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초 개인수행 전념…당 유학 구법·선진문물 익혀
귀국 후 분황사 머물며 국민통합과 불교활동에 매진
승니 규범 새로 정비…황룡사에 구층목탑 건립 건의

황룡사지 구층목탑지 심초석. 불교저널 자료사진.
황룡사지 구층목탑지 심초석. 불교저널 자료사진.

선덕여왕의 즉위와 자장의 중국 파견

자장은 진골 김무림의 아들이다. 세존과 같은 날 태어나서 선종랑(善宗郞)이라 이름 하였다. 자라면서 정신과 마음이 맑고 깊었으며, 글을 잘하면서도 세속의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다. 양친을 여의고 속세의 어지러움이 싫어 자신의 집과 땅을 내놓아 원령사(元寧寺)를 지었다. 때로 깊고 험준한 곳을 찾아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후 태보(台輔) 자리가 비어서 여러 번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왕이 이에 명하여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어 버리겠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자장은 “나는 차라리 하루 동안 계를 지키고 죽지 백 년 동안 계를 어기고 살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이 출가수행을 허락하였다.

여왕이 즉위하자 주변 나라는 신라를 약하게 여겼다. 나제동맹(羅濟同盟)의 와해로 시작된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이 지속되면서 삼국의 대립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중국은 수나라에서 당나라로 교체되었다. 이처럼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는데 국가 지도자 역할을 해오던 원광은 선덕여왕이 즉위한 이후 몸이 아파 국정을 도울 수 없게 되었다. 진평왕 때부터 중국으로 오가는 국서는 모두 원광의 심중에서 나왔을 정도로 역할이 컸다. 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그를 받들어 정치를 맡기고 불교로 교화하는 일을 물었다.

선덕여왕은 몸이 아파 정사를 도울 수 없는 원광을 대신해서 국정을 운영하고 백성을 이끌 지도자 양성을 고민하였다. 그런 생각 끝에 자신이 즉위하면서 재상의 자리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던 자장이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 구법의 뜻이 있음을 알았다.

선덕여왕 5년(636) 자장에게 중국으로 가 구법과 함께 선진문물을 배워오도록 칙명을 내렸다. 문하의 수행자 10여 명과 당나라에 간 그는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신라 국왕은 천축의 찰리족이며 불기(佛記)를 받아 다른 종족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태화지 주변에서는 신인(神人)을 만났다. 그가 나라에 어떤 어려움이 있느냐고 물었다. 자장은 북으로 말갈, 남으로 왜구,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범 때문에 백성들이 어려워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신인은 신라의 왕이 여자이기 때문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어 그러므로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때 자장이 신라로 돌아가 무엇을 하면 이익이 되겠느냐고 물었다. 신인은 황룡사 호법룡이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그곳에 9층탑을 세우고 팔관회를 베풀어 죄인을 방면하면 인근 아홉 나라가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라 하였다. 신인과 헤어져 장안 종남산 운제사(雲際寺)로 돌아와 동쪽 벼랑에 들어가 바위 사이에 집을 짓고 3년을 거하였다.

자장의 귀국과 불교 활동

선덕여왕 9년(640) 황룡사에 거처하던 원광이 세상을 떠났다. 새로운 인물이 필요해진 선덕여왕은 12년(643) 당나라에 글을 올려 국가적 임무와 개인적 구법을 행하고 있던 자장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당나라 황제는 이런 요청을 받아들여 신라로 떠나기 전에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비단 1령(領)과 여러 가지 색이 있는 천 500단(端)을 주었다. 그리고 동궁(東宮)에서도 비단 200필과 다른 예물을 많이 주었다.

3월 신라로 돌아온 자장은 대국통에 임명되었다.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신라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대승적 불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출가 초기 개인의 수행에 전념했던 자장이었지만 중국에 가서 불교의 국가적 성격에 대해 자세히 살피게 되면서 국민통합을 위한 대승불교의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국가적 지원 아래 자신이 체득한 대승사상을 널리 실천하였다.

그는 궁중에 들어가서 일하(一夏) 간 대승론(大乘論)을 강의하기도 하고, 황룡사에서 사부대중을 위해 7일 밤낮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연하였다. 강연이 끝나면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거나 구름안개가 자욱이 끼어 강당을 덮는 신이(神異)가 있어 청중들의 탄복을 불러일으켰다.

불교계를 개편하려고 모든 승니의 규범을 새로 정하였다. 계율을 지키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반월(半月)마다 계를 설하고 겨울과 봄에는 시험을 보아 지계와 범계를 알게 하였고, 꾸준히 유지하도록 하였다. 이런 자장의 노력으로 신라에는 계를 받고 부처님을 받드는 것이 열 집 가운데 여덟, 아홉이 되었다.

자장은 불교 신앙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황룡사 9층탑 건립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였다. 왕은 신하들과 논의한 후 이간 용춘(龍春)에게 건립 책임자를 맡겨 14년(645)에 완성하였다.

황룡사 9층탑은 이런 호국적 의식에 진신사리 신앙이 더해져 건설되었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진신사리에 대한 공덕이 강조되었다. 그런 까닭에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사리를 구해 탑묘에 봉안하는 것을 최고의 신앙으로 여겼다.

이런 공덕 사상을 넘어 밀교 경전에 이르면 사리탑의 호국적 영험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사리는 마미(麻米)처럼 작지만 큰 위신이 있어 진신사리를 탑 안에 모시면 모든 악을 막을 수 있다는 사상이 계승되었다.

그런 사상적 배경에서 건설된 황룡사 사리탑이었지만 당시 미묘한 정치적 관계로 인해 9층탑은 선덕여왕과 자장의 의도대로 왕실을 위한 의지처는 되지 못했다. 선덕여왕 말기 김춘추와 김유신의 연합은 최고의 귀족 세력으로 불렸다. 특히 김유신의 무력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의 세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례로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虎林公), 염장공(廉長公)과 함께 남산 오지암에 모여서 나라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자리에 뛰어드니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났다. 그러나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힘이 이와 같아 수석에 앉았으나 그래도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했다고 전하고 있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는 데는 김유신의 공이 컸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교체기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일으킨 모반을 진압한 것도 김유신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신라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를 확보한 귀족 세력이 될 수 있었다.

신라와 선덕여왕을 위해 세우려는 황룡사 9층탑 건립 책임자는 오히려 김춘추의 아버지인 이간 용춘이 맡았다. 탑은 세워졌지만 세력이 커진 귀족들은 왕이 곧 부처라는 진신상주사상(眞身常住思想)은 수용하기 어려운 이념이었다.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의 부처님 진신 사리탑. 사진 제공 문화재청.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의 부처님 진신 사리탑. 사진 제공 문화재청.

금강계단의 설립과 진신상주사상

귀족들의 권한이 커지자 불교계 역시 왕실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선덕여왕 입장에서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국행 불사를 주관하던 황룡사를 떠나 새롭게 왕실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사찰이 필요하였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신라인에게 자긍심을 주었던 것은 석가 이전의 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다고 하는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이었다. 이 사상은 자장이 금강계단을 세울 때까지 지속된 이념으로 삼국이 항쟁하던 시기 신라인이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다. 그러나 선덕여왕 말년에 이르면 그 이념은 더 이상 왕실의 의지가 될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선덕여왕과 자장은 경주에서 벗어난 삽량주에 통도사와 금강계단을 세워 신라 불교계를 새롭게 정비할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과거의 인연이 아닌 현재 신라에 항상 부처님이 머물고, 왕은 곧 부처라는 강력한 이념인 진신상주사상을 제시하여 신라 국민의 정신적 전환을 도모한 것이다.

자장은 선덕여왕 15년(646)년 통도사와 금강계단을 설립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교단을 정리하고 감독을 충실히 하자 호법(護法)의 분위기가 크게 일어나면서 사방에 오는 자가 많아져 이들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도는 곧 신라 귀족 세력의 반대에 마주쳤다.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김춘추와 김유신은 왕은 곧 부처라는 의미가 담긴 사상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삼국이 항쟁하는 시기이므로 중앙집중의 정치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진신상주사상을 제시하고 총괄하였던 자장은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자장의 생애 말년을 보면 대국통의 위치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경주를 떠나 강릉군에 수다사(水多寺)를 창건하고 지냈다. 거사로 변장한 문수보살이 그를 찾아왔으나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지혜가 무뎌졌음을 알고 문수보살은 “돌아간다. 돌아간다. 아상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삼태기를 뒤집어 사자보좌(師子寶座)로 만들어 올라타고 빛을 발하며 사라졌다. 자장이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예법에 맞는 몸가짐을 갖추고 빛을 찾아 남쪽 고개로 쫓아 올라갔다. 그러나 이미 문수보살의 행방이 묘연하여 만나지 못하고 결국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선덕여왕과 자장의 뜻이 완성되지 못하고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김유신 역시 제왕과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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