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도성 출입 금지의 해제 양상과 추이

1876년 2월 조선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은 일제는 자신들의 침략 의도를 숨기기 위해 일본 불교를 이용하였다. 1877년 내무부 오오꾸보토시미츠(大久保利通)는 외무경 테라시마무네노리(寺島宗則)와 함께 대곡파(大谷派) 본원사(本願寺) 관장 겐뇨(嚴如)에게 서한을 보내어 조선에 개교할 것을 의뢰하였다. 일제의 부탁을 받은 본원사는 1차 개교에 공로가 있는 죠신(淨信)의 후예 오꾸무라엔신(奧村圓心)과 히라노께이수이(平野惠粹) 두 사람을 발탁하여 부산에 별원 설치를 명하였다.

일본 정부가 조선 개교에 있어 본원사에 의뢰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였다. 본원사는 예전에 부산에 고덕사를 건설한 적이 있었으며, 도쿠가와(德川) 시대에는 조선의 사절이 일본에 올 때마다 동경 아사쿠사(淺草) 별원에서 체류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25) 그런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와 위정자들은 본원사에 호감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26)

조선에 진출한 일본 불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방안들을 실행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으로 실시된 것이 좌담을 하면서 일본 불교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거나, 물질 공여 등으로 환심을 사는 일, 그리고 교유와 후우 등의 방법이었다.27)

그러나 일련종(日蓮宗)에서는 이러한 방법 이외에도 조선 승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방법을 채택하였다.28) 이것은 조선 승려들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정책이었다. 왜냐하면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될 무렵 조선 불교는 오랜 기간 동안 억압을 받아 사회적 지위가 너무도 쇠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련종은 이런 여건 속에서 조선 불교를 공략하고 조선 사회에서 일본 불교의 포교 및 교세 확장을 확고히 하려면 무엇보다 조선 불교와 조선 승려에 대한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신분 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들이 연구되었고, 그 가운데 승니를 인격적으로 하락시킨 도성 출입 금지를 타파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로 생각한 것이다.29)

사노젠라이(佐野前勵).
사노젠라이(佐野前勵).

일본 불교 일련종 승려 사노젠라이(佐野前勵)는 내각 총리대신 김홍집에게 글을 올려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를 해제해 줄 것을 청하였다. 김홍집이 이를 고종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으면서 조선 불교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도성 출입 금지는 해제될 수 있었다.30)

표면적인 이유는 일본 승려처럼 조선 승려도 도성 안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바람이었다.31) 사노젠라이는 조선 승려는 자기 나라 서울에 출입하지 못하는데 반하여, 남의 나라 승려는 자유로이 출입하는 모순을 없애기 위해 조선 승려의 도성 출입도 허락해 주기를 요청한다는 것이었다.32)

그러나 그들이 도성 출입 금지를 해제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 일련종이 조선에서 활동하는 데 용이함과 함께 조선 포교의 우세를 점하고자 한 생각이었다. 그러한 목적이 숨어 있었음은 1895년 도성 출입 금지를 전후한 활동에서 알 수 있다.

일련종은 1881년 와타나베니지렌(渡邊日蓮)이 부산에 건너와 일련종 회당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1882년에는 교큐지츠네(旭日苗)가 원산에 정묘사를 세웠다. 그 후 사노젠라이가 조선에 건너온 해인 1895년에는 인천에 묘각사를 세워 일련종 포교의 기반을 닦았다. 이어 서울에 호국사와 경왕사, 진남포에 최승사, 군산에 안국사, 함흥에 일련사를 건립하는 등 조선 진출에 심혈을 기울였다.33)

1895년 관장 대리를 맡아 조선에 온 사노젠라이는 호리니즈(堀日溫)과 시부야후미히데(澁谷文英)를 데리고 덕양방 계산동에 일련종 교무소를 열고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공사관의 알선으로 법화경, 안국론 등의 서적과 향로 등을 궁내부에 헌상하는 한편 궁내부 대신 이재면(李載冕)과 면담을 추진하는 등 다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4월 15일에는 북한산 중흥사를 방문해서 일련종 교리를 설명하고 가입할 것을 약속받았다. 그 후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고 시부야후미히데가 그 소식을 알리자 중흥사는 바로 ‘일련종교회본부(日蓮宗敎會本部)’ 간판을 거는 민첩함을 보였다.34)

사노젠라이는 조선 포교를 위해 경성에 체류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조선 불교의 생기가 이미 사라져 승려에게 종풍과 종지가 없음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조선 승려가 처해 있는 어려운 난관을 해결하는 은혜를 베푼다면 일련종으로 유인하는 계기는 물론 자신들의 종파가 중심이 되어 조선 불교계를 통일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런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 도성 출입 금지에 대한 해제였다.

오꾸무라엔신(奧村圓心)의 《한국개교론》.
오꾸무라엔신(奧村圓心)의 《한국개교론》.

1894년 6월 조선 정부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1895년 4월 일본 불교 일련종에 의해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었지만 그 자체는 한국 근대 불교의 시작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해금이 조선조 배불정책의 종결이라는 상징적 의미 이외에도 조선 승려의 인격적인 상승은 물론 도심 포교라고 하는 종교 본연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정책이 오래전부터 일본 불교 특히 일련종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볼 때 일본 불교의 포교 전략이 점차 현실화되는 분기점인 것도 사실이다.

도성 출입 금지 해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당시 내각을 주도하던 인물들의 불교 신앙이 크게 작용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정부는 당시 내무대신이며 개항 이후 명치 정부 내에서 조선과 관련된 정책 입안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이노우에카오루(井上馨)를 주한공사로 임명하며 본격적인 간섭을 추진하였다.

이노우에카오루는 조선의 내정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궁극적 목표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있었다. 먼저 대원군이 동학군과 청군에 접촉한 사실을 들어 정계에서 은퇴시킨 후 박영효를 비롯하여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였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친일내각을 계획하였다. 고종의 동의를 얻어 김홍집․ 박영효 연립내각이 출범하였다.35) 이들 내각은 1894년 7월 군국기무처의 활동 이후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개혁파가 제거될 때까지 존립하였던 내각 가운데 제2기(1894년 12월 17일~1895년 5월 21일)에 해당된다.36)

내각 책임자 가운데 외무대신 김윤식은 불교 내전에도 이해가 깊어 사노젠라이의 건의를 충심으로 찬성하고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37) 내무대신 박영효는 물론이고 개화당의 주역으로 갑신정변을 도모했던 서광범이 법무대신으로 등용되어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38)

그 외에도 개화기 때의 사상가로 개화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유대치의 불교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던 이종원과 이정환 그리고 김영문 등이 내각의 실무담당자로 포함된 것도 해금 문제가 쉽게 풀릴 수 있는 조건이었다.39)

주) -----

25) 김홍집이 1880년 8월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갔을 때에도 이 아사쿠사(淺草) 별원에 머무르면서 이동인을 만났음을 볼 때 본원사가 한국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개교감독부 편, 《조선개교오십년지》(《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 62권, 민족사, 1996, 312~313쪽).

26) 조선개교감독부, 위의 책, 188~189쪽.

27) 조선개교감독부, 위의 책, 202쪽.

28) 가토분쿄(加藤文敎), <한국개교론>(《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 제62권, 민족사, 1996, 496쪽).

29) 정광호, 《근대한일불교관계사연구》, 인하대출판부, 1994, 56~57쪽.

30) 이능화, 《조선불교통사》(하), 신문관, 1918, 927쪽.

31) 정광호, 앞의 책, 1994, 55쪽.

32) 김포광, 《조선불교사》, 프린트본, 121쪽.

33) 유병덕, <일제시대의 불교>, 《근대한국불교사론》, 민족사, 1992, 155쪽.

34) 한석희 저 김승태 역, 《일제의 종교침략》, 기독교문사, 1990, 56~58쪽.

35) 최덕수, 앞의 논문, 1994, 142-143쪽.

36) 최덕수, 위의 논문, 1994, 138쪽.

37) 다카하시도오루(高橋亨), 앞의 책, 1929, 897쪽.

38) 이광린, <숨은 개화사상가 유대치>, 《개화당 연구》, 일조각, 1991, 89쪽.

39) 이능화, 앞의 책(하), 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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