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학원 중앙선원의 옛 모습.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은 선학원 창건 1백주년에 즈음하여 완공된 건물이다. 그래서 이 기념관을 가리켜 불교계에서는 그 애칭으로 선학원 백주년 기념관이라 부른다. 선학원의 상량식은 만해 스님 출소 직전인 1921년 11월 30일에 봉행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인 1921년의 일이다.

상량식 봉행의 네 달 후, 1922년 3월 30일과 4월 1일 사이, ‘선우공제회’의 발기를 위해 많은 고승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개최되었다. 연이어 1922년에 제 2회 임시총회(1922.11.3), 1923년에는 제 2회 정기총회(1923.3.29), 1924년에 제 3회 정기총회(1924.11.15)가 열렸다. 선우공제회의 제 3회 정기총회에서 만해 용운 선사는 임시의장으로 피선, 총회의 임원 선거 결과 수도부 이사로 선임되었다.

초기 선학원 본부는 두 개의 큰 방이 달린 법당과 요사채 2동의 큰 건물로 구성되었다. 수행도량에 ‘사(寺)’나 ‘암(庵)’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선학원(禪學院)’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일제에 의해 시행된 사찰령(寺刹令)과 사법(寺法)에 구속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더불어 선을 대중에게 가르쳐 보급한다는 데 그 뜻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가리켜 《선학원약사》(1986년, 범행 스님)에서는 “총독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종단 밖에 마련한 민족불교의 대피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학원의 이념적 정통은 선지식들에 의해서 사설(私設)된 선학원에 머물게 되었다.”라고 정의하였다.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선학원에 머무르던 만해 스님은 6·10만세운동 사전 검속으로 중앙선원 입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치르게 된다. 스님은 이듬해 1927년(49세)에 신간회 발기의 주역으로 참여, 중앙집행위원 및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었고 평소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불교청년회(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동맹’으로 개편한다.

스님께서 선학원에 머물며 활동했던 일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다양하다. 신간회 활동, 국채보상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교육과 계몽, 문학 창작 및 출판저서 등의 적극적인 활동을 하신 바, 길다면 길지만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시간에, 만해 용운 스님의 소중한 행적을 후대에 정확히 남기고자 대대적인 추모를 위해 안국동 40번지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선양사업을 위한 발기모임이 열렸다.

1970년대, 우리 근대사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온 선각자들에 대한 재조명과 전집 제작에 대한 사회적 추모열기가 있었다. 임정 대통령 박은식, 단재 신채호, 만해 스님 등에 대한 재조명과 전집 제작의 중요성 인식은 한국사회의 사상적 전환점과 그 맥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1978년, 만해 스님의 기일인 6월 29일 저녁 6시에 ‘만해 한용운선생 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를 위한 발기준비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에 앞서 같은 해 4월 25일, 발기준비회의를 위해 스님을 흠모하던 사회 각계 저명인사 20여 명이 모여 준비작업을 해왔던 바, 사업회에서는 각계 2백여 명의 발기인을 추대하고 만해 스님의 독립사상과 문학사상을 기리고자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왔다.

1979년, 3·1만세운동 1주갑(60년)이 되는 해와 겹쳐진 만해 선사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 스님의 업적을 선양하고 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다. 이에 맞추어 사회적으로 대규모 세미나와 강연회, 기념논문집을 간행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효당 범술 스님은 당시까지 미발표원고 47편을 더해 만해 용운 스님의 8만 장에 달하는 유고를 정리, 지난 1973년에 〈한용운전집〉(전 6권)을 신구문화사를 통해 이미 발행했던 차였다.

기념사업회는 1979년 3월 1일을 전후하여 서울시 중구 태평로 신문회관에서 700여 명이 모여 창립총회를 열었다. 기념사업회는 이날 만해공원 조성과 묘소 이전, 만해 동상 및 시비(詩碑) 건립, 만해문화관 설립, 만해사상 연수교육, 만해도서관 건립, 만해문화상 제정 등 주요 사업을 정하였다.

기념사업회는 1979년 6월 29일 오전 11시 30분 경, 재단법인 선학원에서 기제사를 봉행했다. 이튿날인 6월 30일에는 만해 스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해논문집〉을 발간해 탄신일인 8월 29일에 배포하기로 의결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10여 년 후에는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고증을 받아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있는 만해 스님 생가를 충청남도 도비로 복원하였다. 만해 스님이 말년에 주석하던 서울시 성북구 심우장은 지난 4월 8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다.

사찰령을 앞세운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 정책과 친일을 일삼던 사판계에 맞서고자 만해 스님을 구심점으로 이판계의 수도원으로 설립된 선학원이 중앙선원 대들보를 올리며 상량식을 거행한지 100년이 지났다. 옛 중앙선원이 있던 자리에는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이 들어섰다. 2018년 6월 2일 개관한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은 민족불교의 성지, 정화불교의 산실로서 한국 근현대불교의 구심점이었던 재단법인 선학원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설립조사와 역대 이사장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잇기 위해 건립되었다.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이 개관되기까지 만해 스님과 관련된 기념시설 건립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1년에는 만해연구회 기념관을 서울시 성북구 심우장에 건립하였고, 1989년에는 만해 스님 생가가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됐다. 또 1991년에는 생가에 ‘심우재’를 복원했고, 사우(祠宇)인 ‘만해사(萬海祠)’를 건립하였으며, 1997년에는 인제 백담사에 만해기념관(관장 마근)을, 1998년엔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내에 만해기념관(관장 전보삼)을 각각 건립하였다.

재단법인 선학원은 매년 만해 스님의 입적일을 앞두고 6월 한 달 간 학술제, 예술제, 추모제 등 민족불교 중흥과 불교계 독립운동을 이끈 스님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추모행사를 봉행하고 있다.

선학원은 올해도 원적 75주기를 맞이하여 6월 4일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만해홀에서 ‘만해 한용운과 독립운동’을 주제로 추모 학술회의를 개최한 데 이어, 6월 22일에는 추모예술제를, 6월 29일에는 원적 75주기 추모 다례재를 봉행한다. 독립지사 선양·추모사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 없을 것이다. 독립지사 선양·추모사업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지사의 정신을 후손에게 잇고, 민족 번영의 앞날을 이끄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만해 스님의 일흔다섯 번째 추모재를 지내며, 1945년 만해 스님 추모 1주기를 맞이하여 후학들이 스님을 기리며 지은 추모문을 읽으며 존경과 흠모의 심정을 느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오늘 선생님의 대기를 당하여 우리 교도일반은 이르지 못하는 미성이나마 이에 약례를 베풀어 선생의 뜻과 덕을 추념하는 의미에서 오늘 치제의 소성을 드리옵고 신불이 한 가지 돕는 명호와 3천만 우리민족이 한마음으로 받드옵는 이 뜨거운 열의로써 선생님의 고절단성이 끼쳐온 이 조업을 만대에 이어 길이하기를 약속하느니 이 뜻을 하찰하시고, 이 미성을 받드시와 유명이 한 가지 이 조국의 영원무궁을 위하여 돕고, 제불제천이 이 민족의 영세번영을 위하여 힘쓰기를 바라마지 않나이다. 돌아보건대, 약속한 그날이 와서 이 강토는 극망한 건설보에 소분의 차분은 있다 할지나 이미 약속된 우리 민족의 영광 있는 역사에 있어 암시된 그대로 탄탄히 건설의 한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선생님의 건국대강에 즉하고 유훈을 본받아 거듭 가득 실고 앞길을 향하여 매진불퇴하려고 하느니, 세계의 풍운이 걷힌 곳에 인류 미래의 새 사명이 움트고, 오늘 조선에 있어 이 과도적인 이 물결은 장래에 조선에 있어 힘차게 커날 성장의 소리인 까닭에 선생님은 후도의 불초를 너무 꾸짖지 마시고, 조국의 장래를 위하여 염려하는 뜻을 거두옵소서.

- 효당 최범술, 만해 선생 1주기 추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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