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주 거돈사지 전경. 사적 제168호. 사진 이창윤 기자.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는 은섬포(銀蟾浦)라는 포구가 있었습니다. 조세로 거둔 곡물을 모아 수도인 개경이나 한양으로 실어 보내는 조창(漕倉) 중 하나인 흥원창(興原倉)이 설치됐던 곳이지요. 흥원창은 17세기 기능을 잃기 전까지 한강 수계를 대표하는 조창 중 하나였습니다. 뱃길을 따라 흥원창으로 물산(物産)이 모여들고, 사람이 오갔으니 법천사, 거돈사, 흥법사 같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인근지역 사찰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크게 일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법천사지는 흥원창이 있던 곳에서 직선거리로 2.5km 남짓 떨어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습니다. 옛 법천사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를 느티나무 한 그루만이 발굴조사로 속살을 드러낸 옛터를 묵묵히 지키고 있을 뿐, 절터는 황량하기 그지없습니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 아픔 간직한 지광국사탑

법천사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국보 제101호인 지광국사탑입니다. 이 탑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반출됐다가 3년 뒤 돌아왔지만 그 뒤에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경복궁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포탄에 맞아 옥개석 위로 산산조각나기도 했지요. 지광국사탑은 2016년 3월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로 옮겨져 전면 해체·보수 중입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6월 지광국사탑을 원래 있던 법천사지로 이전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을 탑비와 함께 볼 날도 머지않았겠지요?

▲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국보 제101호. 사진 문화재청.

우리나라 유식학의 태두는 원측(圓測, 613~696) 스님입니다. 스님은 현장 스님이 도입한 신유식을 깊이 연구해 규기 스님과 함께 양대 학파를 형성합니다. 규기 스님에서 비롯된 유식학파를 자은학파(慈恩學派)라 부르고, 원측 스님을 정점으로 하는 학파를 ‘서명학파(西明學派)’라 부릅니다. 자은학파가 중국에서 번성한데 비해, 서명학파는 신라의 도증(道證, ?~?), 태현(太賢, ?~?) 스님으로 이어졌습니다.지광국사탑은 지광 국사 해린(智光 國師 海麟, 984∼1067) 스님의 묘탑입니다. 해린 스님은 법천사(法泉寺) 관웅(寬雄) 스님에게 출가해 유식학을 배웁니다. 덕종, 정종, 문종의 존경을 받은 스님은 문종의 초청으로 궁중에서 유심(唯心)의 묘의(妙義)를 강의했습니다. 이 때 시중 이자연의 다섯째 아들이 출가했는데, 그가 금산사에 주석하며 법상교학을 널리 떨친 혜덕왕사 소현(慧德王師 韶顯,1038∼1096) 입니다. 문종 12년(1058) 국사에 추대된 스님은 개성의 현화사(玄化寺)를 중심으로 유가업(법상종) 교단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1067년 법천사로 돌아가 머물던 스님은 3년 뒤 10월에 입적했습니다. 왕은 ‘지광’이라는 시호와 ‘현묘(玄妙)’라는 탑호를 내렸습니다.

우리나라 유식학은 고려 초에 들어 혜소 국사 정현(慧炤國師 鼎賢, 972∼1054), 지광국사 해린, 혜덕왕사 소현 스님 같은 이들에 의해 크게 일어납니다. 법천사는 당시 현화사, 금산사, 칠장사 등과 함께 유가업의 중심도량이었습니다.

▲ 원주 법천사지 탑전. 조화가 꽂혀 있는 곳이 지광국사탑이 있던 자리다. 사진 이창윤 기자.

고려 초 유가업 부흥 이끈 도량 법천사

법천사는 세 스님과 모두 인연이 깊습니다. 혜소 국사는 왕명으로 이곳 법천사에 머물렀고, 지광국사는 출가·열반한 곳이 법천사입니다. 혜덕왕사는 스승 지광국사와의 인연 때문에 법천사에 머물거나 오갔을 것입니다.

법천사를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신라 중원경(中原京, 지금의 충주) 출신 진관 선사 석초(眞觀 禪師 釋超) 스님이 경순왕 2년(928) 이 절 현권 율사(賢眷 律師)에게 계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때 창건된 사찰로 추정할 뿐입니다.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지광국사 입적 이후 법천사가 어떻게 법등을 이어갔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태종 7년(1407) 각 고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자복사(資福寺) 88곳을 정할 때 화엄종 사찰이었다는 것과 조선 초 학자였던 유방선(1388∼1443)이 이 절에 머물며 권람,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등을 가르쳤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재건되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 보물 제19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이창윤 기자.

모조품이 자리를 대신한 원공국사탑

법천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남한강변의 또 다른 대찰이었던 거돈사지가 있습니다. 직선거리로는 3km, 산길을 따라 타박타박 걸어도 1시간 반이면 충분히 다다를 5km 남짓한 거리입니다.

법천사지에서 거돈사지를 잇는 산길은 ‘천년사지길’로 불립니다. 원주시가 도보길로 조성한 원주굽이길의 제10구간입니다. 천년사지길은 거돈사지를 지나 단강리까지 이어집니다.

거돈사지는 황학산과 현계산 사이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천년사지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절터에 다다르면 큰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끄트머리에 서서 천 년 풍상을 겪은 느티나무가 순례자를 맞이합니다.

법천사를 지킨 느티나무처럼 이 느티나무도 거돈사의 성쇠(盛衰)를 지켜봤을 테지요. 너른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불상을 모셨던 석조대좌, 원공국사탑비, 금당터와 강당터, 승방터 등이 제자리를 지키며 이곳이 한 때 풍경소리 가득했을 사찰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절터 제일 깊은 곳, 거돈사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원공국사탑이 서 있습니다. 지대석을 제외하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진품을 그대로 재현한 모조품입니다.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그랬듯 일제 강점기 와다 미노루(和田稔)라는 일본인이 제멋대로 일본으로 반출했던 원공국사탑은 광복 후인 1948년 반환되고서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탑과 짝인 탑비는 거돈사지 한쪽 구석에 덩그마니 자리하고 있지만 이 또한 제자리는 아니라고 합니다. 원래는 원공국사탑 부근에 있었다 하지요. 100년 전 헤어진 탑과 탑비는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 원주 거돈사지 전경. 사적 제168호. 사진 이창윤 기자.

법안종 심인 이은 천태학승 원공국사 지종

탑의 주인공인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 智宗, 930~1018) 스님은 고려 태조 20년(937) 개경 사나사에서 인도승 홍범 삼장(弘梵 三藏)에게 출가했습니다. 스님은 천태학승으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부터 교학승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원공국사는 광종 10년(959) 오월(吳越)에 유학해 법안종의 3조인 영명 연수(永明 延壽, 904~975) 문하에서 2년 동안 수학하고 심인(心印)을 전해 받았습니다. 원공국사는 이어 7년 동안 천태산 국청사에 주석하며 정광(淨光) 스님으로부터 《대정혜론(大定慧論)》을 배웠습니다. 스님은 국청사(國淸寺)에 주석하는 마지막 2년 동안 《대정혜론》과 《법화경》 등을 강의하여 명성을 떨쳤다고 합니다.

법안종의 맥을 이은 스님이 천태교학으로 일가를 이룬 것은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한 영명 연수 스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원공국사는 귀국한 뒤 광종으로부터 대사(大師)와 중대사(重大師), 경종으로부터 삼중대사(三重大師), 현종으로부터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제수 받았습니다. 현종 3년(1012) 왕사가 된 스님은 6년 뒤 거돈사로 주석처를 옮긴 후 곧 입적했습니다. 현종은 스님을 국사로 추증하고 원공(圓空)이라는 시호와 승묘(勝妙)라는 탑호를 내렸습니다. 지종 스님은 천태종에 《천태사교의》를 전해 중국 천태종 발전에 기여한 제관 스님과 함께 고려 초기 천태학을 이끌었던 고승이었습니다.

거돈사는 통일신라 말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을 뿐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림대 박물관이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네 차례 발굴 조사해 고려 초 대찰 면모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원공국사 이후 선종을 중흥시킨 정각국사 지겸(靜覺國師 至謙, 1145~1229) 스님이 거돈사에 머물기도 했으나, 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다시 중창되지 못했다 전할 뿐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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