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본 불교의 확산과 일제의 통제

1) 일본 불교의 인식과 확산

조선조 수백 년간 행해진 도성 출입 금지는 불교계에 대한 사회적, 인격적인 하락을 가져온 배불정책이었다. 이같이 조선 불교와 승려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일본 승려에 의해 일시에 철회되면서 일본 불교에 대한 경외감과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1895년 4월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자 사노젠라이에게 감사의 글을 올리고 있는 용주사 승려 상순(尙順)의 표현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대조선국 수원 화산 용주사 승려 상순은 삼가 대일본대존사 각하에게 축하의 절을 올립니다. 우리의 도는 이 나라에서 천박하고 신분이 낮아 시경(市京)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 500여 년이나 되어 항상 울적하였습니다. 다행히 교린의 조약이 이루어져 대존사 각하께서 널리 만 리 밖에까지 자비의 큰 은혜를 베푸시어 우리나라의 승려들로 하여금 500년 이래의 원통함과 비굴함에서 쾌히 일어서게 하시어 오늘 비로소 왕궁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나라의 승려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입성에 즈음하여 대존사 각하에게 절을 올립니다.”40)

조선의 모든 승려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내용이 너무나 친일적이며 극에 이르는 칭호를 사용하여 오히려 조선 승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글을 쓴 상순은 한일합방이 된 뒤에도 친일적인 글을 쓴 인물이다.41) 다소 과장된 표현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된 이후 조선 불교가 가지고 있는 일본 불교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남산 동본원사 경성별원(1906년 11월)
남산 동본원사 경성별원(1906년 11월)

사노젠라이는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자 이번에는 조선의 국왕과 정부 관료 그리고 당시 사회적 저명인사들에게 불교를 알릴 수 있는 법회를 계획하였다. 조선 국왕의 성수와 중흥 유신의 성업을 축하하는 대법회였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 불교의 위세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된 후 얼마 되지 않아 군무대신과 교섭하여 북일영(北一營)을 사용하는 허가를 받았다. 5월 2일부터 도성 안에 광고지를 게시하는 한편 정부 고위관리들에게 안내장을 보내 5월 5일 법회를 거행하였다. 조선 불교계에서 남북한산승대장, 화계사, 백련사, 용주사 및 금강산 승도 약 3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사회 인사로서는 총리대신 김홍집과 외무대신 김윤식을 비롯하여 학부대신, 농공상부대신 경무사 등 정부고관 20여 명과 일본인 저명인사 40여 명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일반 참석자를 합쳐 모두 1만 4천여 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조선 불교 인사들은 법회를 주관한 사노젠라이에 대해 장군이 홀로 천 리를 가는 것과 같고 보름달이 중천에 걸린 것과 같이 혼자서 그 재주와 기략을 발휘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일본 불교에 대한 경외감은 더욱 높아졌다.42)

성대한 법회는 조선 불교 인사들에게 새로운 감회를 주었다. 조선조 배불정책으로 고난의 역사를 겪으면서 도성 안을 들어오지 못한 신세였다. 그런 금지가 해제되었음은 물론 도성 안에서 정부 관료와 사회 저명인사를 모시고 법회를 개설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선 불교 인사들에게 큰 기쁨을 줄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젖어 일본 승려의 활동 저변에는 일본 불교의 조선 침투라는 계책이 숨어 있었고, 그러한 경향은 후에 친일불교를 형성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간파하기 어려웠다.

정토종 ‘大韓阿彌陀本願寺’ 현판.
정토종 ‘大韓阿彌陀本願寺’ 현판.

1896년 7월 다시 성대한 법회가 도성 안에서 개최되었다. 그 내용을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듬해 병신년(1896) 추 7월 제산의 승려들이 일본 승려와 함께 경성 원동의 북일영 안에 법단을 세우고는 수일에 걸쳐 무차대회를 행하였다. 경성의 남녀가 다투듯이 몰려와서 구경하였다. 나 또한 군중들 속에서 함께 기뻐하였다. ……

크게 기뻐하는 자가 있어 말하길, ‘조선의 승려는 수백 년간이나 문외한이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구름이 걷힌 하늘을 볼 수 있다. 이로부터 불일佛日이 다시 비출 것이다.’ 하였다.”43)

도성 출입 금지 해제가 조선 불교 승려나 불교 신도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 계기가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수백 년 동안 조선 사회에서 주체적인 모습을 갖지 못하다가 이제 역사의 장으로 등장하는 불교인의 마음은 그야말로 구름이 걷힌 하늘에서 부처님의 광명이 비쳐지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금령은 오래가지 못하고 1898년 다시 금지령이 내려졌다. 고종이 환구단(圜丘壇)으로 교례를 지내러 갔을 때 개운사 승려가 포장 사이로 머리를 밀고 쳐다보았다. 왕이 신료들에게 그의 신분에 대해 물었고, 이를 계기로 경무사가 다시 도성 출입을 금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금지령은 오래지 않아 저절로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금지령이 내린 때에는 일반 백성들이 단발을 행하고 있을 때라 승려와 서로 혼동되어 도성을 출입하는 데 제한받지 않았다.44)

다음과 같은 분위기에서 도성 출입 금지는 예전처럼 실행될 수 없었다. 승려의 도성출입이 다시 금지된 것은 1898년이다. 해금된 지 3년이 지난 시기이다. 이미 도성을 출입하는 분위기에 익숙해져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일시적인 경무사의 명령에 의하여 예전과 같이 도성을 출입할 수 없는 분위기로 전환되기에는 사회적 여건과 불교계의 의식구조가 크게 변해 있었다.

민권이 확대되면서 자유의지가 강조되던 시대적 여건도 도성 출입 금지가 철저하게 실행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재차 금지령이 내려지던 1898년 무렵은 독립협회(獨立協會)에 의해 개화운동이 대중운동으로 전환되면서 수많은 민중이 참가하는 집회와 만민공동회가 개최되면서 인권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45) 그리고 다수의 여성들이 구관습의 폐지와 자유를 주장하는 여권운동이 강행되는 등 시민의식이 고조되었다.46)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에서 사회적 신분을 제약하는 법령이 다시 확고하게 실행되기는 어려웠다.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된 이후 조선에 진출하는 일본 불교가 많아졌다. 1895년 이전까지 조선에 별원이나 포교소를 개설한 일본 불교 종파는 진종 본원사, 대곡파 본원사, 일련종 등 몇 곳에 불과하였다.47) 그러나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자유롭게 되고, 법회를 통해 일본 불교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던 시점을 계기로 기존의 종파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종파들이 앞을 다투어 진출하였다.

해금 이후 조선에 들어온 일본 불교를 보면 1895년 8월 진종 본원사의 나까야마유이젠(中山唯然)의 부산 개원을 시작으로 1897년에는 정토종의 미쓰미다모찌몬(三隅田持門)이 부산에 개원하였으며, 다음 해는 쇼노죠까이운(正野上海運)이 경성에 개교원을 설립하였다. 1903년 겐죠엔(嚴常円)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도에 힘쓰는 한편 1905년 개교총감부의 일부를 용산에 이전하였다. 진언종은 1905년 가네다게쥰도(金武順道)가 경성에 광운사를 설립하였다. 조동종은 1907년 쯔루다끼운(鶴田機運)이 대전에 대전사를 건립하였다. 일본 불교의 종파들 가운데 가장 늦게 경성에 포교소를 설치한 종파는 임제종 묘심사파였다.

이들 각 종파는 조선에 사는 일본인에 대한 포교와 위무 활동이 목적이라 하면서도 조선인에 대한 포교와 조선 불교 승려의 교류에 주력하였다.48) 이들은 일본 정부의 도움으로 급진적으로 성장하여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던 1910년 무렵 전국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49)

이런 일본 불교의 활동은 일제의 정치적 침략과 그 궤를 함께 하였다. 표면적으로 선린의 우호로써 자신들의 마각을 감추고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그들의 저의를 엿볼 수 있다. 1898년 10월 오꾸무라엔신(奧村圓心)은 대곡파 본원사 본산에 다음과 같은 ‘광주 개교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나라와 법은 가죽과 털과 같고 일본과 한국은 순치(脣齒)와 같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생각하건대 동방의 형세가 날로 악화되고 바야흐로 조선의 상태는 형언하기 어려운 지경에 있다. 이때 우리의 왕법위본 충군애국의 교로 조선인들을 유도․ 계발함은 실로 우리 교의 본지이며 나라에 보답하는 법을 보호하는 까닭이다. 하물며 아국의 문물풍교가 오늘의 성황을 가져옴이 옛날 조선의 유도계발에 의한 것임에랴. 여기에 조선 포교의 의는 일어난 것이다.”50)

이 보고서에 의하면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는 조선은 일본과는 뗄 수 없는 숙명적 관계이며 그 조선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려운 처지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일본 불교의 가르침으로 조선인들을 유도․ 계발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정도 아니고 침략도 아니라 지난 과거 조선이 자신들을 유도․ 계발한 것에 대한 보답이다. 과거의 선린 관계를 빌미로 조선 내 일본 불교의 침투를 합리화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보고서이다.

[주] -----

40) 高橋亨(1929), 《이조불교》, 보문관, 898쪽. 大朝鮮國京畿水原花山龍珠寺僧釋尙順 … 今於入城敢曝淺誠拜于大尊師閣下.

41) 정광호(1994), 《근대 한일불교관계사 연구》, 인하대출판부, 59쪽 주 36) 참조.

42) 高橋亨(1929), 앞의 책, 900~901쪽.

43) 이능화(1918), 《조선불교통사》(하), 927쪽. 翌年丙申秋七月 諸山僧侶與日本僧 … 今日始得披雲覩天 從此佛日可再輝矣.

44) 이능화(1918), 위의 책(하), 927쪽.

45) 주진오(1994), <독립협회운동>, 《한국사》 11, 한길사, 235~246쪽.

46) 한석희 저 김승태 역(1990), 《일제의 종교침략》, 기독교문사, 59~60쪽.

47) 정광호(1994), 앞의 책, 55쪽.

48) 김승태 역(1990), 앞의 책, 61쪽.

49) 유병덕(1992), <일제시대의 불교>, 《근대한국불교사론》, 민족사, 155쪽.

50) 조선개교감독부 편(1996), <조선개교오십년지>, 《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 62권, 민족사,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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