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금곡사. 원광 법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한국전쟁 무렵 폐허가 됐다가 그 후 중창됐다. ⓒ 이창윤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금곡사. 원광 법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한국전쟁 무렵 폐허가 됐다가 그 후 중창됐다. ⓒ 이창윤

불교와 토속신앙의 갈등

신라는 지리적으로 동남쪽에 위치하고 폐쇄적인 곳이어서 토속신앙이 강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내세관을 가지고 있는 불교를 알게 되자 국가와 왕실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불교가 신라 사회에 전래되면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종교적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늘을 섬기던 무교의 천신 신앙은 제석천, 사천왕의 체제로 대체되고, 제사, 점복 등의 신앙 의례가 불교의 팔관, 백고좌, 점찰, 문두루 등의 법회로 대체되었다.

그로 인해 오랜 기간 유지해온 토속신앙은 역할이 축소된 채 외지로 밀려났고, 상대적으로 불교에 대한 반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불교와 토속신앙의 갈등을 잘 보여주는 곳이 삼기산 금곡사이다. 이를 지켜본 당사자가 신라의 고승 원광이었고, 그 내용이 《삼국유사》 <원광서학> 조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원광은 홀로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삼기산(三岐山)에 금곡사를 세우고 도를 닦았다. 4년 후 한 비구가 와서 그의 거처와 멀지 않은 곳에 절을 세우고 2년을 머물렀다. 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 경전을 독송하는데 홀연히 신비로운 소리가 그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지금 옆에 사는 비구를 보니 빠르게 주술을 닦지만 얻는 바가 없으니 시끄러운 소리는 남의 정념(靜念)을 괴롭히고, 사는 곳이 내가 지나는 길에 있어 매일 오고 갈 때 미운 마음이 생긴다. 법사는 가서 옮겨가도록 말을 전하라. 만약 오래 거하면 내가 문득 죄업을 만들까 두렵다.”

다음날 법사가 가서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에 신의 말을 들었는데, 비구는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비구가 대답하였다. “수행이 지극한 자가 어찌 마귀에 현혹되는 바가 있는가? 법사는 어찌 여우 귀신의 말을 걱정하는가?”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내가 말한 일에 대해 비구가 어찌 대답하였는가?” 법사는 신이 노할까 두려워 “아직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굳이 말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신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다 들었다. 법사는 어찌 거짓말을 하는가? 잠자코 내가 하는 바를 보아라.” 밤중에 벼락같은 소리가 났다. 다음날 보니 산이 무너져 비구가 있었던 절을 메워버렸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법사가 보니 어떠한가?” 법사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심히 놀랍고 두렵습니다.” 신이 말하였다. “내 나이는 거의 삼천 년에 가깝고 신통력이 가장 성하니 이 작은 일이 어찌 놀래기에 족하겠는가. 또한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천하의 일은 도달하지 않는 바가 없다. 지금 생각건대 법사가 이곳에 거한다면 자신에게 이로움은 있을 것이나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공은 없을 것이다. 현재 고명(高名)을 드높이지 않으면 미래에 승과(勝果)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중국에서 불법을 체득하여 동해에서 몽매한 중생을 이끄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법사가 대답하였다. “중국에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디 바라는 바이나 바다와 육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 능히 스스로 통하지 못할 뿐입니다.”

신이 중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계책을 자세히 알려주니 법사는 그 말에 따라 중국으로 갔다. 11년을 머무르며 삼장에 통달하였다.

신라 사회에 밀교 신행을 펼친 원광

삼기산에서 짧은 시간 경험한 주술은 원광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진평왕 11년(589) 수나라에 들어가 아함, 성실, 반야, 섭론 등 대승불교를 수학하면서도 신라의 토속신앙과 조화될 수 있는 밀교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배웠다.

진평왕 22년(600) 중국 조빙사를 따라 귀국한 원광은 전에 수행하였던 삼기산에 들렀다. 밤중에 신이 와서 이름을 부르며 말하였다. “바다와 육지의 길 사이를 갔다 돌아오니 어떠한가?” 원광이 대답하였다.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평안히 돌아오기를 마쳤습니다.” 신이 말하였다. “나 또한 계(戒)를 받아 세세생생에 서로 구제하는 약속을 맺었다.”

원광이 그 모습이 궁금하여 “신의 진용(眞容)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신이 말하였다. “법사가 만약 나의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끝을 보라.”

다음날 그곳을 바라보니 큰 팔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법사는 내 팔을 보았는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였습니다.” 이 골짜기를 비장산(臂長山)이라고 불렀다.

신이 말하였다. “비록 몸이 있으나 무상(無常)의 해(害)는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오래되지 않아 그 고개에 몸을 버릴 것이다. 법사는 와서 멀리 떠나는 혼을 전송하라.”

약속한 날짜를 기다려가서 보니 한 검은 늙은 여우가 있었는데 검기가 칠흑 같았다. 헐떡거리다가 숨을 쉬지 않고 조금 뒤에 죽었다.

경주시 안강읍 금곡사 절 마당에 있는 석탑. 원광 법사의 부도라고 전한다. ⓒ 이창윤.
경주시 안강읍 금곡사 절 마당에 있는 석탑. 원광 법사의 부도라고 전한다. ⓒ 이창윤.

이처럼 토속신앙과 불교의 갈등을 경험한 원광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밀교 신행을 꼽았다. 대승 교학을 강의하면서도 밀교와 관련한 여러 활동을 하였다. 진평왕이 병이 들어 어의가 치료하여도 완치되지 않자 원광을 궁궐로 불렀다. 그는 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밤에 두 차례 깊은 법을 설하고 계를 받아 참회하도록 하였다. 왕이 그대로 따르자 오래지 않아 병에 차도가 있었다. 이것은 수계참회의 법을 치병 주술에 활용하여 병을 치료한 예이다.

대중교화에도 밀교를 활용하였다. 귀국 후 가서갑(嘉栖岬)에 머물렀다. 이곳은 지금 운문사(雲門寺)에서 동쪽으로 9천 보 정도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 점찰법회를 위한 점찰보(占察寶)를 두었다. 점찰법회는 나무로 된 손가락 크기의 간자를 굴려 나오는 숙세의 선악 업보와 현재의 고락길흉을 점찰하여 참회하고 반성하면서 자심(自心)의 안락을 얻는 것이다. 점찰법회에 참여해서 감응을 받은 사람들이 점찰보에 전답을 희사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신라불교가 다른 신앙과 융화될 수 있도록 노력한 원광은 나이 80여 세로 정관(貞觀) 연간에 입적하였다. 제자들은 그의 부도를 삼기산 금곡사(金谷寺)에 세웠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원광은 불모지와 다름없던 고대 한국 밀교에 있어 큰 역할을 한 사상가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삼기산 금곡사(金谷寺)를 중심으로 계승되면서 고대 밀교를 여는 서막이 되었다. 그 후 이곳에 밀본이 머무르면서 수행하였다. 밀본은 고대 밀교 사상을 본격적으로 정립한 수행승이다. 그런 그가 삼기산에서 수행했다는 것은 밀교의 서막을 연 원광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 한 밀교적 상승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세속오계에 담긴 불교와 유교의 조화

원광은 불교와 토속신앙과의 융화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이미 신라 사회에 들어온 유교와도 공존을 꾀한 선지식이었다. 그가 가슬갑(嘉瑟岬)에 머물 때 사량부(沙梁部)에 살던 선비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는 선비, 군자와 더불어 교유하고자 기약하였으나 먼저 마음을 바로 하고 몸을 지키지 않으면 곧 모욕당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현자(賢者)에게 도를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두 사람은 원광법사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속사(俗士)는 몽매하여 아는 바가 없습니다. 원하건대 한 말씀 내리셔서 평생 교훈으로 삼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십시오.”

원광이 말하였다.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으나 다른 이의 신하와 자식인 너희들이 감당하기 어렵다. 지금 세속에서 지킬 수 있는 다섯 개의 계율이 있으니 첫 번째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긴다, 두 번째는 효로 부모를 섬긴다, 세 번째는 친구와 사귐에 믿음이 있게 한다, 네 번째는 전투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다, 다섯 번째는 살생을 하는데 가려서 해야 한다. 너희들은 이 다섯 가지를 행함에 소홀함이 없게 하라.”

귀산 등이 말하였다. “다른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살생을 가려서 하라는 것은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원광이 말하였다. “때를 가리는 것은 매월 8, 14, 15, 23, 29, 30일의 육재일(六齋日)에 몸과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유지하며, 여덟 가지 계를 지키며, 봄과 여름에 살생하지 않는 것이다. 가축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말, 소, 닭, 개를 말하는 것이며, 세물(細物)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고기가 한 점도 족하지 않다는 것이니 이것이 생물을 가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만큼만 얻는 것이지 많이 죽이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귀산 등이 말하였다. “지금 이후로 받들어 잘 펼치고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앞의 네 가지는 유교적 덕목이라면 다섯 번째는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해야 하는 신라 상황에 맞게 불교의 불살생을 조화롭게 제시한 원광의 지혜이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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