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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 선맥 피어난 한국 선불교 시원지
길따라 떠나는 사찰순례 - 양양 진전사지·선림원지
2021년 01월 05일 (화) 09:07:05 이창윤 기자 budjn2009@gmail.com
   
▲ 양양 진전사지.

첫 선 전래자 법랑과 신행

문헌상 우리나라에 선(禪)이 처음 전래된 시기는 7세기 중엽입니다. 법랑(法郞, ?~?) 스님이 중국 선종의 제4조 도신(道信, 580∼651) 스님에게 법을 배우고 귀국한 것이 그 시초이지요. 그러나 법랑 스님의 행적은 제자인 신행(神行 또는 信行, 704∼779) 스님에게 법을 전한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신행 스님은 스승이 입적하자 당으로 유학을 떠나 지공(志空) 스님으로부터 법맥을 잇습니다.

중국 선종은 육조 혜능(慧能, 638~713) 대에 이르러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으로 나뉩니다. 육조 스님이 화남과 강서 등 남쪽에서 교화했기 때문에 스님의 법맥이 이어진 선종을 남종이라 하는데 반해, 육조와 함께 오조 홍인(弘忍, 602~675) 스님의 또 다른 상수제자였던 대통선사 신수(大通禪師 神秀, 605~706) 스님과 그의 제자들은 낙양, 장안 등 북쪽에서 선을 펼쳤기 때문에 북종(北宗)이라 합니다.

신행 스님이 법을 이은 지공 스님은 신수 스님의 제자입니다. 신행 스님이 들여온 선법은 현재 우리나라 선종의 원류인 남종선이 아니라 북종선이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교학이 융성했던 탓일까요? 신행 스님이 들여온 북종선은 신라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내 잊힙니다.

선불교 재도입한 ‘북악의 남악척’

선이 이 땅에 굳건히 자리잡게 된 것은 통일신라 하대에 들어서입니다. 입당구법승들이 들여온 북종선 중심의 선법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지요. 그 첫 주자가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초조 도의(道義, ?~?) 스님과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초조 증각대사 홍척(證覺大師 洪陟, ?~?) 스님입니다. 두 스님은 육조 스님의 법손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9~788) 스님의 제자 서당 지장(西堂 智藏, 709~788)으로부터 법을 이었습니다.

두 스님은 ‘북악의 남악척(北岳義 南岳陟)’으로 불릴 정도로 통일신라 하대 선불교를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선문은 홍척 스님이 먼저 개산했지만, 선법을 먼저 전한 이는 도의 스님입니다. 스님은 조계종의 종조이기도 하지요.

   
▲ 양양 진전사 도의선사탑.

가지산문 초조·조계종 종조 도의

도의 스님은 왕 씨로, 지금의 서울 부근인 북한군(北漢郡) 출신입니다. 어려서 출가한 스님은 선덕왕 5년(784)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스님은 육조 스님이 선을 펼쳤던 보단사(寶檀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조계산 보림사(寶林寺)로 가 육조 영당에 참배하고 홍주 개원사(開元寺)에서 서당 지장 스님의 법맥을 잇습니다. 이어 백장 회해(百丈 懷海, 720~814) 스님에게도 인가 받습니다. 이 때 백장 스님은 스승 마조 스님의 법맥이 모두 동국의 승려에게 가게 되었다고 탄식했다 합니다.

도의 스님은 입당구법 37년 만인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했지만 곧 은둔의 길을 택했습니다. 교종에 심취해 있던 당대 불교인들이 스님이 펼쳐 보인 선법을 ‘마어(魔語)’라고 비방하자 “아직 선법의 시기가 오지 않았다.”(최지원 찬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명(智證大師寂照塔碑銘)>며, “신라 왕성(王城)을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설악산에 진전사를 짓고 운둔한 것이지요. 스님은 이곳에서 40여 년간 주석하며 선법을 펼 시기를 기다리다 염거(廉居, ?~844) 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입적했습니다. 스님이 펼친 선법은 손상좌인 보조 체징(普照 體澄, 804~880) 스님 대에 이르러 비로소 무르익어 가지산문으로 꽃핍니다.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시원 ‘도의선사탑’

도의 스님이 주석했던 진전사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에 그 터가 남아있습니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둔전사지(屯田寺址)로 알려졌을 뿐 우리나라 선불교의 시원지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다 1975년 단국대학교 박물관이 도의선사탑 일대를 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陳田’이라 새겨진 기와를 발굴하면서 진전사의 옛터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절터에는 보물 제439호 도의선사탑과 국보 제122호 삼층석탑, 약간의 주초석만 남아있을 뿐 옛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삼층석탑 앞으로 난 길을 따라 700m쯤 거슬러 오르면 사리탑이라 하기엔 낯선 모습의 도의선사탑이 육조와 마조의 선맥이 이 땅에 제대로 펼쳐졌는지 묻는 듯 천 년 세월을 뛰어넘어 묵묵히 순례객을 맞이합니다.

도의선사탑은 마치 석탑을 보는 듯합니다. 석탑과 같은 모습의 2층 기단 위에 팔각형 탑신을 올린 탓이지요. 불탑도 원래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묘탑이니 불탑의 형식을 빌려 승탑을 조성한 것이겠구나 생각해 보니, 낯선 모습도 수긍이 됩니다. 도의선사탑은 우리나라 석조 부도의 시원으로 평가받습니다.

도의 스님은 조계종의 종조입니다. 종헌에 “본종은 … 조계 혜능 조사의 증법손(曾法孫) 서당 지장(西堂 智藏) 선사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도의 국사(道義 國師)를 종조(宗祖)로 하고…”라고 밝히고 있지요. 2001년부터 이듬해까지 강원문화재연구소가 도의선사탑 일대를 발굴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탑지 1개소, 건물지 9개소, 축대 시설 등을 확인했습니다. 지금 이곳에는 새로 복원한 진전사가 법등을 다시 이어가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지은 일연 스님 출가본사

도의 스님 주석 이후 역사는 《삼국유사》를 지은 보각국사 일연(普覺國師 一然, 1206~1289) 스님이 이곳 진전사에서 출가했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도의선사탑 일대를 발굴조사할 때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각종 기와류와 자기류가 다수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조선시대까지 사찰이 경영되었음을 짐작할 뿐입니다.

   
▲ 양양 선림원지.

도의 스님의 부촉을 받은 염거 스님이 주석했던 곳은 설악산 억성사(億聖寺)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님은 억성사에 주석하며 항상 일심(一心)을 닦고 밝혀서 삼계(三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였다고 하지요.

염거 스님이 머물렀던 억성사는 소림암지(少林庵址) 또는 선림원지(禪林院址)로 추정할 뿐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소림암은 속초 신흥사 동쪽에 있던 산내암자였는데, 일제 강점기 이전에 폐사됐다고 합니다. 양양 선림원지가 억성사지일 것이라는 견해는 <홍각선사탑비명(弘覺禪師塔碑銘)>에 “함통(당 의종의 연호. 재위 859~873) 말에 다시 설악산의 억성사로 가서 … 금당과 불전을 이루었다.”는 내용에 근거한 것입니다. 생전에 가장 인연 있는 절에 사리탑과 탑비를 세운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선림원이 억성사일 가능성이 큰 것이지요.

화엄종 사찰이었다가 선찰이 된 선림원

양양 선림원지는 진전사지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20km, 찻길로 28km 쯤 떨어진 양양군 서면 황이리 미천골에 있습니다.

미천골은 입구에서 골짜기 안쪽 불바라기 약수까지 편도만 15km에 이를 정도로 계곡이 깊습니다. 이 계곡의 이름인 ‘미천(米川)’은 선림원과 관련 있습니다. 절에서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은 물이 계곡을 따라 하얗게 흘러내렸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지요.

미천골휴양림 매표소에서 1km 남짓 계곡을 따라 오르면 길 왼쪽 축대 위로 선림원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선림원은 홍각선사 이관(弘覺禪師 利觀, 810~880) 스님이 주석했던 선종사찰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화엄종사찰이었습니다. 1948년 한 벌목공이 이곳에서 범종을 발견했는데, 종신 안쪽에 새겨진 명문에서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順應, ?~?) 스님의 이름이 확인된 것이지요.

해인사 창건 순응, 선림원 범종불사 동참

순응 스님은 의상(義湘)~상원(相元)~신림(神琳)으로 이어지는 교맥을 이은 화엄학승입니다. 순응 스님은 범종불사에 동참한 대중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던 듯 명문에 ‘상화상 순응 화상(上和上 順應和上)’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왕실 후원으로 해인사를 창건할 정도로 애장왕으로부터 깊은 존경과 신임을 받은 순응 스님이 범종불사에 관여했을 정도라면 선림원이 화엄사찰로 창건됐거나 적어도 선찰로 바뀌기 전에는 화엄사찰이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순응 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한 뒤 귀국해 지금의 해인사 자리에 초암을 짓고 수행했습니다. 당시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을 앓았는데, 스님의 도움으로 고쳤습니다. 그 후 순응 스님이 해인사를 크게 지으려 하자 애장왕이 인부를 동원해 도왔다고 합니다. 이때가 애장왕 3년(802)의 일입니다.

애장왕 5년(804)에 주성된 선림원지 범종은 성덕왕 24년(725) 주성된 상원사종과 혜공왕 7년(771)에 주성된 성덕대왕신종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존을 위해 월정사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불타 파손됐습니다. 파종은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돼 있습니다.

   
▲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홍각선사 금당·불전 등 중창

화엄사찰이었던 선림원은 도의 스님이 설악산 진전사에 주석한 이후 어느 시기에 이르러 선종사찰로 바뀌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홍각선사는 경문왕 13년(873) 경 억성사로 돌아와 금당과 불전을 새로 짓는 등 중창불사를 주도했습니다. 홍각 스님이 억성사로 돌아왔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이곳은 중창불사를 일으키기 이전에 이미 선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절터에는 보물 제444호 삼층석탑, 보물 제445호 석등, 보물 제446호 홍각선사탑비, 보물 제447호 승탑 등이 남아있는데, 모두 홍각선사가 중창할 무렵에 조성됐습니다.

그러나 선림원의 법등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산사태로 절이 매몰된 탓이지요. 1985년 절터를 발굴한 동국대학교 박물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금당지 주춧돌이나 다른 유물이 집단적으로 온전히 매몰되었고, 이후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900년을 전후한 어느 시기 산사태로 절터가 완전히 매몰된 후 재건되지 못한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현재 사역에서는 금당지와 조사전지, 승방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양양 선림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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