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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삼국유사’ ②
조선 이후 관찬 사서 편찬의 전범
2019년 01월 31일 (목) 16:27:23 이덕진 .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고려 문종 29년(1075) 경주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풍만한 얼굴과 큰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글을 잘 짓고 고금(古今) 일을 잘 알아, 학사들의 신망을 많이 받았다고 전한다.1)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이다. 신라가 망할 무렵 증조부인 김위영(金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다. 아버지 김근(金覲) 때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김근은 과거를 통해 중견 관료인 예부시랑(禮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까지 이르렀지만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김부식은 13·14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김부식은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하여, 직한림(直翰林)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역임하는 등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었으며, 예종(睿宗)·인종(仁宗)에게 경사(經史)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인종이 즉위하면서 외척인 이자겸(?∼1126)이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이자겸의 전횡에 비례(非禮)를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않았다. 1126년과 1127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하여 송나라가 몰락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박승중(朴昇中)·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2)

이자겸이 정계에서 축출된 이후,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불에 탄 것을 기화로 묘청(妙淸, ?~1135) 일파가 서경천도설(西京遷都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유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천도가 어렵게 되자 묘청은 1135년(인종 13) 1월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때 김부식은 중서시랑평장사로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맡고 있었는데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三軍)을 지휘 통솔해 그 진압을 담당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은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칭호와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脩國史上柱國兼太子太保)로 임명되었다.3)

이후 왕명을 받들어 《삼국사기》의 편찬을 지휘하였으며, 그 후 집현전 태학사·태자태사(太子太師)의 벼슬과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더하였다. 1142년(인종 20) 김부식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145년(인종 23)에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국개국후(樂浪國開國候)에 봉했고, 1151년(의종 5)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부식은 1145년(고려 인종 23) 왕명을 받들어 정습명, 김효충(金孝忠) 등 10인과 함께 《삼국사기》의 편찬을 지휘한다. 이때 최산보(崔山甫)·이온문(李溫文)·허홍재(許洪材)·서안정(徐安貞)·박동계(朴東桂)·이황중(李黃中)·최우보(崔祐甫)·김영온(金永溫) 등이 편수에 참여하였다. 《삼국사기》는 고려 초에 편찬되었던 《구삼국사(舊三國史)》 등의 고유한 사료와 중국의 사서 등을 참조하여 귀족의 입장에서 유교적 사관으로 엮은 사서(史書)이다.4)

삼국사기의 역사적 의마, 공(功)과 과(過)

김부식은 새로운 삼국시대의 역사를 저술한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5)

첫째, 선비들이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두루 통달하지만,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삼국은 오래된 왕조의 역년인데도 그것을 자세히 기록한 역사서가 없다.

둘째, 《고기(古記)》 등이 있다고 해도 문자도 졸렬하고 빠진 사실이 많다. 임금의 선정과 잘못, 신하의 충성과 사악(邪惡)이며 국가의 안정과 위태로움 등이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교훈을 남길 수가 없다.

《삼국사기》는 기술에 있어서 자주적이면서도 사대적인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신라본기(新羅本紀)> 12권,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10권, <백제본기(百濟本紀)> 6권을 중심으로 해 <연표(年表)>, <지(志)>, <열전(列傳)> 등의 50권으로 엮인 이 책은 편년체(編年體)로 기술하면서 기전체(紀傳體)를 혼합했다. <본기>는 왕들의 재위 기간 중에 일어난 사실을 연월일순으로 기재한 것이고, <연표>는 세 나라의 연대를 중국 연대와 대조한 것이다. <지>는 역대 제도의 연혁과 변천 과정, 그리고 제도사나 문화사가 되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제사(祭祀), 악(樂), 거기(車騎), 지리(地理), 직관(職官) 등을 모았으며, <열전>은 현상(賢相), 명장(名將), 충신(忠臣), 학자(學者), 화랑(花郞), 효자(孝子) 등의 인물 전기를 모은 것이다.6)

《삼국사기》는 여섯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주의를 끈다.

첫째, 고구려·백제·신라를 중국에서 떼어내 완전한 자주국가로 인정함을 통하여, 중국에 대한 고려제국의 자존심을 표현했다. 이른바 기전체(紀傳體) 역사의 표본인 중국의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의 체재와 동일하게 삼국의 역사를 기술하였다.7) 즉 제후(諸侯)에게 적용되는 세가(世家)를 버리고 천자(天子)의 사적을 기술한 본기(本紀)로 항목을 잡아 각 왕조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8)

둘째, 중국민족의 침략에 대해서 ‘내침(來侵)’이라는 문구로 기술하여 서로 대등한 국가임을 피력하였다. 그뿐 아니라 중국민족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운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의 활약을 비중 있게 기록하고, 비록 당의 세력을 끌어들여 삼국을 평정했으나 뒤에 당의 세력을 몰아낸 김유신과 문무왕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다. 이것은 오늘날 중국에서 고구려를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라고 왜곡하는 따위의 역사 인식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다.9)

셋째, 그러나 다른 한편 사대적인 입장에서 중국 중심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기술하였다. 중국의 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그대로 인용해, 비록 본기(本紀)라는 항목을 잡았으면서도 본디 짐(朕, 천자가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라고 기재했던 것을 과인(寡人, 제후의 호칭)이라 쓰고, 태자(太子)라 했던 것을 세자(世子)로 낮춘다.

넷째, 신라를 삼국의 정통으로 만들었다. 경주 김씨 후예인 김부식은 삼국의 사실을 나누어 실으면서 신라를 맨 앞자리에 놓았다. 즉 삼국 가운데 신라가 맨 처음 건국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더하여 신라를 중심으로 기록해, 고구려가 북방에서 활약하고 백제가 해상에서 일본과 연계해 활약한 것, 그리고 발해의 역사를 부각시키지 않았다.10)

다섯째, 철저하게 유학 중심으로 진술하였다. 설총(655∼?)·강수(생몰년 미상) 등의 유학자들은 항목을 만들어 높이 올리면서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신라시대의 원효(617∼686)·의상(625∼702) 등의 고승들은 모조리 빼버렸다. 이것은 모두 유교 사대사관에서 나온 것으로, 이로부터 시작된 사대사관은 고려 말과 조선조에 걸쳐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애써 낮추는 중화 중심의 역사를 만드는 단초가 되었다.11)

여섯째, 삼국 이전의 역사를 외면해 한국사의 시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단군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주(周)의 책봉을 받은 기자를 정통으로 보았으며, 위만이 왕이라 호칭한 사실을 참람(僭濫)되다고 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삼국 이전의 역사 서술은 신화로 엮여 있거나 상상이 가미되어 있어서 김부식이 보기에는 역사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12)

《삼국사기》는 그 이전에 존재하던 사서보다는 한 단계 발전된 역사의식과 편찬방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전통 역사학을 정착시킴은 물론 그 방향을 제시하여 조선 초기 이후 《고려사》 등의 관찬사서 편찬의 선구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뒤, 다른 여러 역사서적을 불살라버렸다고 한다.13) 《삼국사기》만을 후세에 남겨두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앞에서 말한 《고기》 등 삼국시대에 관한 역사 서적이 모두 없어졌다. 이 때문에 신채호(1880~1936) 등의 역사가는 “《삼국사기》는 자주의식을 말살시키는 사대주의의 표본”이며, 김부식은 “역사의 반역자라고 호되게 비판했다.14)

주) -----
1) 한국고전번역원 옮김, 서긍 지음, 《고려도경》(서해문집, 2005), p.93.
2) 이재호, 《삼국사기》(솔, 2006), p.13.
3) 위의 책, pp.13~14.
4) 이기백, 《한국사신론》(일조각, 2002), p.189.
5) 이재호, 앞의 책, pp.17~20.
6)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7(한길사, 2009), pp.263~264.
7) 이재호, 앞의 책, p.6.
8) 본기(本紀)라는 용어는, 사마천 《사기》의 체재에 의거하면, 천자의 사적을 기술한 편명에서만 쓴다. 《사기》에서는 제후의 사적을 기술한 편명은 세가(世家)라고 했다. 《삼국사기》는 기전체 정사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현존하는 최초의 것이다. 고구려·신라·백제 3국의 기록이 본기로 수록되어 있다. 조선 시기에 들어와서는 유교적 명분관이 엄격히 적용되어, 기전체 역사서를 적으면서도 본기 항목을 설정하지 않게 되었다. 《고려사》에서도 고려 역대 왕들의 사적을 세가(世家)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 중엽 이규보(李奎報)가 편찬한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라고 되어있다.
9) 이재호, 앞의 책, pp.6~7.
10) 이이화, 앞의 책, p.267.
11) 위의 책, p.267.
12) 위의 책, p.266.
13) 위의 책, p.270.
14) 길진숙, 《삼국사기》(북드라망, 2017), p.34.

이덕진 | 대행선연구원 편집위원장,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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