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원종과 조동종 맹약

원종은 1908년 조선 불교의 진흥을 도모하려는 차원에서 세워진 종단이었다.28 조선조 불교 종파는 일찍이 축소와 무종파 시대라는 오욕의 역사를 거쳐 왔다. 이런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자각에 의해 불교 종단이 부흥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 종단의 명칭이므로 대표자들도 불교의 원융무애와 선교겸수 등 전통적 의미를 의정하여 원종이라 이름한 것이다.29

그러나 원종이 설립되었다 해서 배불정책에 의해 와해된 승단이 복원되고,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종무행정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원종이 성립된 이후에도 조선 불교는 통감부와 일본 불교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불교 승려들 가운데 일본에 가서 일본 종파에 귀의해서 출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종정 이회광은 원종을 일본 불교의 한 종파에 예속시키려 하였다.30

일제는 조선 불교가 세운 원종을 인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회광은 인가를 얻기 위해 일본 불교와 연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목적 하에 다음과 같은 일련의 조치들을 추진하였다. 먼저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가 조언한 대로 조선 불교의 장래를 위해서 반드시 일본 불교의 원조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가 추천하는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고문으로 추대하였다.31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다케다 한시는 치쿠젠 구루메(筑前久留米) 성에서 태어나 나가타의 현성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출가 후에는 나가오까의 조동종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종교와 식민에 뜻을 두고 황국을 위하여 원훈을 세우겠다는 야심을 갖고 1892년 부산에 건너왔다. 이용구의 추천으로 원종 종무원 고문이 되고, 용산에 서룡선사(瑞龍禪寺)를 건립하여 조동종 조선 포교 관리자로 임명되었다.32

그는 시천교의 융성이 불교의 발전과 관련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갖고 이용구와 함께 1907년 《권불교재흥서(勸佛敎再興書)》를 작성하였다.33 그 안에 다케다 한시는 일본의 고승 아끼야마 모구센(秋山黙仙)과 경성에서 만나 조선 불교 발전에 대한 방법을 논의하면서 각 사원의 합의소를 경성에 설치하고 불교의 중흥을 강구한 방안을 피력하였다. 유능한 승려를 군과 도시에 파견해서 불법을 홍포하도록 하고, 불교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며, 그리고 조선 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일본의 고승들을 초청하여 일본의 관민이 고승을 대하는 태도를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권불교재흥서》가 계기가 되어 다케다 한시는 이회광과 함께 일본 조동종과 조선 원종과의 연합을 추진하게 되었다.34

이회광.
이회광.

1910년 10월 6일 이회광은 원종 종무원을 대표하여 전국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불교 조동종 관장 이시까와 슈도(石川素童)와 만나 7개조로 된 연합문을 만들어 체결을 시도하였다. 제의를 받은 이시까와 슈도는 바로 승낙하지 않고 이견을 제시하였다. 조선 불교 원종은 일본 불교 조동종에 비하여 자격이 미흡하기 때문에 대등한 조건에서는 연합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필요한 때에 일본 조동종은 조선 불교를 응원할 수 있다는 여운을 남겼다.

이런 이시까와 슈도의 의견에 대해 이회광은 연합이 아니면 그 어떠한 조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조동종 측에서는 1년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조동종의 부속으로 있으면 연합을 체결하겠다고 제의하였다. 이회광은 자신은 연합의 위임을 받아왔지 부속의 위임은 받아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조동종의 제시를 거절하였다. 이회광의 강력한 주장에 조동종은 마침내 부속이 아닌 연합으로 승낙하였다. 그렇지만 쌍방이 날인하는 서명자에 있어서는 관장이 아닌 조동종 종무 대표가 하였다. 양국의 종단 대표가 서약해야 하는 모습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것이다.35 이때 체결하고자 하였던 조약문은 다음과 같다.

一. 조선 전체의 원종 사원 대중은 조동종과 완전하고 영구히 연합동맹하여 불교를 확장할 것.

一.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 고문을 의속할 것.

一. 조동종 종무원은 조선 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득함에 알선의 노력을 취할 것.

一.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하여 상당한 편리를 도모할 것.

一.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서 포교사 약간 명을 초빙하여 각 수사찰에 배치하여 일반 포교 및 청년 승려의 교육을 촉탁하고 또는 조동종 종무원이 필요로 인하여 포교사를 파견하는 때에는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이 지정하는 지역의 수사찰이나 혹 사원에 숙사를 정하여 일반 포교 및 청년 승려 교육에 종사케 할 것.

一. 본 체맹은 쌍방의 뜻이 일치하지 않으면 폐지 변경 혹 개정을 할 것.

一. 본 체맹은 기관의 승인을 얻는 일로부터 효력을 발생함.36

이 내용을 살펴보면 쌍방의 동등한 연합이 아니라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는 불평등조약임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조약문 제2조에서 조선 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일본 조동종에서 담임한다는 내용은 한 종단의 자주적 입장이 아닌 부속됨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는 한일합방 이후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총독부의 조선 불교 통제법령인 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기 전인데 벌써부터 일본 불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 불교의 보호 속으로 들어가려는 의도가 보이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대등한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조약문 제3조를 보면 조선 불교의 원종은 일본 불교의 조동종에서 고문을 초빙하지만 원종은 일본 조동종에 대해 어떠한 자격을 지닌 인물을 파견하지 못하고 있다. 고문의 초빙에서 알 수 있듯이 이회광 스스로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보다 하위의 개념으로 설정한 탓에 대등한 입장의 연합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조동종 관장 이시까와 슈도가 처음부터 조선 불교의 자격이 미흡하여 대등한 연합을 할 수 없다던 태도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제5조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원종은 조동종 승려를 포교사로 초빙하여 일반 포교와 청년 승려의 교육을 맡기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조선에 오면 기거할 수 있는 곳과 반드시 그 목적에 종사하도록 하는 내용을 성문화함으로써 일본 승려의 편의와 활동을 확실히 보장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원종은 포교사를 파견하거나 교육하는 조건은 삽입되지 않아 행정적인 면과 함께 교육적인 면에서도 일본 불교에 예속을 자청하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연합은 체결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한 총독부의 허가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조선 불교 안에서 반대의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원종과 조동종과의 연합을 인가하지 않았다. 일본 불교계의 내막을 자세히 알고 있는 총독부는 일본 불교의 많은 종파 가운데 교세가 가장 큰 정토 진종이나 정토종이 이미 한국에 개교하여 상당히 많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종파도 조선에 개교한 이래 조선 불교와 병합을 추진시키고 있는 과정인데 여기서 조동종과의 연합을 승인한다면 편파적인 처사에 스스로 곤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와 함께 막후에서 연합을 조종하였던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가 한일합방 직후 신병으로 귀국한 후 일어나지 못하고 사망한 것도 두 종파의 연합이 성공하지 못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37

총독부는 이미 한일합방이 된 상황에서 조선 불교에 대해 행정적으로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조선 불교를 직접 통제하기 위해 종파 간의 연합을 허락하지 않는 한편 통제법령을 제정하려는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1911년 6월 3일 전문 7개조로 발표된 사찰령이었다.38 조선 불교의 자율적 활동을 통제하고 식민지 통치에 맞는 방향으로 끌고 가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39 이후 조선 불교는 일제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통제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전락되어 다시 암울한 시대를 보내야 했다.

[주] -----

28) 이능화(1918), 《조선불교통사》(상), 신문관, 620쪽.

29) 김영태(1986), 《한국불교사개설》, 경서원, 245쪽.

30) 김영태(1984), <근대불교의 종통 종맥>, 《한국근대종교사상사》, 원광대출판국, 191~192쪽.

31) 박경훈(1989), <근세불교의 연구>, 《근대한국불교사론》, 민족사, 32쪽.

32) 한석희 저 김승태 역(1990), 《일제의 종교 침략》, 기독교문사, 64~65쪽.

33) 高橋亨(1929), 《이조불교》, 보문관, 936~939쪽. 여기에 그 전문이 실려 있다.

34) 江田俊雄(1977), 《조선불교사연구》, 국서간행회, 431쪽.

35) 高橋亨(1929), 앞의 책, 922~923쪽.

36) 이능화(1918), 앞의 책(하), 938쪽.

37) 서경수(1992), <일제의 불교정책>, 《한국불교사론》, 민족사, 115~116쪽.

38) 이능화(1918), 앞의 책(하), 1118~1119쪽.

39) 高橋亨(1929), 앞의 책, 9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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