 않았다. 명랑이 향을 태우고 정성껏 기도하자 조금 뒤에 공이 왔다. 이때 마침 큰 비가 왔으나 옷은 젖지 않았고 신발에 진흙이 묻지 않았다. 명랑에게 일러 말하기를 “부름이 정성스러워서 여기 왔다”라고 하였다.

명랑의 호국 사상은 《대방광십륜경》의 영향도 크다. 이 경은 남방에서 온 지장보살을 대상으로 여래는 십륜을 성취하면 오탁악세에서 능히 원적을 제압하고 번뇌를 멸하여 중생들을 삼승의 불퇴지에 머물게 한다고 전한다. 그런 여래 십륜을 관정찰제리왕(灌頂刹帝利王)이 능히 외적을 멸하여 국토를 수호하는 관정왕십륜에 비유한다. 그리고 《대방광십륜경》 후반에 이르면 금강장(金剛藏) 보살이 등장하여 대승적 관점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호국 경전이다.

명랑은 자신의 밀교 사상을 정립하면서 당시 불교의 여건을 참작하였다. 그는 문두루비법을 행할 때 유가의 명승 12명을 참여시켰다. 이들은 유가유식에 밝은 수행자를 말한다. 이들을 참여시킨 것은 유가유식은 초기 밀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기도 하지만 당시 신라에 유식사상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명랑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금광명경》은 유식사상을 대폭 도입하여 별도의 유식 경전을 출현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태장, 금강 양부의 만다라 성립과 밀교의 비법을 담고 있어 밀교 경전으로 간주 된다.

명랑의 신인 비법 계승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헌한 명랑의 신인 비법은 후학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후삼국을 통일한 무렵에 이르러서는 종파로 형성되었다. 먼저 명랑의 신인 비법을 계승한 후학들은 진호국가불사 차원에서 여러 사찰을 창건하였다.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기 위한 사천왕사, 군사적 목적인 원원사(遠源寺)를 세웠다. 원원사는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20여 리에 세워진 사찰로 안혜(安惠)와 낭융(朗融) 등 네 대덕이 김유신, 김의원, 김술종 등과 함께 발원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원원사가 위치한 곳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관문성(關門城)이 있는 곳으로 볼 때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김유신의 후예들이 이 사찰을 크게 중창하여 신라 사회의 안녕과 발전을 위한 사찰로 삼았다.

통일신라 시대 신인 비법을 계승한 사찰로 감은사와 석굴암을 들 수 있다. 감은사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에 세운 호국사찰이다. 석굴암 역시 왜적이 침입하는 곳을 지키는 역할이 부여됨으로써 신인종 사찰임을 시사한다.

명랑의 신인 비법은 고려 시대에도 호국의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신인종은 명랑에서 안혜와 낭융을 거쳐 고려 태조 때 광학(廣學)과 대연(大緣) 두 대덕으로 이어졌다. 밀교 신인종의 수행자였던 두 사람은 형제였다. 태조 왕건을 따라다니며 분향하고 수도하였고, 잦은 해적의 침입으로 걱정하자 비법으로 그들을 진압하였다. 해적을 물리친 공으로 태조는 두 사람 부모 기일보(忌日寶)로 논밭 몇 결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현성사(現聖寺)를 창건하고 신인종 근본으로 삼았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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