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법맥과 전통에 입각한 임제종

▲ 석전 박한영(1870∼1948) 스님.
1911년은 임제종 운동과 함께 시작된다. 만해 스님은 이회광의 맹약으로 한국불교가 일본 조동종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만해 스님은 1911년 1월 6일 증심사 특별총회를 열었고, 그 이후 박한영 스님과 송광사, 백양사, 범어사, 통도사를 넘나들며 임제종 종무원을 설립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박한영 스님은 “이와 같은 중대 문제를 그대로 둘 수 없어서 지금 47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 감옥에 들어가 있는 한용운과 나와 두 사람이 경상도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통문을 돌려 반대 운동을 하는데 그때는 30본산이 없었소.”라고 1920년 동아일보에서 회고한 바 있다. 전라도와 지리산 지역의 승려들이 집단적인 항의를 벌이는 가운데 만해 스님은 임제종의 선두주자로 급부상하였다. 이회광이 돌아온 1911년 1월 15일 영남과 호남의 승려들은 순천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임제종을 세우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등과 함께 호남 일대에 대항의 깃발을 높였고, 조선불교의 부흥을 위하여 조선 고유의 임제종을 창립했다. 임제종이라는 종명은 이회광이 세운 원종이 뚜렷한 법맥을 제시하지 않은데 비해서, 임제종 창립자들은 “한국의 선종은 태고 이래로 임제의 법맥을 이어왔으므로 임제종이 정당하다.”라며 임제종이라 하였다.

임제종 운동의 주역이었던 만해 스님은 그 당시의 상황을 1930년에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그럴 때에 서울 동대문의 원흥사(元興寺)에서 전조선불도(全朝鮮佛徒)들이 모여 불교대회를 연다는 소식이 들리므로, 나는 부랴부랴 상경하였는데 그 때는 이회광씨가 대표가 되어 승려해방(僧侶解放)과 학교 건설 등을 토의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대단히 좋으나 미기(未幾)에 합병이 되자, 전기(前記) 이회광 일파는 무슨 뜻으로 그러하였는지 일본의 조동종과 계약을 맺고 조선의 사찰 관리권과 포교권과 재산권을 모두 양도하는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 주착없는 계약을 하자 한 것이 그 때 이회광 일파의 원종(圓宗)이므로 우리는 그를 막기 위하여 임제종(臨濟宗)이란 종(宗)을 창립하여 그의 반대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운동이 다행히 주효(奏效)하여 이회광의 계약은 취소되어 조선의 불교는 그냥 살아 있게 된 터이었다.”

당시 승려대회에서는 임제종 임시 종무원의 관장으로 선암사의 김경운을 선출하였으나 연로하여 직책을 수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관장 대리로 만해 스님을 선출하였다. 이에 1911년에 하동 쌍계사에서 제2회 총회를 하고 임제종 종지를 확산시키기로 결의하고 대구·서울까지 포교당을 설치하고, 임제종 종무소를 범어사로 옮기기로 하였다. 즉 임제종 운동을 호남지방 일대의 사찰에서 영남지방으로 기반을 더욱 확대하면서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등을 3본산(本山)으로 정하고 임제종 종무원을 범어사에 두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임제종은 범어사로 종무원을 옮기고 서울을 비롯하여 광주·대구 등지에 포교소를 세우는 등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범어사 만해 스님 중심의 남방 임제종과 원흥사 이회광 중심의 북방 원종으로 불교계가 나누어지게 되었고, 두 양종의 대립과 갈등은 본격화되었다.

사찰령 반대운동

총독부는 조선불교를 독립시켜 발전시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1911년 6월 3일에 ‘사찰령(寺刹令)’을 반포하게 된다. 사찰령 제1조는 사찰의 병합·이전에 관한 사항만 있고, 사찰의 창립에 관한 내용이 없다. 결국 처음부터 한국불교의 확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조에서는 사찰은 지방관의 허가 없이 전법·포교·법요 집행과 승려 거주의 목적 이외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것은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로서 사찰이 이용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제3조는 각 본사에서 사법을 제정하여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했고, 제5조는 사찰의 재산을 처분할 때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이것은 불교계의 재정권을 장악하려는 총독부의 의도임을 알 수 있다. 제7조는 사찰에 관한 어떠한 사항도 총독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제반 사항 모두를 총독이 정하도록 했다. 결국 사찰령은 식민지 통치기구의 일종으로 조선 내 모든 사원과 승려 문제를 규제함으로써 총독부가 사찰을 일원적으로 통제 관리하겠다는 의도로 평가된다.

그런데도 당시 불교계의 일부는 사찰령이 사원의 재산을 보호해주고 승려를 사람대접 해주는 ‘은혜’의 법령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사찰령으로 인하여 포교 자유가 보장되고 불교계가 다시 중흥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또 다른 불교계 일각에서는 사찰령이 교계를 구속하는 악법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저항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만해 스님도 사찰령이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주적인 한국불교의 발전을 저해하는 악법으로 보았다. ‘영남 호남 지방의 기반을 경성으로 확대하고 세계를 무대로 임제종의 도덕을 펴겠다고 하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만해 스님은, 경성에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의 건립을 추진하여 1912년 5월 26일에 개원했다. 만해 스님과 용성 스님이 주도한 개교식에는 13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뤘다.

총독부는 당시까지도 이회광이 주도하는 원종의 종무원을 인가하지 않았다. 총독부가 ‘사찰령’을 제정 공포하면서 한국불교를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는 종명을 내세우고, 원종과 임제종 모두 총독부 통제 속에 두려 했다. 1912년 6월 21일 각 본산 주지회의가 진행 중인 때, 총독부는 원종 종무원의 이회광, 강대련과 임제종 종무원의 만해 스님을 소환하여 원종 종무원과 임제종 종무원의 간판을 철거하도록 하였다. 이 자리에서 원종 측은 이미 3일 전에 각 본산 주지회의의 결과에 따라 원흥사 안의 원종 종무원 간판을 철거하고 조선 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禪敎兩宗各本山住持會議院)으로 변경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는 종명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만해 스님은 범어사에 임제종 종무원의 간판을 내걸고 활동하였다. 그리고 공문서에 ‘조선임제종(朝鮮臨濟宗)’이라고 기재하자, 총독부는 1912년 6월 26일 자로 경남 도지사에게 통첩을 내려 ‘조선임제종’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지시하였고, 결국 범어사에서 임제종 종무원의 간판은 내려졌다. 임제종 운동은 일제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본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결코 그의 지향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임제종 운동의 정신은 이후 불교계의 민족운동 및 불교개혁 운동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임제종의 간판은 내려졌지만, 만해 스님은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의 이름을 ‘조선선종중앙포교당(朝鮮禪宗中央布敎堂)’으로 변경하고 포교당을 확충하면서 포교활동을 강화하였다. 또한 조선불교회의 설립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는 각 사찰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승려와 교인의 통합기관을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사찰령의 틀에서 조직체를 건설해야 하는 본산 주지들의 의견과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조선불교회는 설립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 1918년 〈유심〉이라는 불교 잡지의 간행을 통해 불교 계몽운동을 지속하였고 1919년 3.1운동 당시 불교계 민족 대표로서 활동하게 된다.

※ 참고문헌
·한용운, 〈나는 왜 중이 되었나〉, 《전집》 1, 412쪽.
·강미자, <한용운의 불교개혁운동과 민족주의운동>, 경성대학교 대학원, 2007.
·고재석, 《한용운과 그의 시대》, 역락,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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