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간회원 언동의 건, 안국동 40번지 - 감찰기록 경종경고비(京鍾警高秘)>(1930.1.8.)

1920년대와 30년대를 선학원에서 주석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던 만해 스님의 당시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독립운동 일지를 남길 수 없는 사회 상황인 까닭에 역설적으로 일경의 감찰기록 내지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그 단면을 엿볼 수 있겠다.

6·10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학생들에 대한 일제 학무당국의 가혹한 처벌문제를 두고, 스님은 이를 신문지상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는데, 스님 역시 6·10 만세운동과 대동단 의거로 선학원에서 일경에 사전 검속되어 고초를 치른 이후였다. 당시 동아일보에 밝힌 스님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한룡운(韓龍雲)씨를 시내 안국동 선학원(禪學院) 으로 차저간즉 씨(=한용운)는 말하되 “일본 사람이 조선을 통치하야 나가는 방침이나 수단은 지금 새삼스럽게 말할 것 업겟지요만은, 이번 이 사건을 보니까 사법 보담도 행정이 한칭 더 가혹한 듯 함니다. (중략) 지난 기미년 삼일운동 때에는 학생에게 대하여 그러한 처치를 하지 아니하엿는데 이번에 이러한 것을 보면 삼일운동 때에는 학생이 전부엿섯고 금번에는 일부분이니까 전부엿을 때는 손을 대이지 못하엿고 일부분이니까 처치하엿다는 의미로 볼 수가 잇고….” - <동아일보〉(1926. 7. 9.)

만해 스님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사이 선학원에서 주석하며 굽히지 않은 신념으로 좌우합작의 신간회를 결성하고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과 ‘조선물 산장려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스님은 1927년(49세)에 신간회 발기의 주역으로 참여한다.〈신간회 경성 지회 이사회의 건, 안국동 40번지 - 감찰기록 경종경고비(京鍾警高秘)〉 (1927. 7. 30.)

이 해 만해 스님은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 및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었고 평소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불교청년회(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동맹’으로 개편한다. 지난 1979년, 대한불교청년회에서는 만해 스님의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의 평화, 언론의 자유, 불교계 개혁에 대한 논지로 기념 학술 세미나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거니와 그 연원을 살펴보면 1924년, 불교유신회 총재로 만해 스님을 선출하여 본격적인 불교 청년회가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6·10만세운동의 다음해인 1927년 6월, 제1회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회가 안국동에서 개최되었는데 (1927. 6. 1.) 지회장은 용운 스님으로 출석인수 19명이다. 이어 신간회 경성지회에서는 7월 30일 안국동 선학원에서 만해 스님의 사회 아래 제2회 회의를 개최, 회칙을 세우고 6시 30분경 이사회를 마쳤다.

이러한 사실은 만해 스님을 감찰하던 일경의 기록에 의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간 3·1만세운동과 6· 10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만해 스님은 경성 종로경찰서의 감시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신간회 회의는 대체로 인사동 회의실과 선학원(안국동 40번지)에서 개최되었는데 그 동태에 대해서는 주로 당시 종로경찰서장이 일제 경성지방법원(검사), 경기도 경찰부장, 경무국장 등에게 보고했다.

좌우합작의 신간회 발기는 이전부터 논의되어 오던 차, 바야흐로 1927년 1월과 2월 사이에 조직계획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초기에는 조선일보 기자, 동아일보 기자, 시대일보 기자, 고등학교 교원 (교사 및 교장), 종교계 간부 등이 모였는데, 불교 교원 간부로서 만해 스님이 참여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 가운데 만해 스님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일제가 감찰했던 기록을 살펴보면 (1)신간회 조직계획 (2)신간회 경성지회 간사회(일반) 및 총무간사회 (3)신간회 이사회 및 경성지회장 사임 (4)근우회 경성지회 정기집행위원회 (5)조선인 학생운동 동요의 전말 (6)신간회 및 조선농민회 우편물 (7)교계 잡지 〈불교〉출판 불허(84·85 합호) (8)조선물산장려회 기념회 (9)동경지진 조선인 구제회 개최 등이다. 일제의 집요하고 면밀한 감찰을 확인 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이는 1920년대 초기부터 1932년까지 집중되어 있는데 1920년대는 주로 조선물산장려회, 동경지진 조선인 피해자 구제, 신간회 조직과 경성지회장 역임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 1930년대 역시 신간회의 건(회원 발언)과 학생운동, 우편물과 잡지〈불교〉, 조선농민회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 심우장 주석 시기인 1938년(1938. 8. 9.) 비밀결사의 건(심우장 거주, 민족혁명 동지회 - 비밀결사 흥업구락부)까지 고려해 본다면, 일경의 감찰기록 한 측면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에 대한 집요하고도 치밀한 집중적인 감시를 일제가 행해왔다. 만해 스님이 직면했던 당시의 처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거니와 보통 사람이었다면 숨이 막혀 제대로 운신의 엄두를 낼 수 없을 상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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