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 북녘에서 왔수다”

해방정국에서 1948년 4월, 김구 임시정부 주석은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그해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개최된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약칭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 후 남녘으로 넘어온 북녘 종교계의 거두 3인방이 있다. 반세기도 더 지난 54년만의 일이다.

남측과 다르게 형성되어 온 북측 종교를 비롯한 사회단체 대표단 116명이 서울을 처음 방문했다. 그중에서도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몽양 여운형의 삼녀 려원구(2009년 7월 30일 사망)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의 방문은 이례적이었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때 영부인 이희호와 나란히 앉았던 려원구 의장은 민중불교운동연합 초대 의장을 지낸 멱정 여익구와 10촌간으로, 1946년 월북 후 첫 서울 나들이였다.

그 부친인 여운형은 “조선 독립운동은 조선인의 일시적 감정 폭발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오로지 조선의 항구적 자유와 발전을 위해서이며, 나아가서는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이다.”(민족반역자처단협회 누리집 ‘몽양 여운형 어록’)라는 명언이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일명 독립운동테마역)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게시될 만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명사로 꼽힌다.

2002년 8·15 남북 공동 행사(8·15 민족통일대회)를 위해 북측 대표단이 남측에 온 것은 분단 이후 대규모 인원이 방문한 첫 사례이다. 그해 8월 14일 오전 10시 46분 고려항공 TU154편을 이용해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한 북측 대표단은 5분여 만에 여객터미널에 도착했으나, 남측 당국자와 환영 행사에 대해 협의하면서 오전 11시 15분경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때 북측 대표단의 단장을 맡은 김영대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위원장과 려원구 통일전선 의장, 장재언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세 명이 선도하여 트랩에서 내려 마중 나온 남측 민화협 관계자와 마주했다.

‘한반도기’와 자주통일의 구호가 적힌 깃발을 하나씩 든 북측 대표단 19명은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공항 귀빈실로 직행했으며, 나머지 97명은 법무부 A심사대에서 약식 세관검사를 마치고 귀빈주차장에 대기 중인 대형버스에 올랐다. 김영대 단장과 허혁필 민화협 부회장,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 등 19명의 북측 대표단은 의전실로 자리를 옮겨 남측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의 김종수 신부, 통일연대의 한상열 목사 등과 “반갑습니다.”라며 인사를 나누며 서울 방문일정을 시작했다.

그 당시 남측 정부의 방침에 따라 ‘8·15 민족통일대회’는 대회 장소가 서울 워커힐호텔로 제한되면서 사전에 남북이 협의한 각계 부문별 행사가 취소 또는 무산되었다. 조계사에서의 ‘남북 불교도 합동법회’ 등 환영과 공동 행사가 취소되었지만, ‘서울 답방’이라는 교류의 계기를 열었던 그 날의 만남과 그해의 교류를 살펴본다.

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강영섭 조그련 위원장, 장재언 조선카톨릭협회 위원장,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 사진=8·15남북공동행사 취재단
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강영섭 조그련 위원장, 장재언 조선카톨릭협회 위원장,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 사진=8·15남북공동행사 취재단

북 종교계, 3대 거장 남하하다

불교와 기독교, 천주교를 대표하는 북측 3대 종교계의 수장이 서울에 왔다. 분단 이후 북측의 3대 종교계 대표가 남하(南下)하여 서울에 온 것은 최초의 종교적 사건이다. 북에서는 1989년 5월 30일에 결성된 조선종교인협회(현 회장 강지영)를 중심으로 조선그리스도교련맹(1946년 11월 28일 결성, 이하 조그련)과 조선불교도련맹(1945년 12월 26일 창립, 이하 조불련), 조선카톨릭교협회(1988년 6월 30일 결성, 이하 조카협),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1947년 2월 14일 설립), 조선정교위원회(2002년 9월 25일 설립)가 종교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북측의 종교계 대표는 2002년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에 116명의 대표단과 함께 참가했다. 북측 국가부주석을 역임한 강량욱의 아들인 강영섭 조그련 위원장(2012년 1월 21일 소천)과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2005년 11월 11일 입적), 그리고 사무엘 장재언 조카협 위원장 등 3대 종교계 대표가 서울에 왔다. 2001년 북측에서 열린 6·15와 8·15 남북 공동 행사에 대한 답방 형식을 빌려 서울에 온 것이다.

조그련 강영섭 위원장은 2002년 8월 14일 저녁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답방인사 자리에서 “나래, 북에서 내려 왔수다.”라는 멘트로 좌중을 이끌었다. 조카협 위원장이기도 한 장재언 조선종교인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14일 환영만찬과 16일 환송만찬에서 북측을 대표해 인사말을 했다. 북측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겸하던 장재언 위원장은 2000년 12월 북측 이산가족 상봉 대표단을 이끌고 서울에 나온 적이 있지만, 기독교 강영섭 위원장과 불교 박태화 위원장은 서울을 처음 방문한 것이어서 특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남북 대표단 530여 명은 2002년 8월 15일, 예정 시간이었던 오전 9시보다 늦은 오전 10시 50분쯤 워커힐호텔 제이드가든에서 ‘8·15 민족통일대회’ 개막 행사와 민족단합대회를 잇달아 열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민족화해협의회, 조선직업총동맹,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조선민주여성동맹, 조선종교인협회 등 단체 대표와 예술인, 남측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막 행사가 열렸다.

김영대 북측 단장은 개막 인사에서 “평양과 민족의 명산 금강산에 이어 겨레의 마음과 뜻을 합친 통일행사가 오늘 이처럼 서울에서 막을 올리게 된 것은 역사적인 북남 수뇌상봉(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이 낳은 또 하나의 소중한 결실”이라고 말했다. 개막식에서 남북이 채택한 공동 호소문에는 “6·15 공동선언이야말로 민족이 화해하고 단합하여 통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치”라고 강조했다. 오후 일정으로 잡혀있던 사진·미술전 개막식은 북측이 김정일화(花)가 새겨진 자수 작품 등을 전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후 5시를 넘겨 합의한 내용으로 개최됐다.

북측 려원구 통일전선 의장은 전날 부친 묘소 참배에 이어 남측 친척들과 만났다.

대회 이틀째인 16일에는 종단, 민화협, 여성 등 부문별 상봉모임과 독도를 주제로 한 공동 학술토론회, 북측 대표단의 창덕궁 등 고궁 관광, 북측 예술단의 코엑스 오디토리엄 단독 공연 등이 이어졌다. 이날 토론회에서 채택한 특별호소문에서 남북은 “일본의 역사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군사 대국화를 반대하는 전(全)민족적인 운동을 강력히 벌이자”며, “우리 민족에 끼친 일본의 잘못을 심판하고 사죄와 보상을 반드시 받아내자.”라고 했다.

이후 남북 대표단 530여 명과 국내 초청인사 60여 명 등 600여 명은 폐막식과 오후 7시 환송만찬으로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랬다. 이를 끝으로 북측 대표단은 서울의 밤을 보내고, 17일 오전 10시 인천국제공항에서 고려민항을 타고 평양으로 귀환했다.

김영대 북측 단장은 귀환 성명에서 “우리를 따뜻이 환대해 준 각계 단체들과 서울시민들, 남녘 동포 여러분에게 사의를 표한다. 우리는 이번 통일대회를 통해 민족도 하나, 핏줄도 하나, 역사도 하나, 이 땅도 하나임을 다시 확인했다. 반목과 질시가 아니라 화해와 신뢰를, 분열이 아니라 단합과 통일을 위해 굳게 손잡고 나가자. 6·15 공동선언을 확고히 고수하고 철저히 이행해 나가자.”고 촉구했다.

2002년 8월 16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 종단별 부문 상봉 모임. 사진=민추본 누리집 자료.
2002년 8월 16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 종단별 부문 상봉 모임. 사진=민추본 누리집 자료.

조계사, 남북 합동법회 무산과 그 후

8월 16일 오후 3시 서울시 견지동 조계사 대웅전에서 봉행될 예정이던 ‘남북 불교도 조국통일 기원 합동법회’는 무산됐다.

북측 인사들이 불참했기 때문이라는 당시 언론 기사와 다르게 북측은 민화협 등을 앞세운 남측 정부가 ‘(조계사) 합동법회를 열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해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8·15 민족통일대회’를 진행한 남측 민화협 등 단체 관계자들이 “애당초 그런 계획은 없었다.”라고 밝힌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총련, 범민련 등 공식행사에서 제외된 통일단체와 극우 보수단체 양측의 불법시위, 집회가 우려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 남측 정부에서 미리 정했던 방침이 적용되었을 뿐이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종단협)과 조계종 총무원은 북측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대표 부의장 등 직함을 가진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을 비롯한 북측 관계자들이 이날 합동법회에 참석하기로 했다고 사전에 홍보했다. 이때 김석오·조용준 종단협 직원과 전형근 조계종 총무원 과장,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실장 등이 조계사에서 열린 ‘남북 불교도 합동법회’ 준비 실무를 맡아 동분서주했던 경험도 남아 있다.

결국 조계사에서 개최하기로 한 ‘남북 불교도 합동법회’는 워커힐호텔에서 진행된 ‘8·15 민족통일대회와’는 별개로 이 법회를 보고자 신도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남쪽만의 반쪽행사로 치러졌다. <연합뉴스> 등 국내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이 이날 조계사 법회는 통일기원 타종과 정대 조계종 총무원장의 ‘북녘 불자에게 드리는 통일 메시지’ 발표, 통일기원 발원문 낭독 순으로 진행됐다.

북측 대표단의 서해 직항로를 통한 남측 첫 방문으로 기대를 모은 ‘8·15 민족통일대회’는 8월 16일 부문별 상봉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남북 대표단 530여 명은 이날 오전 9시께부터 1시간 30분 동안 워커힐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종단, 민화협, 통일연대, 노동, 농민, 문예, 여성, 청년, 언론 등 모두 9개 부문별로 상봉 모임을 했다.

불교 단위의 상봉에서는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과 남측의 정련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 초대 본부장, 홍파 종단협 사무총장, 법타 평화통일불교협회(평불협) 회장과 명진, 법현, 장용철, 선무외 등은 선물을 전달하고 기념 촬영을 했다. 남측 불교게는 이날 조계사에서 열리는 법회에 대한 소개와 향후 금강산과 묘향산에서의 합동법회를 갖자고 박태화 위원장에게 제안하였다.

이날 북측은 상봉 직전 배포한 각 상봉단체 명단에서 대회 시작 전 북측이 보낸 대표단 명단과 같이 ‘민족화해협의회’ 등으로 바꿔 표기했던 범민련 북측본부와 범청학련 북측본부 등의 직함을 그대로 사용해 주목을 받았다. 부문별 상봉 모임에서 남측 참가자들은 여러 가지 제안을 북측에 내놓았지만 북측은 대부분 “검토해 보겠다.”는 원론적 답변만 반복해 아쉬움을 남겼다.

‘서울 답방’의 첫 전례(典例)가 된 2002년 ‘8·15 민족통일대회’는 서울에서 남북 양측이 처음으로 가진 8·15 공동행사였고, 대규모 민간급 방남단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해 남북은 금강산에서 열린 새해맞이 민족공동 행사(2002년 2월 28일~3월 1일)를 시작으로, 남측 종단협과 북측 조불련이 묘향산 보현사에서 개최한 ‘우리민족끼리 단합과 통합을 촉진하기 위한 북남·남북 불교도 공동법회’(2002년 4월 29일), 금강산 외금강호텔 광장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축전’, 평양 단군릉에서 열린 ‘개천절 민족공동행사’(2002년 10월 3일),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청년학생 통일대회’(2002년 10월 15일)와 남북 여성 통일대회(2002년 10월 16~17일) 등 민간 교류를 성사시켰다.

2002년 한 해 동안 남북 불교계는 5월 함경북도 금호지구 케도(KEDO) 법당 건립 지원, 6월 14일 민추본의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악기 지원과 방북행사(2002년 6월 28일~7월 6일), 민추본의 북녘 동포 생활용품 지원(2002년 9월 30일), 개천절 방북단의 묘향산 보현사 합동법회(2002년 10월 4일)를 잇따라 개최했다. 특히 중국 베이징 해당화식당에서 북측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 한성기 국제부장과 남측 양산 조계종 사회부장, 지일 사회국장이 만나 체결한 ‘북한사찰 단청불사 협력 사업에 관한 합의서’(2002년 12월 22일)는 불교 교류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이로써 남북 불교간 교류·협력 사업은 첫 시동을 걸었다. 불교가 먼저 남북 종교교류의 시대적 과제를 새롭게 입증해 놓은 것이다. 이 시기의 남북 민간교류는 통일의 당위성을 일깨우고, 그간 금기시했던 종교교류로부터 다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모습을 세계만방에 보여준 한 해였다.

이지범 | 북한불교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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