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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인 의심, 당신이 피해자
2019년 12월 19일 (목) 12:48:12 박정미 .

내가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 선배네 집에 갔을 때 벽에 붙은 〈보왕삼매론〉을 봤을 때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로 시작하는 보왕삼매론의 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을 끌었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해, 사회에 대해 미숙한 내 눈에도 세속의 잣대를 초월한 듯 당당하고 무심한 내용으로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글을 베껴 쓰기 시작했다.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 뜻밖의 방해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등등 구절구절이 좋았다.

그런데 마지막이 좀 이상했다.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내가 이 말을 머리로 이해한 것은 10여년, 진정 마음으로 이해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다.

부처는 삶에서 이미 자신을 오해하거나 악의를 가지고 음해하는 일을 당했을 때 침묵으로 대응했고, 그 방법은 결과적으로 유효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어떤가. 여기 억울함을 당한 두 사람, 그리고 두 영화가 있다.

나는 두 영화를 보면서 집단의 의심과 거짓이 광기와도 같다고 느껴 두렵고 소름이 돋았다. 내가 그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두렵다.

더 헌트(2012, 덴마크, 토마스 진터베르그 감독)

   
 

“아이는 거짓말을 못한다.”

사실일까? 만약 아니라면, 그렇게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어른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주인공 루카스는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유치원 교사다. 이혼 후 고향으로 와서 새 여자친구를 사귀며 앞으로 아들과 함께 살 행복을 꿈꾸고 있었다. 고향에는 어릴 적 친구들이 있고 또 유치원생들과 지내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잘 맞는 일이다.

그런데 루카스를 좋아하는 유치원생 여자아이 클라라가 거짓말을 하게 된다. 루카스가 너무 좋았던 클라라는 루카스에게 진한 키스를 했고 루카스가 그것을 제재하니까 민망한 마음에 원장에게 가서 거짓말을 한 거다. 그 전에 클라라의 오빠와 친구들이 외설영상 장면을 보여줬고 그걸 기억한 클라라가 자신이 루카스에게 당한 장면이라며 너무 소상하게 설명을 한다.

결국 원장은 루카스를 해고하고 클라라와 상담한 상담사는 클라라의 말을 믿고 학부모의 동의를 받아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한다. 원장이 학부모들을 모아놓고 아이들이 성학대를 당한 흔적이 있는지 살펴보라며 “아이들은 거짓말 안해요”라고 한다.

‘순수’와 ‘아이’를 동일시해온 어른들은 성추행에 가까운 일을 당했다는 아이들의 상상력에 조금도 의심 없이 루카스를 향해 손가락질을 시작한다. 학부모들의 집단 고소로 일은 경찰로 넘어가고, 마을의 어른들은 똘똘 뭉쳐 루카스를 괴롭힌다. 루카스의 아들이 아버지가 걱정돼 찾아 왔는데도 집안으로 돌이 날아들고 그가 키우던 개가 살해당한다. 또 마을의 상점에서는 그들에게 물건을 팔지 않았고 루카스와 사귀던 여자친구도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해 헤어지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어이없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관객은 굉장히 불편한 마음으로 고스란히 봐야 한다. 왜냐하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꼭 우리 곁에 있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아이들이 입을 모아 진술한 지하실에서 벌어졌다는 성추행이, 루카스의 집에는 지하실이 없다는 것이 경찰에 의해 밝혀지면서 한바탕의 소동으로 끝맺음한다. 불기소 됐지만 누구하나 사과하지 않았고,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이 망가져버렸다.

묵직한 주제를 밀도 있는 드라마로 풀어놓은 이 영화로 65회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감독은 미국비평가협회상, 런던비평가협회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죄 많은 소녀(2017, 한국, 김의석 감독)

   
 

엄마 없이 아버지와 살며 우울한 표정을 한 영희는 친구 경민의 자살로 갑자기 의심 받기 시작한다.

반 아이들에 대한 경찰 조사가 이어지며 말에 대한 정제 없이 툭툭 내뱉는 영희의 말이 점점 증거가 되며 자살을 조장한 듯 혐의가 조여온다. 사실 소녀들은 특별히 동성애가 아니라도 자신들끼리 누가 더 친한지를 경쟁하기도 하고 그런 사소한 것을 사생결단하듯 하기도 한다. 그게 사춘기, 그리고 미성년의 특성이다.

경민이 왜 자살했는지 특별히 이유가 나오진 않지만 영희가 그의 죽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확신도 없다. 그저 경찰은 경찰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자신의 역할을 해서 마침표를 찍고 임무를 충실히 해낸 결과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반 아이들은 갑자기 앞다퉈 경민의 죽음에 관여하며 의혹만으로 영희를 희생양 삼는다. 영희와 친한 한솔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증언으로 영희를 벼랑으로 몰아가고 그 말만 믿고 영희의 빈 집에 떼로 몰려가 신발장의 신발을 찢어가며 희희덕 대는 아이들. 그들은 영희가 등장하자 기세등등해서 영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등장인물 중 가장 희생양이 필요한 것은 경민의 엄마다. 경민이 죽기 전에 일에 바빠 딸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죽고 나니 자신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라는 면죄부가 가장 필요한 인물. 그는 집요하게 영희를 따라 다니며 괴롭힌다.

영희는 억울함이 극에 달해 경민의 장례식에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대신 목소리를 잃고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다. 입원한 영희에게 찾아와 입원비를 내주며 경민이 입던 옷을 갖다주는 등 괴롭힘을 멈추지 않는 경민엄마.

학교에 다시 복귀한 영희,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그를 보며 반 아이들은 죄책감과 함께 그가 결백하다는 데 동의해 이번에는 영희 편을 들어 담임을 괴롭힌다.

한솔은 영희에게 자신이 거짓증언을 했다는 고백을 하고 영희는 그를 용서한다. 경민 엄마와 한솔, 영희가 함께 식사하는 장면은 영화의 압권이다. 주인공 영희 역의 전여빈 배우와 경민 엄마 역의 서영화 배우는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이 장면에서 보여준다.

그리고 영희가 학교로 복귀한 첫날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영희가 수화로 인사를 하는 장면은 영화의 복선이자 클라이막스다. 감독의 내공이 이 한 장면에서 드러난다는 데 소름이 돋는 명장면이다.

박정미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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