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동쪽 편에 큰 산이 있다. 서운산이다. 높이는 547.6m에 불과하지만 들판에 우뚝 솟아있어 아주 우람하다. 백두대간에서 나누어진 금북정맥(錦北正脈)에 속한 산이다. 백두대간은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속리산에서 한 줄기 지맥이 서북쪽으로 뻗어있다. 그 산맥은 칠장사가 있는 칠장산에서 다시 나누어진다. 북으로 가는 한남정맥(漢南正脈)은 한강에 이르고, 남으로 뻗은 금북정맥은 서운산을 거쳐 수덕사가 있는 가야산으로 향한다.

서운산 산마루에 떨어진 빗물이 서쪽으로 흐르면 내 집 옆을 지나 아산만에 이른다. 그러나 그 산마루에서 동쪽으로 흐르게 되면 진천, 청주를 거쳐 세종시에서 금강 본류와 합류한다. 금북(錦北)정맥이란 이름이 거기서 나왔다. 그 후 물은 공주, 부여를 지나 군산에서 바다와 만난다. 한 치 차이로 전혀 다른 여행을 한다. 참 불평등하다. 우리의 태어남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물은 빙빙 돌아가도 도는 줄을 모르고 불평도 없는 데 우리는 가난의 고통을 알며 부유한 이웃을 부러워한다.

 

나옹 스님이 이름 지은 서운산과 청룡사

서운산(瑞雲山)이란 이름은 아름답다. 상서(祥瑞)로운 구름의 산. 서운산은 구름이 많다. 비가 그치면 골짜기에서 흰 구름이 일어 산을 타고 올라가 정상을 가린다. 비가 오지 않아도 종종 흰 구름이 산 정상에 걸려있다. 아름답고 신비스럽다. 그래서 서운산일까? 아니다. 청룡사 사적비에는 그 이름을 갖게 된 내력이 소개되어 있다.

나옹(懶翁)이 여기에 와서 지혜의 해가 거듭 빛나고 자비의 구름이 광채를 냄에 이곳에 신비한 징조가 있겠다 싶었는데 과연 꽃비가 내리고 용(龍)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미소 지으며 절을 창건하여 청룡사(靑龍寺)라고 이름 짓고 산 이름을 서운산이라고 했다.

이를 알고 나서는 흰 구름이 서운산 정상을 에워싸고 있을 때면 ‘혹 서운이 아닐까?’, ‘혹시 청룡이 올라가지 않을까’ 하며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난 아직 서운도, 청룡도 보지 못했다. 정말 용이 올라가지 않았는지, 아니면 용이 도인의 눈에만 보이기 때문에 내 눈에 뜨이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근래 《나옹록》을 보며 서운(瑞雲)이란 내가 종종 보는 그런 구름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옹록》에는 ‘서운’이란 제목의 시가 두 편이 있다. 그 중 용(龍)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한 편이 좀 더 상황에 맞는다.

문득 비상한 참 경계가 나타나니 忽得非常眞境現

밝고 밝은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었구나. 明明日月暗昏蒙

어찌 구태여 용화회(龍華會)를 기다리랴. 何須待望龍華會

한 줄기 상서로운 빛이 허공을 가득 채웠네. 一片祥光塞大空

오도송이다. 기록에는 나옹 스님은 인도 승려 지공(指空) 화상으로부터 법을 전수받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시를 보면 서운을 보며 나옹 스님에게 어떤 깨달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깨달음이 온전한 것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말이다.

이 시를 읽으며 다소간 흐뭇했다. 서운이나 용이나 모두 환(幻)일 뿐이다. 메아리요 그림자다. 만일 나옹 스님이 서운과 용을 말하고 끝을 맺었다면 그림자와 메아리의 근원을 드러내지 못하고 법상에서 내려간 꼴이니 부끄러운 짓이 아닐 수 없다.

▲ 탕흉대를 새겨넣은 바위.

탕흉대를 만나다

이곳에 이사 온 몇 년 간은 평소의 습관대로 주말마다 서운산에 올랐다. 청룡사, 은적암을 거쳐 주봉에 오른 후 청룡사로 곧바로 내려오는 코스를 좋아했다. 가을이 되고 날씨가 선선해져 산행하기 좋은 날 나는 바로 하산하지 않고 능선을 따라 걸었다. 2km 쯤 걸었을까. 한 봉우리에 올라보니 아래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아!’ 나는 감탄했다. 참으로 뻥 뚫린, 시원한 광경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 그리고 내 집 지붕도 보였다. 멀리 서해 바다도 보였다. 한참동안 산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간식을 먹기 위해 봉우리 가운데 쯤 있는 낮고 펑퍼짐한 바위 위에 앉았다. 문득 울퉁불퉁한 바위 표면에 새긴 글씨가 눈에 들어 왔다. 한자였다. 초서체의 글이어서 해독할 수 없었다.

무슨 자일까 궁금했다. 둘러보니 좀 떨어진 곳에 ‘탕흉대(蘯胸臺)의 유래’라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나는 이 봉우리에 탕흉대란 이름이 있음을 그제야 알았다. 안내판의 글을 읽어 내려가며 나는 전율했다. 《한서(漢書)》에 “탕을 구하는 것은 바람을 계류하고 그림자를 포박하려 하는 것과 같아 끝내 그 뜻을 이룰 수 없다〔求之蘯蘯 如繫風捕影 終不可得〕.”는 내용이 있다. 이를 인용하여 탕흉대의 ‘탕’을 설명하고, 《장자(莊子)》에 나오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가슴에 일어나지 않는다〔喜怒哀樂 不入於胸次〕.’를 인용하여 ‘흉’을 설명했다. 탕흉대는 공(空), 무염청정(無染淸淨)의 상징, 바로 자성(自性)자리, 진심(眞心)이었다.

탕흉을 달리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안내판의 글은 넓은 평원에 당당(堂堂)하게 서있는 산을 바라보며 자성자리를 깨닫도록 일깨워주고 있었다.

난 쉽게 탕흉대를 떠나지 못했다. 산 아래로 넓게 펼쳐진 들판과 내가 사는 동네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탕흉대 아래에 내가 사는구나!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온통 하늘만 보이는 들판 가운데에서 살며 ‘허공으로서의 나’를 잡지 않았던가? 이제는 서운산을 바라보며 공, 무염청정의 자성자리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참 공부하기 좋은 곳이로구나!”

최운초(최명돈) | 《눈을 부릅뜨고 와 귀를 가리고 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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