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수묵기법으로 한국 가람의 진경을 펼쳐 보이며 불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화가 이호신 화백. ‘고구려 고분벽화의 힘찬 동선, 고려불화의 엄정한 선율과 극세필을 구사하며, 겸재와 단원의 맥을 잇고 있다’는 미술학계의 찬사를 받고 있는 그를 은평구 역천동에 마련된 그의 화실에서 만났다.

이호신 화백의 화실은 인공적인 조형이 극히 절제된,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 공간이었다. 화실 여기저기에는 자연과 문화를 좆는 ‘순례[그는 자신의 답사와 여행을 순례라고 했다]’ 과정에서 그린 몇 점의 그림들이 놓여 있었고, 서가에는 화첩과 한지가 빼꼭히 꽂혀 있었다. 순례하며 보고 듣고 만난 것에 대한 그림과 글을 담고 있다는 화첩은 상당한 분량이었다.

“그림은 가슴깊이에서 힘을 쏟아야 그려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연을 밟으며 곳곳을 다니 다 보면 많은 감동과 힘이 솟곤 합니다. 사물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보면 애정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볼 때에는 그저 하나의 사물로 보이던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그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어요.”

이 화백이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 것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반부터이다. 유홍준(문화재청장)의 문화유산답사팀에 합류해 길눈을 익히고 안목을 넓히면서이다. 그때부터 시작한 답사는, 이제 자연과 문화 속에서 진경(眞景)을 찾는 구도자의 순례가 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요즘은 주로 혼자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납니다. 가능한 많은 자연과 문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배낭 속에는 화첩과 붓펜이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림과 함께 몇 마디씩 메모도 합니다. 우리 주변의 자연과 문화, 사람의 이야기를 마치 그림일기를 쓰듯 그렇게 그려가고 있습니다.”
그는 화폭에 담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곳에서 며칠을 묵으며 일대를 답사하고 스케치한다. 사진을 찍듯 한 곳만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돌며 자연의 흐름을 읽고 그 기운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고 싶은 게 가람이라면, 전체 모습을 보기 위해 인근 높은 산을 올라가기도 하고, 늦은 밤 산에서 길을 잃은 적도 많다. 온 몸으로 체감한 모습을 옮겨놓기 위해서다. 그렇게 그린 진경에는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전시되고 있는 ‘운주사 천불천탑골’이 있다.

“특히 오래된 전통 가람을 그리다보면 우리 선인들의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꼭 그 자리에 그렇게 가람배치를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을 읽을 수 있어요. 그 자리에 꼭 있을 수밖에 없는 터에 주변자연과의 조화로움을 꾀한 놀라운 통찰력과 지혜는 무절제한 현재 건축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절대 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어요.”

‘이호신의 그림을 보고, 그 매력에 이내 빨려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변화무쌍하고 아름답게 채색된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깊은 감흥에 빠져든다.’(이화여대 강우방 교수의 평)는 평론이 떠오른다. 사실 그는 현대문명의 이기로 잃어버린 우리의 오감을 그림을 통해 찾아주고자 하는 작가정신을 가지고 있다. 전국, 세계 곳곳을 다니며 그 숨결을 느끼고 화폭에 옮기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연과 우리의 삶과의 조화와 그 질서를 찾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필요한 정서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라면 이유입니다. 그래서 깊은 산에 피어있는 이름 없는 풀꽃, 시골집 담 밑의 꽃밭, 언덕바지를 걸어가는 할머니, 밭 매는 시골아낙네, 돌장승, 고인돌 등등 이 땅의 사람들과 풀과 꽃과 나무와 새와 동물에 이르기까지 화폭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절차탁마(切磋琢磨)의 화가라고 말한다. 화가로서 예술적 미를 앞세우기보다 진실한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 이상을 그림의 소재로 삼는 일이 없는 사실주의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구도의 정신세계, 나눔의 세계, 상생(相生)의 세계, 무소유의 생활철학은 늘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생활 속에서 실감하는 생활철학이 된지 오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해 온 자신의 삶과 작업과도 그대로 상통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 흐르는 대로 이 시대가 담아야 할 진실들을 그림으로 그려보겠다’는 이호신 화백. 자연과 문화에서 출발해, 그것의 보편적 기운을 포착하려는 한국화가. 역천동 화실을 나오며 그의 화폭에 담겨질 담론들이 우리에게 또 어떤 모습으로 현현(顯顯)할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오종욱 | 월간 선원 편집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