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빠른 사회다.

나는 이렇게 빠르게 달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간혹 멀미가 나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회에 아무렇지도 않게 적응해 산다. 이 정도면 괜찮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질주에 동의하지 않고 느릿한 삶을 원하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찌질이’, ‘루저’라고 손가락질 하기도 한다. 다만 자신들의 삶을 천천히, 성실하게, 남과 비교하지 않고 사는 이들의 등 뒤에서 말이다. 이건 좀 곤란하다.

여기 남들이 보면 절망적인 삶이지만 자신은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있다. 하나는 가벼운 톤으로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처절하게 그렸다.

스틸라이프

(우베르트 파졸리니 감독, 2013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수상)

여기 많은 이들의 눈에 찌질하게 보이는 ‘존 메이’가 있다. 그는 구청 직원으로 연고가 없이 사망한 이들의 장례업무를 맡고 있다.

 

한두 평 밖에 안 되는 좁은 업무실에 홀로 앉아 며칠 전에 죽은 채 발견된, 남겨진 사진에서도 친구라고는 고양이 뿐인 여인의 추도사를 쓰는 존. 그는 외롭게 죽은 이들의 마지막을 지킨다. 그들의 유품을 꼼꼼히 정리해서 작은 단서라도 찾아 장례식에 올 수 있는 이들에게 연락한다. 하지만 혼자 쓸쓸히 죽어간 이답게, 대부분은 주변인들조차 고개를 돌리고 장례식도 쓸쓸하게 치르게 된다.

존 메이는 사진과 유품을 바탕으로 한 줄이 될 뻔한 추도사를 한 편의 소설처럼 아련하게 써내려간다. 유족이라고는 없는 장례식에서 목사는 추도사를 읽으며 의아하게 존 메이를 쳐다본다. 존 메이는 죽은 이의 종교를 고려하는 섬세함까지 보인다. 하지만 이 일은 나중에 비용을 낭비한다는 구실이 된다.

이런 일상 중 자신의 아파트 앞동, 그러니까 자신의 집과 마주 보이는 곳에서 한 남자가 언제 죽었는지 모른 상태로 발견돼 존 메이에게 업무가 전해진다. 자신과 같은 구조의 죽은 ‘빌리 스토크’의 집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그날, 존 메이는 해고를 당한다.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쓴다는 이유에서다. 이른바 ‘효율’에 벗어나기 때문이다.

죽음이 죽음을 위로하다

존 메이는 마지막으로 빌리 스토크의 일을 해결하겠다며 빌리를 아는 이들을 찾아다닌다. 빌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거친 싸움꾼이고 알콜중독자이며 노숙자, 바람둥이, 교도소를 내 집처럼 드나들던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에 나가 사람을 죽인 경험 탓에 알콜중독이 됐으며, 다친 전우를 들쳐업고 험한 산을 넘어 살려줬고, 딸의 사진을 모은 사진첩을 간직하면서도 딸에 대한 사랑을 숨겼고, 마지막으로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했다. 그의 드러난 것과 다른, 숨겨진 면이 드러나면서 빌리라는 인간이 퍼즐조각처럼 맞춰진다.

존 메이가 아낌없이 뛰어다닌 덕에 비로소 한 인간,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던 한 인간이 완성된 모습을 보였다. 빌리 스토크는 죽은 후에야 진면목을 보인 것이다.

빌리의 딸은 존의 진심어린 모습을 보고 감동해 “장례식 후 함께 차를 마시자”고 제안한다. 관을 연상시키는 좁은 공간의 업무실과 아파트에서 홀로 생활하는 존 메이는 그녀의 약속을 떠올리며 장례식 날 아침 새 옷을 입고 장례장소로 출발하는데, 그만 차에 치여 즉사하고 만다.

빌리 스토크의 장례에는 존 메이가 죽음을 전한 사람들, 아내와 딸, 전우들, 노숙자 동료 등이 모인다. 그 시각 같은 공동묘지의 한켠에서는 아무도 모른 채 존 메이가 묻힌다. 존 메이가 어려움을 무릅쓰고 지인들을 모은 빌리 스토크의 장례와 존 메이 본인의 장례가 너무 대조된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빌리의 지인들이 웃으며 헤어지고 빌리의 딸은 여러 번 뒤돌아보며 존을 찾다가 공동묘지를 떠난 뒤, 존 메이의 묘지로 하나 둘 사람들이 모인다. 아니, 사람이 아닌 유령들이다. 그들은 존 메이가 그 동안 수습했던 죽음의 주인공들이다. 누구에게나 한번밖에 없는 죽음, 존 메이가 없었다면 외롭게 살았듯 외롭게 맞았을 죽음을 성심껏 배웅해준 그를 영혼들이 배웅하고 있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삶을 잊고 살다보면 죽음까지도, 죽음을 대하는 자세까지도 잊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빠르게 질주하는 삶에서 추구하는 효율은 무엇이며, 우리가 외친 효율은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이냐고.

비우티풀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 2010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주인공 욱스발은 불법 해외이주자들의 일자리를 알선해주며 수수료로 먹고 산다. 그 일을 눈감아 달라고 경찰에도 상납을 해야 한다. 그는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지녔고 같은 능력을 지닌 멘토로부터 ‘그 능력으로 돈을 받지말라’는 말을 듣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갑자기 잃은 이들에게 죽은 이의 말을 전하며 용돈벌이도 한다.

 

그에게는 아직 어린 두 자녀가 있고 조울증으로 자녀를 돌볼 수 없는, 이혼한 아내가 있다. 더욱이 아내는 남편의 형과도 놀아날 정도로 자기 절제를 못하는 정신적인 환자이다.

그런 그가 병원에서 암이라는, 3개월 밖에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는다.

벼랑 끝에서 세상을 보다

그는 어떻게 보면 사회악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양심을 지키는 사람 같기도 하다.

불법체류자를 이용해 돈을 벌지만 아프리카 친구가 경찰에 단속되는 순간, 욱스발은 그를 지키려고 몸싸움을 하다 철창신세를 지기도 하고 결국 아프리카로 추방되는 친구를 위해 어린 아기와 남게 된 그의 아내 이헤를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는 밤마다 오줌을 싸고 식사 때마다 음식을 뱉어내는 어린 아들에게도 화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암 선고를 받은 후 남겨질 아이들을 위해 아내와 다시 생활을 합쳐 살아보지만 자신의 병을 치료하지 않고 불쑥불쑥 병이 재발하는 아내 때문에 아들이 상처받는 걸 보고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서 나온다.

불법체류 중국인들이 머무는 공장 지하실이 춥다니까 따듯하게 자라고 욱스발은 가스난로를 사다주는데 가스중독으로 중국인들이 몰살된다. 그는 자책하고 또 자책한다.

아프리카인 이헤는 욱스발의 집에서 욱스발의 아이들과 친해지며 자신의 아이를 돌보다가 결국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욱스발까지 돌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돌봐달라 부탁하며 자신이 짐승처럼 번 돈을 이헤에게 건넨다. 이헤는 그 돈을 받고 아픈 욱스발을 뒤로 하고 아기를 들쳐업고 가방을 싸서 집을 나선다. 하지만 캄캄한 저녁, 이헤는 욱스발의 집으로 돌아온다.

딸과 다정히 얘기를 나누고 이제 죽음의 순간, 자신이 얼굴도 못 본 아버지를 만나며 욱스발은 생을 다한다.

세상과 마주서게 하는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어디까지 절망스러울 것인지 암담하기만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엉망일 것 같았지만 다음 순간 그에게 닥친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진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인공 욱스발은 최선을 다한다. 세상에 남겨질 자신의 아이들에게 엄마보다 안전한 품을 만들어주려고 결국 이헤를 택한다. 아프리카에서 불법입국해 남편은 추방당하고 아기와 남게 된 이헤 또한 바르셀로나에서는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다. 외로운 이들끼리 죽음으로 꺼져가는 욱스발의 집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그렇게 함께 살 것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름다운 장면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감독은 제목을 왜 아름답다고 지은 걸까.

엔딩 음악인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깨달았다.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생략한 게 아닐까.

다른 이의 등을 치며 살아가는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양심을 지켰고 나 혼자 살기도 버거운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킬 수 있는 이들을 지키려고 했다.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다 간 한 인간.

그는 아름답다. 그가 떠난 세상은 여전히 화탕지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최선을 다하는 인간들이 있다면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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