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치 않는다. 자신에게도 언젠가는 닥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통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린다. 그저 막연히 두려울 따름이다. ‘가족 등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하나’,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이 끝일까.’ 이따금씩 생각을 해보지만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 그냥 거기서 멈춰버린다. 과연 ‘죽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일까.

이제는 ‘웰빙(Well-Being)’을 넘어 ‘웰다잉(Well-Dying)’이다. ‘잘 먹고 잘 살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다.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을 타부시하거나 부정하고 때론 절망하고 두려워만했다.
어느 노인복지센터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강좌를 마련했다가 곤혹을 치렀다는 이야기를 이를 잘 말해준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만을 생각했을 뿐, 어떻게 죽을 것인지 거의 생각해본 일이 없다는 점에서 납득이 되는 대목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해 죽음을 타부시하거나 부정하고 때론 절망하고 두려워만 한 셈이다. 그렇다면 불교적 관점에서 웰다잉이란 무엇일까.
오진탁 교수(한림대 철학과)는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즉, 죽음 준비는 삶의 시간이 제한돼 있음에 유념하면서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돌아보고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자는 것.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 라마 역시 “영혼이 육신의 옷만 벗는 과정 즉, 옷을 갈아입는 과정”이라고 일깨운다. 육신의 옷만 벗는 것일 뿐, 그 속에 깃든 영혼은 새로운 세상으로 떠난다는 뜻이다.
이를 종합하면 웰다잉의 불교적 표현은 ‘잘 벗기’, ‘몸 벗기’, ‘몸 바꾸기’ 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평생 쓰던 몸뚱이를 벗고 다른 몸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죽음이란 그 자체로서 기뻐할 일도 아니며, 통탄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마음에 맞추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기 때문이다.
더 좋은 옷을 갈아입을 경우, 죽음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런 경우를 웰다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살아생전 복덕을 많이 지었거나, 마음공부를 잘 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박수치고 기뻐할 일이다. 다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여한이 있어 슬프겠지만, 간 사람에게는 잘된 일이다. 인생이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쁜 옷을 갈아입을 경우, 죽음은 한탄스러운 일이다. 살아생전 제대로 복을 짓지 않았거나, 마음공부를 소홀히 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슬퍼할 일이다. 가엾기 짝이 없다.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르지 않으므로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물음은 이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은 너무 세속적인 틀에만 얽매이게 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보다 포괄적이고도 심층적인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죽는 바로 그 순간 좋든 싫든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 삶에는 거짓이 통용되지만 죽음의 순간 자신 존재의 값어치는 남김없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죽는 시간을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이 갑자기 찾아올 때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 어떤 식으로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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