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해 전만해도 한국사회에서는 ‘소셜 포비아’, ‘햄버거 포비아’, ‘계란 포비아’, ‘기부 포비아’ 등 ‘포비아(phobia)’ 라는 단어가 익숙할 만큼 자주 등장했다. ‘포비아’는 어떠한 상황 또는 대상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혐오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불안이 극대화되어 '병적인 공포증 또는 혐오증'을 의미한다. 포비아를 가진 사람은 두려움의 상황 또는 대상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박적으로 그 상황 또는 대상을 두려워하고 불안해서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하며,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증상을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의 포비아라는 단어가 사회적 이슈로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사회가 전반적으로 불안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불안은 모두가 체험하고 있는 일반적인 감정이기도 하지만 병리적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불안현상이 단순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불안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여 단번에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까지 현대의학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호흡 따라 덜컹거림은 잦아 들고

여기 호흡명상으로 불안을 극복했고, 계속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2015년 장미꽃이 한창 만개하고 있던 5월로 내가 진행하는 명상프로그램에서였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에 아담하고 왜소한 체구였다. 그 모습dl 마치 바람에 따라 하늘거리는 가을 들녘의 코스모스를 연상케 했다. 60대 후반이었지만 옅은 주름과 맑은 피부, 수줍어하는 소녀 같은 모습이 10년은 족히 젊어보였다. 그녀는 몸이 너무 약했다. 특히 팔과 다리 쪽 관절이 약해서 무리하게 움직이지 못했고, 조금만 불편해도 몸이 잘못될까 노심초사하였다.

한 번은 다리가 이상하게 ‘뚝’ 하면서 시큰함을 느꼈는데, 점점 심해져 삼사 일은 꼼짝 못하고, 내딛지도 못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우습게 알았다가 몇 번 그렇게 큰 고통을 겪고 나니 매사에 조심스러워지고 작은 통증에도 불안하고 초조해지고 걱정이 앞섰다. 평소에도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걱정하는 자신을 알고 벗어나고자 명상공부를 찾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내 호흡 지도와는 상관없이 아랫배에 집중하여 복식호흡을 하고자 했다. 들숨 날숨에 맞춰 배의 팽창과 수축을 억지로 느끼려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벅차고 힘들었다. 그래서 아랫배에 집중하여 호흡하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는 동료들을 보며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초조해하며 걱정했다.

어느 날, 그녀는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 문득 ‘호흡을 해봐야지’하고는 아랫배에 손을 올려놓고 숨을 쉬는데, 아랫배의 움직임이 정확히 느껴졌다. 앉아서 할 때는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애를 쓰며 힘들었던 아랫배의 움직임이었는데, 누워서 할 때는 의도적으로 배를 부풀리고 꺼뜨리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정확한 느낌이 손끝에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집에서 호흡명상을 할 때는 앉아서 하기 보다는 누워서 아랫배에 집중하는 호흡명상을 즐겨하였다.

프로그램 6회기 때, 그녀는 평소처럼 호흡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쉬는 호흡이 불안정했다. 한 번에 내쉬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너 번으로 나뉘어 덜커덩거리듯이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호흡을 통해 지금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불규칙한 자신의 호흡을 관찰하며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였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덜커덩거리는 호흡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동시에 그녀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호흡은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항상 변화한다. 꽃잎이 느낀 그 덜커덩거리며 불규칙했던 호흡은 꽃잎의 마음상태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꽃잎은 호흡명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상태를 점검할 수 있었고, 마음의 상태에 따라 호흡이 변화된다는 사실도 스스로 통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잠을 잘 이룰 수 없을 때는 별을 세는 습관이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 ‘내가 편안한 잠을 자 본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잠자리가 늘 불편했다. 오직 ‘자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더 잠을 이루지 못해 아침이 늘 무겁고 피곤했다. 그렇게 그녀는 호흡명상을 만나기 전까지 수없이 별을 세거나 약에 의존하며 잠을 청했다. 그런데 들숨 날숨을 알게 된 그녀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꽃잎은 매일 잠자리에 누워서 아랫배 호흡에 집중을 하였다. 그리고 만트라와 같이 ‘나는 편안하고 행복합니다.’라는 긍정적인 말을 호흡에 붙여 계속 되뇌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어 눈을 뜨면 아침이 찾아왔다. 그 날 아침은 60평생 맞이했던 다른 아침과 매우 달랐다. 아주 한숨 푹 자고 난 기분으로 아침을 가볍게 맞이할 수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무수히 싸워 왔던 잠과의 전쟁도 끝났고, 무겁고 피곤했던 아침과도 영원한 이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 잠 못 이루던 그녀가 별을 세었을 때도 호흡은 하고 있었다. 그 때의 호흡과 지금의 호흡은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직 ‘그 때는 몰랐고, 지금은 호흡에 주의를 집중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신경안정제 투약 20여 일에서 2일로 줄어

명상공부를 시작하던 초기에 꽃잎은 거의 매일 신경안정제를 먹었다. 그래서 그녀는 약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약을 먹은 날은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달력의 동그라미의 숫자를 보니 3일 내리 먹다가 하루 정도는 참아보기를 반복하며 한 달에 한 20여 일은 약을 먹었다. 호흡명상을 한 지 두 달이 지났을 때 그녀는 거의 매일 복용했던 약을 3일에 한 번 복용하게 되었다. 호흡명상을 하면서 불안 초조함이 감소하여 점차 그녀는 약을 찾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호흡명상을 하고 나면 뿌옇게 보였던 눈과 흐릿했던 정신이 맑아져서 마치 비 온 뒤 맑게 개인 날씨와 같았다. 호흡명상 프로그램이 끝나갈 때 쯤 그녀의 달력에는 두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불안 초조함을 느낄 때마다 자동적으로 약을 찾게 했던 그녀의 의식이 3개월 동안 호흡명상을 수련하면서 이제는 약보다 호흡을 찾게 된 것이었다.

두 달 동안 호흡명상을 하면서 꽃잎은 자신의 변화에 따른 일상의 고요함과 행복감에 흠뻑 빠져 있었다.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는 일상에 감사함을 느끼며 호흡명상 수련에 적극적이었던 그녀에게 갑자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예전과 같이 아무 방책 없이 약을 먼저 찾지는 않았지만, 호흡명상이 곧 길이라고 생각했던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마음이 힘들 때 호흡명상을 하면 빨리 해결 될 수 있다는 굳은 믿음마저 부서져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는 자신을 위해 호흡명상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계속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호흡명상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고, 계속 정진해 나갔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을 보내고 난 그녀의 얼굴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물론 그녀의 불안 초조 걱정의 뿌리가 완전히 뽑힌 것은 아니었다. 그 대신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아차리고 그럴 때마다 주의집중을 호흡으로 되돌리면서 점차 마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었다.

호흡을 외면한 채 살아왔던 지난 시간보다 호흡에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였던 넉 달이 그녀에게는 많은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그 경험은 ‘불안’이라는 바람이 부는 대로 휘둘렸던 꽃잎을 똑바로 서게 하는 보호막이 될 것이다. 어린왕자가 자신의 소행성에 있는 소중한 장미 한 송이에게 씌어준 유리관과 같이.

용진 스님 | 비·채명상심리상담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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