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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3대 민족인권변호사
만해와 신간회 사람들①
2019년 06월 14일 (금) 11:31:26 한국불교선리연구원 .

나는 만해를 안국동 선학원으로 찾아간 일이 있다. 마주 앉아 점심으로 상치 쌈을 먹는데 만해가 말했다. “원, 세상에 육법전서를 읽어가며 독립운동 하는 꼴은 처음 보았으니 한 번 들어보오.”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동지들이 모두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인데 허헌(許憲)이 육법전서를 차입시켜 열심히 읽고 난 후 같은 감방 동지들에게 ‘아무리 보아도 우리가 한 일은 경범죄 밖에 안 되니, 고작 압류 아니면 과태료에 해당될 뿐이요’라 말하는 것이야.”

만해는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데 죄의 경중을 따져서 무엇하느냐 생각을 하니 앞에 있던 ‘목침’을 들어 한 대 쳐 주고 싶더라”고 했다.

유치장에 잡혀온 사람이 육법전서를 따지는 모습이나, 그 옆에서 화가 치민 만해의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가대소를 하니 입 속의 상치 쌈이 튀어 나와 만해의 얼굴을 그만 뒤집어 씌우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들어 보아도 상치 쌈이 튀어나올 일이다.

- 1973년 3월 20일 〈한국일보〉 중 요약

신간회 주요 간부출신인 허헌(許憲, 1885-1951) 변호사가 3·1만세운동으로 투옥된 민족대표들을 위해 법리를 조언해주던 모양이다. 겸상을 하던 중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연배가 한참 위인 만해 스님의 얼굴에 ‘푸흡’하고 상치를 쏟은 이는 이인(愛山 李仁, 1896-1979) 변호사이다. 호랑이 같던 어른의 안부를 여쭙고 같이 점심을 들다가, 민족의 정신적 지주라 할 어른의 면상에 그만 상치 폭탄을 투척하는 난감한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고문과 협박을 앞둔 감옥 속의 그 긴장된 분위기에 속에서 최후의 한 명까지 그리고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할 것을 외치며 자신을 위한 변호를 끝내 거부한 만해 스님이기에 이러한 대화가 이해되는 부분이다. 또한 박장대소로 웃으며 이러한 일을 회고할 수 있는 것은 신간회 중앙위원 출신이자 신사참배를 거부한 물산장려회장 이인 변호사(愛山 李仁) 이었기에 고문과 협박의 암울한 공포로 범벅된 감옥에 대한 기억을 가가대소(呵呵大笑)로 받아들일 수 있음직한 것이리라.

1919년 3·1만세운동과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던 당시, 민족대표자들 중에 체포 뒤의 겁박과 고문을 두려워하며 걱정하던 몇 몇 이들이 있었다. 만해 스님은 화장실에서 인분을 퍼 그들의 머리에 끼얹은 일도 있어 그러한 맥락에서 ‘목침’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위의 회고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한결 도움 될 듯하다. 비록 영어의 몸이 되셨지만 스님은 사식을 일절 받지 아니하였고, 변호사의 법정 변호까지 거부한 채 수감 생활을 하였다.

사람에 의해 일은 진행되며, 한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행적에는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된다. 허헌(兢人 許憲)과 이인(愛山 李仁), 그리고 기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김병로(街人 金炳魯)는 일제 강점기 3대 민족인권변호사로 명망을 얻은 인물들이다. 신간회 경성지회장을 역임한 만해 스님 주변 인물을 살펴보면서, 민족이 처한 현실상황을 가늠할 수 있기에 신간회의 주요 보직을 맡아왔던 이들 민족인권변호사 3인의 행적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인 변호사

광복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깊게 관여한 이인(李仁, 1896-1979) 변호사는 1922년 일본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1923년 경성부에서 의열단 사건 피고인을 위한 변호를 첫 시작으로, 6·10만세운동, 고려혁명당, 의열단, 원산파업, 소작쟁의, 신간회 민중대회의 건 등 민족운동사건의 변론을 주로 맡았다.

1925년, 갈돕회(고학생 상조회)의 총재를 맡아 남녀 고학생을 돕고자 노력하였고, 1927년 신간회의 창립과 아울러 그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신간회해소론이 제기되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로 조직을 구성하자고 피력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그리고 이듬해 1931년에 조선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다. 일본의 가혹한 정치를 법정에서 비판하여 한동안 변호사자격정지 및 정직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35년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비밀후원회를 조직, 재정 후원을 했다. 1936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1941년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1942년 11월 조선어학회를 후원한 이유로 구속(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 되었다. 광복 후 정부수립에 참여, 1948년에 초대 법무부 장관이 되었고 같은 해 법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고,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허헌의 46세 모습,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긍인 허헌 변호사

광범위한 법조지식을 바탕으로 기상천외한 논리를 제시하여 총독부 경찰을반발하게 만들기로 유명한 긍인 허헌(兢人 許憲, 1885-1951) 변호사는 1908년의 대한제국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일본에서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으나, 경술국치 이후 은둔하였다가 주로 독립지사들의 변호를 전담하고 노동자들의 임금 문제를 위해 무료로 변론하였다. 1919년에 조선변호사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3·1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지사들의 변호와 보호에 매진하였다.

의열단, 조선공산당 등과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무료 변론을 맡은 한편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는 한편, 공산당 승인의 건으로 체포된 인사를 위해 무료 변론을 맡았다. 1927년에 신간회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는데 좌익 진영의 대표로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신간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민족단일당 결성과 항일투쟁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좌·우 갈등 때문에 신간회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趙炳玉)이 허헌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1929년 11월의 광주항일학생운동이 봉기하자, 진압을 위해 학생들에게 행해졌던 잔혹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려고 안국동 사거리에서 신간회 중심의 민중대회 개최를 열기로 계획하였으나 일경에 의해 사전 발각되어 1932년까지 감옥에 수감되었다. 출옥 후 1943년에 해외의 단파방송을 청취하였다는 명목으로 단파방송밀청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된다. 1946년 11월에 남조선로동당 결성에 참여, 이듬해 12월에 남로당 위원장으로 활동했는데 미군정이 허헌 체포령을 발표했다. 김일성 권력장악에 지지를 표방하였고 1948년에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선출, 같은 해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직을 겸하게 된다.

가인 김병로 변호사

   
▲ 가인 김병로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광복 후 1945년에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한 김병로(街人 金炳魯, 1888-1964) 변호사는 1917년 조선변호사협회 회장과 조선인변호사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19년에 판사에 임용되어 부산지방법원 판사가 됐는데 1920년에 사임하고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변호사 개업을 시작으로 독립지사 관련의 사건을 무료로 변론했다. 그 중 신민회 해산을 목표로 일제가 총독 암살사건으로 조작해 105명을 유죄로 몰고 간 ‘105인 사건’의 항소심에서 99명을 무죄가 되도록 변론한 것이 유명하다. 그 밖에 대동단, 단천 농민 조합, 치안유지법 위반(여운형과 안창호 등), 흥사단, 6·10만세운동, 대한광복단, 소작쟁의와 수리조합 분규, 갑산화전민항일운동의 건 등이 있다. 1922년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하여 모금활동을 펼쳤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패한다.

1929년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과 회계장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조사를 맡았다.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 다수의 사상사건 법정투쟁을 통한 항일을 거듭하던 중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변호사 정직처분이 떨어졌고,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에 참여하고 좌파와 대화와 타협을 일관되게 시도하였고, 민족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목도한 현실을 바탕으로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를 하도록 주장하였다. 농민생활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가져 화전민과 농민들에 대한 사건 변호를 많이 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고 법무부 장관 소임을 맡은 이인의 적극적인 요구로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되고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다.

같은 뜻으로 활동하다 광복 후 서로 다른 길을 가다

1923년, 종로구 인사동에 김병로와 이인 그리고 허헌, 김용무, 김태영등과 함께 형사공동연구회(刑事共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특히 위의 글에서 언급한 3인의 민족인권변호사들은 공통적으로 신간회 활동을 하였으며 민립대학설립 내지 물산장려운동에 관여하였다. 주로 일반 소송에서 얻게 되는 수임료를 바탕으로, 독립지사들의 변호비를 대체하는 형식이었다. 법정에서 지사들의 변호를 위한 법 이론을 개발하고 독립지사의 가족을 돕기 위해 애를 썼다.

이념과 주의 그리고 사상의 실천적 방안 이전에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 민족의 독립이었음을 평소 만해 스님은 항상 강조하였다. 민족독립이라는 최우선의 과제가 존재하였더라도, 사실상 현실적 표출방식이나 장기간의 진로와 행보를 살펴본다면 사람마다 차이를 보인다. 여기 소개한 민족인권변호사 3인 모두 신간회 활동을 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동안 사상가, 독립운동가, 법조인,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민족의 인권과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 지니고 있던 가치관과 사상 노선의 차이만큼 광복 이후 진로 역시 확연히 달랐다.

이인 변호사는 초대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서울 광신상업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허헌 변호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로동당 최고위원, 김일성종합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김병로 변호사는 대한민국 초대・2대 대법원장, 법전편찬위원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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