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교육기관 설립운동, 일제 방해로 실패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조선물산장려운동과 함께 1920년대 민족주의계열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경술국치 이후 전개됐던 국채보상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은 자금으로 조선인 교육기관을 설립하자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민족의 생존과 문화 창조, 번영과 향상을 성취하려면 민족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본 것이다.

1923년 3월 29일 오후 1시, 만해 스님은 민립대학 발기 총회가 개최된 종로청년회관으로 향했다. 이날은 제2회 ‘선우공제회’ 정기총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선우공제회는 1921년 11월 30일 선학원 상량식 넉 달 뒤, 1922년 3월 30일과 4월 1일 사이 발기를 위해 모였고, 그해 11월 3일 제2회 임시총회, 1923년 3월 29일 제2회 정기총회, 1924년 11월 15일 제3회 정기총회를 열었다. 선우공제회 발기와 총회, 그리고 정기회의에 참석한 스님 명단을 검토해보면, 만해 스님은 제2회 정기총회를 제외하고 주요 회의에 모두 참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우공제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는 임시의장으로 피선되었으며, 임원 선거 결과 수도부 이사로 선임되었다.

결국 민립대학 발기총회에 참석하느라 만해 스님이 선우공제회 정기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명단에 빠진 제2회 정기총회는 1923년 3월 29일에 열렸는데 같은 일자 신문보도에 ‘금일 민립대학 발기 총회’란 제목의 기사가 있다.

금일 민립대학 발기총회 하오 한 시부터 종로청년회관에서
조선초의 민학운동, 성황을 이룰 금일의 총회
세계 각국의 대학교, 이쳔오백 명을 수용하는 곳이 세계 각국에 륙십이처나 된다.
觀! 波蘭埃及等國 (보아라! 폴란드·이집트와 같은 나라들을)
- <동아일보> 1923년 3월 29일자 3면

▲ 민립대학발기총회를 보도한 신문 기사.

당시 고등교육을 향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전국 각지의 모금과 여러 계층의 관심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조선학생을 위한 전문대학과 종합대학교가 한 곳도 없었던 까닭에, 5년제 보통학교와 4년제 고등보통학교(이후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 편제로 개편)를 졸업한 조선학생이 대학에 가고자 한다면, 일본 중학교부터 다시 입학해야 했다. 그러므로 조선의 일반 가정에서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키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만해 스님은 1922년 민립대학을 세우고자 개최된 기성준비회에 참석했다. 기성준비회는 이듬해 3월 23일 민립대학 기성총회로 전환되었고 일주일 뒤인 3월 29일 서울 종로에서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 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 참석자는 법과·문과·경제과·이과(1기), 공과(2기), 의과·농과(3기)의 순서로 건립하기로 결의하고, 중앙부에 집행위원 30명, 감사위원에 7명, 기금보관위원 7명을 선정하였다.

민립대학 기성회는 4월 2일 오후 2시에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해 집행위원장으로 이상재, 상무위원으로 만해 스님 등 9명, 지방선정위원 13명을 선출했다. 4월 23일에는 상무위원을 5인으로 확정했다. 중앙부는 이후 전국 지방부와 해외 지방부를 통해 전국을 순회하며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경연회를 열어 모금활동을 하였다.

▲ 만해 스님의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선전 강연회(동아일보 1923. 4. 20. 3면)

민족의 실력 양성을 도모하던 노력은 사회주의계열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들은 당시 조선 상황에서 대학 진학이란 부귀한 가정만 가능하다 판단하고,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가정의 미취학 어린이를 위한 교육이 급선무라 여겼다. 따라서 야학과 강습소를 설치해 교육을 받지 못한 대다수 민중을 위한 민족실력양성운동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일제의 식민지 우민화 작업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전국적인 성원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참여 인사를 억압하는 등 저지에 나섰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은 결국 실패했는데, 학계는 실패 요인으로 일제의 치밀한 방해공작, 지진과 홍수, 가뭄으로 인한 모금의 어려움, 좌우 진영의 노선 차이, 경성제국대학 설립 등을 꼽고 있다. 

▲ 한수재(旱水災) 당한 동포를 돕는 선우공제회(동아일보 1928. 10. 10. 4면)

일제는 조선 학생에게 고등교육을 시키려는 교육운동을 정치운동이라고 판단했다. 일제는 민립대학을 예비적으로 일본 동경 동양대학 분교로 전환시킨 뒤, 일본 대학령에 분교 설치령이 없음을 근거로 설립이 무효화 되게끔 유도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자 민립대학에 일본인 학생 입학 허용이라는 조건을 강제하여 민립대학 설립 취지가 퇴색되도록 시도하는 한편, 당시 진행 중이었던 관립대학(경성제국대학)을 서둘러 설립하였다.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에 일본인 외 조선인 입학을 일부 허용하고, 민족 자금으로 설립한 민립대학이 사실상 배일사상을 키운다는 구실을 들어 강연회를 금지시키거나 해산 시키는 등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탄압하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928년〈조선독립선언문〉과 항일 격문을 뿌리며 동맹휴교를 강행했던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과 조선 학생의 항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충돌을 계기로 1년 뒤 학생의거가 일어났다. 광주에서 시작해 전국 194개교, 5만 4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전국 규모의 학생의거(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642명)로 확산된 1929년 학생의거가 일어난 지 올해로 해로 90주년이 된다.

광주 지역 학생모임인 ‘독서회’(구 성진회)와 ‘소녀회’는 식민지 우민화 정책과 편파적 교육, 민족 탄압과 차별을 강력히 비판하고 조국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1928년 6월 광주지역 동맹휴교운동 두 달 후인 8월 5일, 전라남도 소년연맹은 창립총회를 열고자 광주 증심사에서 비밀리 간담회를 개최했다. 증심사는 원래 1910년 11월 16일 임제종 운동을 위해 총회를 개최하고자 했던 장소이다. 비밀이 누설돼 참여자가 일본 경찰에 강제 연행되고 가혹한 취조 끝에 광주지법으로 넘겨졌다.

1920년대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좌절되고, 해방 직후 세계 최초로 이 지역에서 순수 민간모금으로 민립대학이 설립된 것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거니와 학생의거가 일어난 지 90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3·1만세운동과 6·10만세운동, 학생 무장 항거와 학생사회주의운동, 신간회(1927년, 경성지회장 만해)와 증심사의 역할 등 아직 밝혀야 할 할 부분이 많다. 입체적인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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