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당시 문경 김룡사 전경.
일제 강점기 당시 문경 김룡사 전경.

2) 일제의 조선 불교 통제 정책

이와 같은 저의를 지닌 일본 불교는 실제로 조선인의 포교와 조선 불교 인사들의 유인과 포섭 그리고 개종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들을 시도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일반적으로 쓰였던 방법은 좌담회나 물질적 공여 그리고 교유와 친밀한 관계의 유지였다. 이런 방법 이외에 좀 더 특수한 방법으로는, 오꾸무라엔신이 1898년 광주 개교가 결정되면서 포교 목적 및 방법에 관해 본산에 제출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방법들이 모색되고 있었다.

첫째로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장려하여 가능한 물질적 개발에 힘쓰는 방법을 모색하며, 둘째로 승속을 불문하고 지방 저명인사에게 일본을 시찰케 함으로써 일반 개발의 보급을 도모하며, 셋째로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을 계발한다는 것이다.51

첫 번째 식산흥업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농업이었다. 전답의 면적을 확대시키고 관개시설을 확장하는 한편 새로운 벼의 품종을 개발하여 쌀의 생산량을 늘렸다. 그렇지만 이것은 식민지 수탈에 불과할 뿐이었다.52 여타의 정책 역시 식민지 경제에 휩쓸리게 되면서 조선은 점점 일본 자본주의 상품의 소비지로 전락되었다.53

두 번째 방안인 일본 시찰은 1898년 4월 경도 본원사에서 관장 교뇨(敎如)의 기념법회가 열린 것을 기회로 경도 본원사를 방문한 최간진과 최세팔 두 사람이 처음이었다. 본산의 후의를 입은 두 사람은 일본에서 느꼈던 좋은 인상이 잊혀지지 않았으며, 그 유용성이 상당히 컸다고 진술하였다. 최간진의 경우 오꾸무라엔신과 그의 누이 엔신이오꼬(圓心五百子)가 일방학교를 설립할 때 자신의 집을 교사로 제공하는 등 그들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54 이런 모습을 볼 때 일본 불교의 의도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55 이런 일본 시찰에 대한 정책은 이후에도 꾸준히 실행되었다.56

세 번째 방법도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다. 친일 인물을 양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노젠라이는 승려의 도성 출입이 해제되던 그해 4월 경성에 일한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실행하기 위해 주동(鑄洞)에 700여 평의 대지를 마련하였다.57 이를 시작으로 경술국치 무렵까지 경성과 황해도 정주, 평양과 진남포 그리고 김천 등지에 불교고등학교, 불교청년회 야학교, 한성보통학교 그리고 일어학교 등이 세워졌다.58 수업료 면제와 학용품 무료제공으로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59

일본이 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인을 교육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에 동화되어 내선일체 의식을 갖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학생의 수를 10여 명으로 제한한 것도 보편적 교육을 지향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목적에 따라 특수교육을 하여 일본 지향적인 조선인을 육성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일이었다.60

이와 같은 일본 불교의 노력은 침략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적인 성과에 힘입어 당시 조선인들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주고 있었다. 1903년에 박은식이 쓴 《정토종한국개교지(淨土宗韓國開敎誌)》 서문을 볼 때 일본 불교의 조선 침략 정책이 어느 정도 성공되었음을 보여준다.

“광무 4년 가을에 정토종 히로야스(廣安) 선사가 동해를 건너와서 남산 아래에 사원을 세우고 6척의 부처님을 모시고 보리(菩提)의 묘한 진리를 염송하면서 우리 황실의 무량한 복을 빌고 또 널리 고관대작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 등을 청하여 법회를 넓혔다. 삼 년이 지나 규조가 갖추어져 한 책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이 《정토종개교지》이다. …… 옛날에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지금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기운이 그렇게 되고 있다. …… 나는 서방에 지극히 정결한 설산이 있다고 듣고 있다. 이제 히로야스 선사는 이 설산을 기본으로 하고 일체중생을 길러 불자가 원하고 있는 법유(法乳)로써 그 공용을 삼아 널리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제도하고 고해를 건너 모두가 낙토에 이르게 하는 것이 금일 법회의 나갈 바가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믿어 여기에 적는다.”61

정토종한국개교지.
정토종한국개교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이 강화되는 정도에 따라 일본 불교의 조선 진출도 증가하였다. 그에 따라 조선 불교의 친일적 경향도 농후해졌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 불교의 정책은 선린우호 성격에서 조선 불교를 부속시키려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흐름을 파악한 일제는 지금까지와 다른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일본 불교를 통한 우호적인 분위기 조성을 중단하고 향후 식민지 지배를 염두에 두고 조선 불교를 직접 통제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것이 1906년 11월 17일 통감부령 제45호로 발령하여 12월 1일부터 시행한 6개조의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이다.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

제1조 제국의 신도·불교 기타 종교에 관한 교·종파로서 포교에 종사하고자 할 때는 해당 관장 또는 그에 준하는 자가 한국의 관리자를 선정하고 이력서를 첨부하여 다음 사항을 구비하여 통감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1. 포교 방법

2. 포교자 감독 방법

제2조 전조의 경우를 제외하고 제국 신민으로서 종교의 선포에 종사하고자 할 때는 종교의 명칭 및 포교의 방법에 관한 사항을 갖추어 이력서를 첨부하여 관할 이사관을 경유하여 통감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제3조 종교의 용도로 제공하기 위한 사원·당우·회당·설교소 또는 강의소유를 설립하고자 할 때는 교·종파의 관리자 또는 전조의 포교자는 다음 사항을 구비하여 그 소재지 관할 이사관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1. 명칭 및 소재지

2. 종교의 명칭

3. 관리 및 유지방법

제4조 교·종파의 관리자 또는 제2조의 포교자 기타 제국 신민으로서 한국사원관리의 위촉에 응하고자 할 때는 필요한 서류를 첨부하고 그 사원 소재지의 관할 이사관을 경유하여 통감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제5조 전 각조의 인가사항을 변경하고자 할 때는 다시 인가를 받아야 한다.

제6조 교·종파의 관리자 또는 제2조의 포교자는 소속 포교자의 씨명 및 자격을 관할 이사관에게 계출(屆出)해야 하며, 그 포교자의 이동이 있을 때도 역시 같다.

부칙

제7조 이 규칙은 명치 39년 12월 1일부터 이를 시행한다.

제8조 이 규칙을 시행할 때 현재 포교에 종사하거나 또는 제3조 혹은 제4조의 규정에 해당하는 자는 이 규칙 시행 후 3개월 이내에 각 조의 인가사항을 제출하여야 한다.62

일제는 조선의 모든 종교를 식민지 정책에 활용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백성을 교란시키거나 금전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통제하였다.63 그 속에는 조선 불교 역시 손쉽게 통솔하겠다는 식민주의적 의식이 담겨 있다.

법령이 발표되자 일본 불교의 각 종파는 조선의 사원관리를 통감부에 신청하였다. 그 가운데 대곡파 본원사의 청원이 두드러졌다. 영변 보현사, 합천 해인사, 동래 범어사,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 등을 관리하겠다고 통감부에 요청하였다. 본파 본원사가 관리를 요청한 사원은 1907년 4월에서 1911년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 개의 사찰이었다. 일본불교의 조선 사찰 병합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64 이들이 요청한 사찰 가운데 전통 사찰로 그 사격을 이어오고 있는 대찰까지 관리하겠다는 그들의 주장을 살펴볼 때 일본 불교의 위세가 그만큼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65

이와 같은 추세를 넘어 조선 불교 사찰이 일본 불교 각 종파의 관리를 받고자 하는 일도 생겨났다. 스스로 일본 불교 말사로 등록하여 정치적, 경제적인 보호를 받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일본 불교와 병합함으로써 자신의 신분이 상승되고 또한 사찰이 보호될 수 있다는 현실적 이익에서 생겨난 일이었다. 특히 신분 상승의 목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불교의 종파에서 새롭게 비구계를 받는 행위가 빈번하면서 조선 불교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렸다.

[주] -----

51) 조선개교감독부 편(1996), <조선개교오십년지>, 《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 62권, 민족사, 241∼243쪽.

52) <今村事務官講演의 謄照>, 《해동불보》 제8호(1914. 04), 54∼57쪽.

53) 이세영(1994), <개항기 지주제의 변동>, 《한국사》 12, 한길사, 79∼80쪽.

54) 조선개교감독부(1996), 앞의 책, 243∼244쪽.

55) 이능화(1917), <內地에 佛敎視察團을 送함>, 《조선불교총보》 제6호(1917. 09), 3쪽.

56) 《조선불교총보》 제7호(1917. 11) 視察一束 참조.; 小白頭陀, <一號一言>, 《불교》 제16호∼제21호 참조.; 林錫珍, <日本佛敎視察記>, 《불교》 제49호∼제54호 참조.

57) 高橋亨(1929), 앞의 책. 901쪽. 그는 이 사업이 이루어질 것으로 낙관하고 5월 11일 인천과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에 대한 비판이 속출하여 더 이상 조선에 대한 교화 활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그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58) 靑柳南冥(명치 44년), 《조선종교사》, 조선연구회, 134쪽.

59) 조선개교감독부(1996), 앞의 책, 243∼244쪽.

60) 목정배(1982), <일제시대의 한국불교>, 《석림》 제15집, 동국대 석림회, 76∼77쪽.

61) 박은식(1975), <정토종개교지서>, 《박은식전서》 中,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445∼447쪽. 光武四年秋淨土宗廣安禪師來自東瀛住錫于漢師之南岳下 … 以濟衆生超度苦海置諸樂土者非今日法會之趣耶余其회之以此云.

62) 한석희 저 김승태 역(1990), 《일제의 종교침략》, 기독교문사, 199∼200쪽. 주 73) 참조.

63) 《매일신보》 1911. 01. 07.

64) 靑柳南冥(명치 44년), 앞의 책, 131쪽.

65) 서경수(1992), <일제의 불교정책>, 《근대한국불교사론》, 민족사,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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