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족산사고 수호사찰 강화 전등사.

역사의 현장 갑곶돈 지킨 탱자나무

강화역사박물관 안에는 400년을 살아온 탱자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높이 4m, 밑 둘레 1m가량 되는 이 탱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된 보호수입니다. 강화지역은 탱자나무가 야생에서 자랄 수 있는 북방 한계선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탱자나무에는 외적의 침략을 막으려는 우리 선조의 바람이 깃들어 있습니다. 강화성에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외곽에 울타리 삼아 심은 탱자나무 중 한 그루지요.

탱자나무가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은 갑곶돈대 경내에 있습니다. 돈대는 주변 관측이 쉽도록 높고 평평한 땅에 설치한 소규모 군사시설입니다. 강화도 해안가에는 5진(鎭), 7보(堡), 9포대(砲臺), 53돈대(墩臺)의 군사시설이 있었는데, 효종의 북벌 계획과 숙종의 국방력 강화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고려와 조선이 강화도를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화해협, 즉 강화도와 김포 사이 바다는 물 흐르는 속도가 빠르고 갯벌이 드넓어 적이 쉽게 상륙할 수 없습니다. 강화해협을 염하(鹽河)라고도 부르는데, 거센 바다 물살이 마치 흐르는 강과 같다고 해서 지은 이름입니다. 강화도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을 쉽게 통제할 수 있고, 해로로 호남·호서지방의 풍부한 물자를 수월하게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외침에 맞서 장기전을 펼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곳이지요.

호국의 최후 보루 강화도

몽골군이 침략해 오자 고려 고종이 즉위 19년(1232) 강화로 천도를 단행하고 유라시아를 아우른 당대 최강국 몽골에 맞서 39년간 항전한 것도, 조선 인조가 가족을 이끌고 이곳에서 후금(뒷날의 청나라)을 상대로 항전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지리적, 군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화는 근대에 들어서도 호국의 보루였습니다. 프랑스 함대가 일으킨 병인양요(1866)와 미국 아시아함대가 쳐들어온 신미양요(1871), 일본 군함이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 침투해 벌어진 운요호 사건(1875) 등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침략의 마수를 드러낸 곳이 강화도였습니다.

▲ 강화 선원사지. 실제 선원사지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고려대장경 조성과 선원사지

선원사지는 갑곶돈에서 직선거리로 8km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선원사지는 불보살의 위신력으로 몽골군을 물리치려고 조성한 고려대장경판을 보관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한동안 잊혔던 선원사지는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지표조사를 하면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조사단은 이곳에서 주춧돌, 보상화무늬전, 범자명 기와, 지붕에 얹었던 잡상 등을 확인했다지요.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벌었지만 선원사라고 확정할 만한 고고학 자료가 출토되지 않아, 실제 선원사지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습니다.

고려대장경을 판각한 장소도 선원사에 설치된 대장도감에서 판각했다는 설과 대장도감에서는 경판을 조성하는 전체 계획을 수립·총괄했을 뿐 실제 판각 작업은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했다는 설 등 여러 이설이 있습니다.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의 원찰로 선원사가 창건된 때는 고종 32년(1245)이고, 대장도감이 처음 설치된 때는 고종 20년(1233) 입니다. 또 선원사가 창건될 당시 고려대장경 경판의 90% 이상을 판각한 시점이어서 선원사에 대장도감이 설치됐다 한들 이곳에서 전체 대장경판을 판각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지요.

국찰 버금가는 대몽항전기 최대 사찰

판각된 고려대장경판이 처음 보관됐던 장소도 선원사가 아니라 강화 도성 서문 밖에 있던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이었습니다. 고종이 대장경판당에 나가 대장경판 완성을 축하하고 16년간의 판각을 마무리했다는《고려사》의 기록으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장경판은 그 뒤 선원사로 옮겨졌다가 조선 태조 7년(1398)에 지천사(支天寺)로 이운된 뒤, 다시 합천 해인사로 옮겨집니다.

선원사의 위치도 논란입니다. 사적 제259호로 지정된 선원사지는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 있지만, 일부 학자와 향토사학자는 “선원사 옛터는 부의 남쪽 8리에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2권 <강화도호부> 기록을 근거로 선원면 선행리 충렬사 부근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선원사는 대몽항전기 국찰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습니다. 진명국사 혼원(眞明國師 混元, 1191~1271), 원오국사 천영(圓悟國師 天英, 1215~1286), 자오국사(慈悟國師, ?~?), 원명국사 충감(圓明國師 沖鑑, 1274~1338), 죽간 굉연(竹磵 宏演, ?~?) 등 당대의 국사와 고승이 주지 소임을 맡았던 것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원사는 조선 태조 7년(l398) 훼철된 뒤 그 터마저 잊혔습니다.

▲ 정족산사고. 1930년대 훼철된 것을 1998년 복원했다.

강화의 정수리 정족산과 삼랑성

선원사지에서 나와 84번 지방도를 따라 남쪽으로 10km 남짓 내달리면 정족산(鼎足山)에 다다릅니다. 정족산은 “강도(江都)는 서울의 목구멍이고, 정족은 강도의 두뇌”라 칭할 만큼 중요하게 여긴 곳입니다. 단군의 세 아들 즉, 삼랑(三郞)이 정족산에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는 천년 고찰 전등사(傳燈寺)와 고종 46년(1259)에 지었다는 고려가궐(⾼麗假闕) 터,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를 보관하던 정족산사고 등이 있습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는 조선이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한 것을 빌미로 군함 7척과 함재 대포 10문, 군사 1000여 명으로 강화도를 쳐들어왔습니다. 갑곶돈으로 상륙한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한 달여 간 강화도를 점령했지만, 이곳 삼랑성에서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패퇴했습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물러나면서 강화부 관아 부근에 있던 외규장각 등에서 고도서 345권,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 갔습니다. 삼랑성 동문 부근에 있는 ‘양헌수승전비(梁憲洙勝戰碑)’는 당시 조선군의 승리를 기념해 세운 비입니다. 양헌수승전비를 지나면 곧 전등사 대조루가 순례객을 맞이합니다.

▲ 정족산사고 수호사찰이었던 강화 전등사.

정족산사고 수호사찰 ‘전등사’

전등사는 정족산사고를 지키는 수호사찰이었습니다. 숙종 45년(1719)에는 전등사 최고 승려에게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摠攝)’이란 직위를 주었는데, 1910년까지 이런 전통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전등사 실록수호총섭 휘하에는 승군 50명이 배속됐습니다.

정족산사고는 영산전 뒤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150m가량 올라가면 있습니다. 정족산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장사각(藏史閣)과 왕실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璿源寶閣)이 있었습니다. 정족산사고는 효종 4년(1653) 11월 마니산사고(摩尼⼭史庫)가 불타자 남은 역대 실록과 서책을 옮겨 보관하고자 새로 지은 사고입니다. 마니산사고에는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에 있던 네 사고 중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전주사고의 실록이 보관돼 있었습니다. 정족산사고에 있던 실록은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관돼 있습니다. 장사각과 선원보각 두 건물은 1931년 이후 훼철됐다가 1998년 복원됐습니다.

전등사는 소수림왕 11년(381)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합니다. 창건 이후 고려 중기까지 역사는 전하지 않습니다. 고려 원종 7년(1266) 중창됐습니다. 충렬왕 8년(1282)에는 왕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인기(印奇) 스님에게 부탁해 송나라 대장경을 이곳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정화궁주는 이때 옥등(玉燈)을 절에 시주했는데, 이 때문에 ‘전등(傳燈)’이라는 절 이름을 갖게 됐다 합니다.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5년(1613) 불탄 것을 지경 스님 등이 중창을 시작해 인조 3년(1625) 마무리 지었습니다. 전등사가 사고수호사찰이 된 이후 전등사는 왕실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영조 25년(1749) 총섭 초충(楚充) 스님이 절을 중수할 때는 임금이 불사에 쓰인 재목 대부분을 시주했다고 합니다. 전등사는 일제 강점기 때 강화와 개성 등 6개 군의 사찰 34곳을 관리하는 31본산의 하나였습니다.

광해군 13년(1621) 다시 지은 전등사 대웅전은 처마 네 귀퉁이를 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상으로 유명합니다. 맡겨두었던 돈과 집물을 가지고 달아난 주모가 독경 소리를 듣고 죄를 참회할 수 있도록 대웅전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조각해 놓은 것이라 하지요.

▲ 신진사대부들의 척불론에 맞선 함허 기화 스님이 주석했던 강화 정수사.

배불론 맞선 함허 스님 주석도량 ‘정수사’

전등사에서 나와 정수사로 발길을 옮깁니다. 정수사는 전등사에서 7km 남짓 떨어져 있습니다.

정수사는 선덕왕 8년(639) 회정 대사가 창건했다 합니다. 그 뒤 세종 8년(1426) 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 스님이 주석하며 중창했습니다. 스님은 법당 서쪽에서 샘물을 발견하고, 절 이름을 ‘맑은 물’을 뜻하는 ‘정수(淨水)’로 바꾸었다 합니다.

함허 스님은 조선 건국을 즈음해 일어난 신진사대부의 불교배척론, 즉 배불론(排佛論)을 반박하며 불교를 지키려 한 당대의 선지식이었습니다.

고려 말 정국 주도 세력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타락한 교단을 국가의 근간을 뒤흔드는 폐해 요소로 보고 배척했으며, 불교 교리를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불교를 “임금도 아비도 모르는” 비윤리적인 가르침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고 사상과 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입니다.

정도전은 윤회설, 인과설, 지옥설 등 20개 항목을 성리학 이론에 근거해 비판한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는 등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습니다. 정도전의 배불론은 고려 시대까지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은 불교가 새로운 왕조 조선에서 몰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대 불교계는 불꽃처럼 일어난 배불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왕조의 유일한 왕사이자 건국에 크게 공헌했던 무학 자초(無學 自超, 1327~1405) 스님마저도 사찰 토지와 종파 통폐합, 왕사·국사 제도 폐지, 노비 몰수, 도첩제 강화 같은 태종대의 불교탄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현정론(顯正論)》과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을 지어 배불론을 반박한 함허 스님의 대응은 단연 돋보였습니다.

《현정론》은 배불론자들의 비판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불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을 바로잡기 위해 쓰였습니다. 《유석질의론》은 불교의 입장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비교해 두 종교의 교법은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므로 공존해야 한다는 점을 논술한 책입니다.

스님은 오계를 유교의 오상(五常, 즉 仁, 義, 禮, 智, 信)에 비교하거나 “삼신불(三身佛)이 주역의 무극, 태극, 음양오행과 통한다.”고 주장하는 등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이 서로 통한다는 유불융합(儒佛融合)의 논리로 신진사대부의 배불론에 맞섰습니다.

▲ 강화 정수사에 있는 함허 기화 스님의 사리탑.

유불융합의 호교론 ‘현정론’과 ‘유석질의론’

스님이 이처럼 배불론에 적극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출가하기 전 고려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유학을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스님의 유불융합의 호교론(護敎論)은 조선의 배불정책에 맞서 불교의 법등을 이어가려 한 노력이자, 절체절명의 탄압 속에서 생존 논리를 정립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정수사 요사 뒤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100m가량 오르면 함허 스님의 사리탑이 있습니다. 탑은 높이가 164cm로 그리 크지 않습니다. ‘조선 시대 남자 평균 키가 161cm 정도였다 하니 함허 스님의 체구도 사리탑만 했겠다.’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사찰이 그렇지 않을까만 이번 순례에서 참배한 사찰에는 소중한 것을 지키려 한 옛 선인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습니다. 선원사지에는 전란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 한 호국의 의지가, 전등사에는 나라와 왕실의 역사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정수사에는 배불론으로부터 정법을 지켜내려 한 고민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소중한 것을 지켜내려 한 옛 선인의 발원과 실천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수사 뒤편 마니산 산등성이에 앉아 숭유억불로 점철된 조선 시대와 왜색불교가 판치던 일제 강점기,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복원하려 일어난 불교정화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함허 스님의 사리탑을 보며 곱게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처럼 애틋함이 시나브로 밀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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