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 전경. 원효 스님이 입적한 뒤 아들 설총이 스님의 유래로 스님의 상을 조성해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불교저널 자료사진.
경주 분황사 전경. 원효 스님이 입적한 뒤 아들 설총이 스님의 유래로 스님의 상을 조성해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불교저널 자료사진.

원효의 출생과 수학

원효는 압량군(押梁郡; 경북 경산) 남쪽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설(薛) 씨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며, 아버지는 담내(談㮈) 내말(乃末)이다. 어렸을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었다.

어머니가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다. 617년(진평왕 39) 만삭이 되어 밤나무 밑을 지나는데 산기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우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 누웠다. 해산하려고 하는데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그 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고 하였다.

원효는 631년 15세 무렵 출가하였다. 원효는 성골과 진골 중심의 신라불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모두가 기득권을 가지려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힘쓰는 수행자를 스승으로 섬길 수 없었다. 결국 스승 없이 자신의 힘으로 공부하였다.

그러나 넓고 깊으며 중층적인 진리의 세계를 갖추고 있는 불교를 독학하기는 힘든 일이다. 명석한 원효였지만 불교의 경론을 연구하고 수도에 정진할 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거나, 경전의 소를 찬술할 때 의문 나는 곳이 있으면 혜공에게 물었다. 그 역시 절에서 일하던 노파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이 낮았다. 왕실 중심의 신라불교에서 벗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낭지 대사에게 물었다. 그 역시 왕실 불교와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영축산 암자에 여러 해 살면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아 마을 사람들 모두 알지 못했다. 원효가 영축산 서쪽 반고사(磻高寺)에 머무르며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할 때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에게 물었다.

저술을 마치고 뒤쪽에 게송을 지어 이르길, ‘서쪽 골짜기의 사미는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합니다.’라 할 정도로 존경하였다. 낭지가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에서 머무르며 대중을 따라 강의를 듣고 조금 있다가 돌아왔다는 내용으로 볼 때 도력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왕실 중심으로 조직된 신라불교 교단에 원효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훌륭한 스승이 없는 그에게 교학을 연구할 수 있는 길은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을 연찬하는 일이었다. 당시 당나라는 교법이 융성하게 발전하는 중이었고, 특히 인도 유학을 마친 현장이 《성유식론》 번역 이후 그의 제자 자은 규기에 의해 법상의 교학이 형성되던 때였다. 이런 소식을 들은 원효는 신라불교에 느낀 답답함을 해결하고자 구법의 길을 결심하였다.

그는 34세 되던 선덕여왕 4년(650) 26세의 의상과 함께 육로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 당시 신라는 553년 진흥왕이 당항진을 점령한 이후 중국으로 갈 수 있는 해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쉬운 해로를 마다하고 육로를 택한 것은 고구려 평양에 있는 보덕 화상에게 배우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효는 국경을 지키던 고구려 병사에게 잡혀 수십 일 동안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신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보덕은 백제 완주 고대산으로 옮겼다. 원효는 그를 만날 수 있는 때를 기다리며 교학 연찬에 전념하였다. 외형적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불퇴전의 용맹심으로 정진하였다. 그 결과 계, 정, 혜 삼학을 통달하고 불법의 진의와 정수를 터득하였다. 신라에서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수행과 학문 연찬이 깊어지면서 중앙에 나아갈 기회가 생겼다. 당시 신라 불교계에 유행하였던 백고좌법회 법사로 천거된 것이다. 그러나 그를 시기한 인물들의 방해로 법석에 설 수 없었다.

신라불교에 실망한 원효는 660년 7월 백제가 멸망하자 완산주 고대산 경복사(景福寺)에 주석하던 보덕 화상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운 후 661년(문무왕 원년) 의상과 함께 제2차 구법을 시도하였다.

두 사람은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당항진으로 향했다. 도중에 궂은비를 만나 비바람을 피하려고 길가 땅굴에 몸을 은신하여 밤을 지냈다. 이튿날 깨어보니 그곳은 땅굴이 아니라 오래된 무덤이었다. 어제는 보지 못한 해골도 뒹굴고 있었다. 그날도 비가 멎지 않고 땅도 진흙투성이라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웠다. 무덤인 것을 알면서 하룻밤을 더 머물 수밖에 없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갑자기 귀신이 나타날 것과 같은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제는 땅굴이어서 편안하게 잘 수 있었던 것과 천양지차였다. 그 순간 원효는 이 모든 것이 마음 도리임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면 땅굴과 고분도 둘이 아니다. 삼계가 유심이고 만법이 유식이다. 마음 외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리오.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분황사에서 시작한 불교대중화

원효는 모든 불교 교학을 이해한 선지식이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교리의 체계적 완성에 있지 않았다. 그가 14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람들이 그의 생애와 활동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가 태어나고, 수행하고, 그리고 활동한 시대는 삼국 통일을 위한 전제왕권이 필요한 때였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불교 역시 특권층을 위한 불교일 수밖에 없었다. 원효는 그 틀을 깨트린 불교인이었다. 진정 불교가 누구를 위한 불교이어야 하며, 무엇을 위한 불교이어야 하는지 근본을 제시한 것이다.

왕권 중심의 불교계를 비판한 원효는 어려운 현실 생활을 살아가는 대중들을 위해 정토사상을 제시하면서 괴로운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 대중들은 어려운 생활과 무지에 의해 그런 본원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들을 안타깝게 여긴 원효는 대중들의 가치를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이 대중 속으로 들어갈 것을 결심하였다.

분황사에 살던 원효는 《화엄소(華嚴疏)》를 짓다가 제4 <십회향품>에 이르자 마침내 붓을 놓았다. <십회향품>에 설해져 있는 내용과 사상은 보살이 대원을 세워 일체중생을 모두 구호하기 위하여 삼세제불의 회향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 내용에서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이론적 정립이 아닌 천촌만락의 서민 대중을 교화하는 실천행에 나섰다.

원효는 불교대중화를 위해 승복을 벗었다. 어느 날 원효는 거리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

태종무열왕은 이 노래를 듣고 원효가 귀부인을 얻어 아들을 낳아 국가의 현인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을 알아차렸다. 홀로 된 공주가 있는 요석궁으로 불러들였다. 왕의 명령으로 궁궐 관리가 원효를 찾으려 하자 이 사실을 알고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면서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궐 관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안내하였고, 옷을 말리면서 자연스럽게 요석 공주와 지냈다. 둘 사이에서 설총이 태어났다.

원효는 설총을 낳은 이후 속인의 옷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였다. 그리고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고는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 무애인(無碍人)은 한결같이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무애박이라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많은 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으면서 돌아다녔다. 이런 원효의 불교대중화로 인해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도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분황사에 영원히 잠든 원효

원효와 요석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설총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서에 두루 통달하였다. 우리말로써 중국과 주변 나라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에 통달하고 육경(六經) 문학을 이해하였다. 신라 십현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원효가 입적하자 설총은 유해를 부수어 그의 진용을 빚어 분황사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공경과 사모의 마음을 모아 슬픔의 뜻을 표하였다. 그 정성을 느꼈는지 설총이 예배를 하는데 갑자기 소상이 돌아보았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까지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었다고 한다. 후대 원효를 다음과 같이 찬하였다.

각승(角乘)은 비로소 삼매경을 열고
표주박 가지고 춤추며 온갖 거리 교화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보는 모습만 허허롭구나.

원효의 명성은 고려에도 이어졌다. 숙종은 원효는 동방의 성인인데 비기(碑記)와 시호(諡號)가 없어 그 덕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애석해 하였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대성화쟁국사(大聖和靜國師)로 추증하였다. 살던 곳에 비를 세우고 덕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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