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리는 대승경전의 발달과 함께 부처님의 몸과 같이 여겨져 단순한 유골이 아닌 믿음의 대상이 됐다. 부처님의 사리에 공양하고 그 공덕을 찬탄하는 법회를 사리회 혹은 사리강(舍利講)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활발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기원전 480년경 인도 쿠사나가라의 성 밖에서 열반에 든 뒤 7일 만에 재가불자들이 맡아 다비하자 8곡(斛) 4두(斗)나 되는 많은 사리가 출현했다. 이때 나온 사리는 불사리(佛舍利) 혹은 진신사리라고 해서 부처님처럼 여기고 경배됐는데, 불사리를 얻기 위해 인도의 여러 왕들은 전쟁까지 불사했을 정도였다.
말라족은 자기 영내에서 돌아가셨다는 점을 내세워 쿠시나가라에 탑을 세우려고 하자 각기 연고를 주장하는 주변 7부족이 사리를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선전포고를 했다. 결국 드로나 브라만의 중재로 진신사리는 여덟 나라에 평화적으로 공평하게 분배했다. 분배된 사리는 탑을 만들어 봉안했다.
불사리가 신앙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3세기 중엽 아쇼카왕 때부터였다. 아쇼카왕은 8개의 사리탑 가운데 1개를 제외한 나머지 탑을 열어 전국에 사리를 나누어 봉안토록 했는데, 이때 팔만사천의 불사리탑이 건립됐다.
이때부터 불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사리탑이 건립됐으며 이를 중심으로 불교신앙이 이루어졌다. 이후 무수하게 불어난 불사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보물이 되어 인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사리신앙이 매우 성행하게 됐다.
중국에서는 수의 문제가 서기 7세기 초 전국 110여 곳에 사리탑을 세우면서 본격화됐다. 당대에 들어서도 측천황후 등 황실의 발원으로 불사리 신앙이 성행했으며, 수도인 장안의 여러 사찰에서는 불사리 공양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중국에서 선종이 나와 조사(祖師)를 불보살과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됐다. 이에 따라 선승이 열반하면 부처님처럼 다비한 후 쇄골사리를 탑에 모시게 됐는데 이를 부도라고 한다. 조사의 부도 역시 사리신앙의 연장인 셈이다. 이렇게 해서 불법승 삼보가 모두 사리신앙의 대상이 됐다.
진신사리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신라 진흥왕 때 각덕 스님이 양나라의 사신과 함께 오면서 불사리를 모시고 와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흥륜사에서 맞이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본격적인 것은 당에서 유학한 자장 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불정골(佛頂骨)과 치아사리(齒牙舍利)를 받아서 귀국하면서다.
자장 율사는 왕에게 건의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 그리고 오대산 중대에 사리를 안치했고, 태백산 정암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영월 사자사 등에도 사리탑을 건립했다. 이 다섯 곳의 사찰을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통일신라 하대에 들어서는 기복을 위한 석탑을 조성하는 것이 유행했다. 고려시대에도 불사리 신앙은 유행했다. 개성 인근의 개국사에는 사리를 보관하면서 계단을 설치했고 스님 3천 2백여 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고려 왕들은 특히 불사리를 내전에 모셔 궁중에서 공양했다. 고려시대 왕들은 진신사리에 대한 신심이 돈독하여 사리신앙을 주도하였다. 고려시대 불사리 신앙은 진신사리를 친견함으로써 복을 얻을 수 있다는 기복적인 특성을 보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사리신앙은 왕실을 중심으로 성행했다. 태조는 흥천사의 사리전을 위해 직접 터를 알아보고 건축과정을 시찰하고 독촉하여 낙성시키고 예배하였다. 이후 이 사리전은 기우제를 지내거나 법회를 열거나 중수하는 대상물이 되었는데, 신료들의 반대가 대단했다.
태종은 명 태조가 황엄을 보내 사리를 요구하자 전국에서 사리를 구한 결과, 충청도에서 45과, 경상도에서 164과, 전라도에서 155과, 강원도에서 90과를 모았으며 태조가 303과를 내놓았다고 한다. 사리신앙이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세종도 선왕들처럼 흥천사의 사리각을 수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불사리를 궁중에 모셔놓고 경배 드리기도 했지만 신료들의 반대에 못이겨 흥천사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세종은 스스로를 ‘보살계 제자 조선국왕(菩薩戒弟子 朝鮮國王)’이라 칭할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조선 초기 왕실에 의한 사리신앙은 사회적 안정과 왕실의 번영을 이루어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통도사의 사리가 왜구들에 의해 도난당했다가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사명대사는 그 후 사리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태백산 정암사에 봉안하고 하나는 통도사의 계단을 중수하고 봉안했으며, 정골치아사리는 건봉사에 12과를 봉안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동남아와 수교가 활발해지면서 남방불교권의 진신사리를 가져와 사리탑을 세우는 예가 많다. 사리신앙이 현재도 활발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고승들이 열반한 뒤 나오는 쇄골 사리에는 전국민들이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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