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내가 일하던 회사가 문을 닫았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에 이은 전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를 이겨내지 못했다. 얼마 후 나는 41년간 살아온 서울을 떠났다.

‘내 나이 58세. 이제 직장생활은 끝이 났다. 지금부터는 전원생활을 하며 프리랜서로 살아보자.’

처자가 서울에 살고 일감도 서울에 있으니, 서울에서 먼 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마침 일을 하면서 생각해 놓았던 지역이 있었다. 안성의 남쪽으로, 한 시간이면 서울 강남에 갈 수 있는 위치였다. 세 줄짜리 광고가 실린 생활정보지를 들고 이 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바로 느낌이 왔다.

‘이 집이구나!’

서운산 청룡사를 지나 흘러 내려오는 청룡천을 옆에 둔 들판 가운데 집이다. 동쪽에 서운산이 외외(巍巍)하게 버티고 있고 남쪽으로 위례산, 성거산이 있다. 북으로도 큰 산이 이어져 금북정맥을 이룬다. 그 큰 산들이 가까이 있으면 답답할 것이다. 다행히 그 산들은 멀리 있다. 그래서 집 옥상에 올라가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광활함을 느낀다.

‘호호탕탕(浩浩蕩蕩)이 바로 이것이지.’

 

하늘에서 공(空)을 배우다

1981년 여름 보림선원을 처음 찾았을 때 백봉 김기추 거사는 가르쳤다.

“그 몸은 네가 아니다. 그 몸을 쓰는 놈은 따로 있다. 보고 듣고 말하는 놈은 따로 있다. 그것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다. 허공과 같다. 그러니 그것을 찾으려 하지 말라. 그것인 줄 알고 쓰면 된다. 네가 무엇을 하든 ‘허공으로서의 내’가 하는 것임을 알고 해라. 그게 공부다.”

얼마나 알기 쉬운가? 사대(四大)도, 오온(五蘊)도 없다. 이는 백봉 거사가 삼장(三藏)을 공부하지 않은 것에 이유가 있다. 절을 술이나 마시는 곳으로 알던 거사는 어느 날 무자화두를 참구하기 시작했고, 반년 정도 지나 대오했다. 그는 불교의 이론〔敎學〕에 무지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쓰는 평이한 단어로 선(禪) 도리를 가르쳤다.

그래서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주일간의 철야정진이 끝난 후 나는, 주변의 사물을 인식하고 나의 육체를 이끄는 것이 바로 그 자리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이해했고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때부터 하늘은 나의 수행방편이었다. 실상 모든 것이 공(空)하지만, 사대도 오온도 세상도 모두 공하지만 텅 빈 하늘만큼 공함을 실감하기 좋은 방편은 없었다. 틈틈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파란 하늘 너머 끝이 없는, 빛도 사라져 검은 허공을 생각했다. 지구가, 태양계가, 은하가, 우주가 둥둥 떠 있는 허공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몸을 둘러보았다.

‘사대의 이 몸에 속지 말아야지! 오온에도 속지 말아야지!’

마음이 허상을 보이듯 하늘 또한 이런 저런 것으로 그 공간을 채운다. 들판의 넓은 하늘은 커다란 캔버스가 된다. 그 캔버스에 그려지는 그림을 감상하며 나는 하루를 보낸다.

낮에는 그 캔버스에 푸른색이 칠해져 있고, 그 위에 흰 구름이나 검은 구름이 그려진다. 군데군데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맑은 날에는 마당에 의자를 놓고 그저 하늘을 바라본다. 검은 구름이 지나가며 비를 뿌린 뒤에는 곳곳에 흰 구름이 따라가며 푸른 하늘과 멋진 조화를 이룬다. 하늘도 깨끗하고 흰 구름도 깨끗하다. 자성(自性)의 청정함이 느껴진다.

저녁 무렵에는 그 캔버스 위에 종종 장엄한 쇼를 펼치기도 한다. 그 때는 캔버스라기보다는 스크린이라는 말이 적절하다. 그 쇼의 화려함과 빠른 변화는 마치 영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과 같다.

 

비가 오다 개다 하는 날 저녁에는 흔히 무지개가 선다. 도시에서는 무지개의 일부만을 볼 수 있지만 들판에서는 반원의 무지개 전체를 볼 수 있다. 서운산을 배경으로 세워진 장엄한 아치는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 석양도 종종 멋진 풍광을 만든다. 붉은 해가 지평선을 넘어갈 때는 온 동네를 붉게 물들인다. 아주 맑은 날은 지는 해도 붉지 않다. 금빛으로 빛나며 넘어간다. 그 때는 나의 몸도, 집도 금빛으로 물든다. 그 금빛이 참 부드럽다. 구름이 적당이 있을 때면 저녁노을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비가 오고 날이 개면 청룡천을 따라 걸으며 저녁노을을 감상한다. 장마철에 날이 개며 만들어지는 노을은 때로 그 장엄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수용’하라는 스승의 가르침

나의 스승도 이런 자연 풍광을 즐겼다. 스승은 말년에 지리산 선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봄을 보냈다. 스승은 지리산의 봄을 감상하며 학인들에게 ‘일체를 수용해라. 그러면 모두 너의 것이 된다.’고 가르쳤다.

전부 내 수용이라. 산이 높아. 좋아! 물이 흘러, 깨끗한 물이 졸졸졸 하고. 좋다 말이여! 오늘 햇볕이 좋아. 어느 것 내 수용 아닌 것이 없어. 이 걸 뭐라고 표현하겠노? 내 재주로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어. 경치가 이리 좋다 말이여. 이거 내가 쓰고 있잖아? 이런 도리를 알면 ‘사람으로 태어난 게 이렇게 행복스러울 수가 없다’고 생각이 돼요. 행복이 무엇이냐 말이여? 그만 그대로가 진리의 나툼인데, 우리의 몸뚱이도 진리를 나투면서 같이 어울려서 같이 쓰는 거라. 그 걸 수용하는 거라. 산이건 달이건. 산을 샀어. 산을 샀는데 물이 그대로 따라와. 물값이 없어. 산을 샀어. 달이 환해. 달이 그대로 따라와, 돈 한푼 안 주어도. 그러니 어느 거 하나 내 수용 안 되는 것이 없어.

허공 중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환(幻)이다. 지리산의 산천초목도 환이며, 동산에 둥실 떠오르는 보름달도 환이다. 푸른 하늘도 환이며,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떠가는 흰 구름도 환이다. 저녁노을과 무지개도 환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환을 인식하는 사대와 오온도 모두 환이다. 환이 환을 쳐 환을 부수어 버린다. 환이 사라지니 환의 앞 소식, 그 자리뿐이다. 환이 없으면 어찌 공부를 할까?

최운초(최명돈) | 《눈을 부릅뜨고 와 귀를 가리고 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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