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6월 10일 바람조차 한 점 흔들림 없이 고요하던 그 날! 중앙고보 와 중동학교 학생인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황정환, 이동환은 이미 불같이 뜨거워진 손을 꼭 맞잡고 길을 나섰다. 일제의 통제 아래 이루어진 식민지 차 별 교육에 대한 반발은 더 이상 그들을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밤새 피로 써 내려간 격문과,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나 라의 상징인 태극기가 때를 기다리며 함께 요동치고 있었으리라.

종로 3가 앞 국장 행렬이 지나간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문을 외치고, 품속에서 고이 간직한 태극기를 꺼내 높이 흔든 그 순간, ‘6월 10일’의 기적 은 시작되었다. 5월 29일 조선민족대표인 김성수, 최남선, 최린 등과 함께 기 초해서 만든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각각 나누어 가진 뒤부터, 오늘을 기 다렸을 그들의 하루하루는, 일분일초는,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위태로웠을까?

이른 아침, 그날 그들이 걸었을 계동 언덕길을 올라 교문을 들어서면, 두런 두런 누가 들을까 조심스럽게 수런대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 라를 위해 붓 대신 잡은 격문과 태극기를 가슴에 품은, 그들의 조용하나 긴박한 발자국 소리도 들리는 듯해 나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1926년 6월의 뜨거웠던 그 하루,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앞섰던 젊은 피들이,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마음을 모으고 함께 손을 맞잡 고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향해 나아갔으리란 상상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을 벅차게 한다. 그날도 학교 교정의 붉은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넝쿨이 한창이었을 테고, 교문 옆 터줏대감 은행나무는 오늘처럼 살랑대는 바람으로 그들을 배웅했으리라.

중앙고 학생들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교가만큼이나 친숙하게 ‘독립군가’를 접하게 된다.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세대에게는 ‘독립’이 라는 말도 생소한데 ‘독립군가’라는 노래는 더욱 어색하고 낯설기만 했다. 그 런데 희한하게도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로 시작하는 첫 구절을 채 따라 부르기도 전에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 여러 번 박자를 놓치게 되 었다. 무엇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이 생소하고 낯선 가락 속에, 구절 속에 숨어 있기에 목이 메게 하고, 여러 번 감출 수 없는 울컥거림을 가져오는 것 인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곤 했다. 어쩌면 나의 가슴 속에도 6월의 햇살 아 래에서 뜨거운 가슴으로 ‘만세’를 외치던 중앙고보 선배들의 피가 흐르고 있 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 나를 무릎에 앉히고,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 을 하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 말씀하시던 외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투영 되어 그리 되었던 것일까?

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 외할아버지는 항상 검정 모자를 쓰신 모습이었다. 방학이 되어 몇 시간씩 기차를 타고 남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외가에 가면, 검 정색 모자를 쓰신 외할아버지가 주름진 얼굴 가득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겨 주셨다. 외할아버지의 머리에는 ‘무공수훈자회’라고 노란색 수가 놓인 검정 모자가 늘 함께였다. 외할아버지는 볼 안이 꽉 차도록 큼직한 왕사탕 하나를 내 입에 물려주신 뒤, 당신이 쓰고 계시던 모자를 내 머리에 씌워주셨다. 그리고 이내 여러 번 들어 나중에는 외울 지경에 이른 매번 같은 이야기 보따리를 슬며시 풀어내시는 거였다.

‘옛날에 말이다. 할배가 스무 살 쌩쌩하던 그 때 말이다.…’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 할아버지는 갓 스물을 넘긴 혈기 왕성한 청년이 되어 일촉즉발의 전쟁터를 마치 ‘전쟁 영화의 주인공’처럼 누비며 종횡 무진한다. 6·25 전쟁에 참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야기, 총알이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절대 절명의 순간 이야기, 그리고 그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훈장을 받은 이야기를 사탕이 다 녹을 때까지 들려 주셨다.

언젠가는 TV에서 현충일 기념식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잘 봐둬라! 이 할배 도 나중에 저기로 간다아이가. 저기는 나라를 위해 싸운 독립유공자도 있고, 장군도 있고, 대통령도 있제! 다 나라를 위해 싸운 훌륭한 사람들이 모이는 아 주 가기 어려운 곳아이가!’ 하고 주름진 얼굴 가득 환히 웃으시곤 하셨다.

내게 왕사탕을 물려주시며 매번 토씨 하나 바뀌지 않는 옛이야기를 들려주 시던 외할아버지는 당신의 말씀처럼, 이제 ‘대전 현충원 제1사병 묘역’에 누워 계신다. 외할아버지의 오랜 바람처럼, 늘 그곳으로 갈 거라던 말씀처럼, 그곳 에서 꽃피는 봄을 맞고 눈 내리는 겨울을 보내고 계실 것이다. 외할아버지께 서 좀처럼 벗지 않고 금쪽같이 여기시며 자랑스러워 하셨던 검정 모자는, 할 아버지가 가신 지 다섯 해가 지났지만 외가 대청마루 위 정중앙을 차지하고, 방학이면 외할아버지 대신 우리를 맞이한다.

돌이켜보면 학생의 신분으로 두려움 없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중앙고보 선배들과, 약관의 나이에 가족과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간 외할아버지가 모 두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피와 눈물로 세 운 나라에서 우리는 편안히 공부를 하고, 우리의 미래를 꿈꾸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 3·1운동의 터전 위에 쌓아올린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6·10 만세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이들과, 어린 나이에 미래 를 알 수 없는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가족을 위해 싸웠을 외할아버지는 어 쩌면 모두가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그때 그분들의 나이와 그리 차이 없는 오늘의 나는, 그분들이 가졌던 꿈을 잊고 나만의 안일을 쫓는 삶을 살 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진다.

그들이 가고자 했던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또 어떤 곳이었을까? 흐드러지게 벚꽃이 만개하는 모습을, 여름날의 쨍한 매미소리를, 가을의 사락대는 낙엽 밟기를, 겨울 날 뜨끈한 아랫목에서 군고구마 한입의 달 콤함과 옛 이야기 한 자락의 평화로움을, 피붙이와 함께하는 그러한 소박한 일 상이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아니었을까? 대단한 부귀영화를 위해 나아감이 아 니라, 내 피붙이와 소박하게 누리고 살 수 있는 세상, 내가 살고 있는 내 나라 를 지키고자, 밤을 밝히고 목숨을 걸고 주저함 없이 나아갔을 것이다.

교정 한 켠 자리한 6·10 만세운동 기념비 앞에 서서 옷깃을 여미고, 잠시 눈을 감아 본다. 이른 시간 내 곁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데 누군가 내 어 깨를 감싸는 듯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켜낸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또 다시 내일을 살아가야 할 이들을 위해 소중히 지키고 가꾸어야 할 것에 대한 무게감이 나를 그리 만드는 것일 게다. 내가 지금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이 그들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오늘의 우리는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충실히 하루를 채워가고 지 켜야 할 책임의 짐을 지고 있는 것이라는 사명감에 더욱 숙연해진다.

다가오는 추석에는 온 가족이 외할아버지를 뵈러 대전 현충원에 갈 계획이 다. 외할아버지의 묘비 위에 그토록 자랑스러워하셨던 무공수훈자회 모자도 씌워 드리고, ‘독립군가’를 나지막이 불러 드리면 외할아버지는 내가 볼 순 없 으나 분명 어딘가에서 허허 하고 너털웃음 지으시며 반기시리라.

6·10 만세를 목 놓아 부른 중앙고보의 선배와, 총알이 빗발치는 사지에서 총을 다잡았던 약관의 외할아버지와 같은 앞선 이들이 이루어 낸 독립된 나 라에서, 오늘도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살아갈 수 있어서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그 마음을 안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충실히 살기 위해 6·10 만세 운동 기념비 앞을 힘차게 지나간다. 발걸음을 옮기는 내 등 뒤로 그날의 외침이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중앙고보 300여 명의 뜨거운 함성이 메아리 되 어 오래오래 귓가를 맴돌며 나의 뒤를 따른다.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주의 일본이다.

이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조민영| 중앙고등학교 2학년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